내가 읽은 시

독서유감 2 - 정한아

공산(空山) 2022. 7. 8. 20:52

   독서유감 2

   정한아

 

 

   우리는 가장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 혹은 우리는 사랑 같은 것은 환영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 체념하지 않고 포기하지도 않고 그런데 실상은 얼마쯤 체념한 채로, 상당 부분 포기한 채로, 이게 그거야,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너는 알아. 너는 사랑한 적이 있어. 환영은 의외로 생생하고 복잡한 것이어서 때로 일생을 지배하기도 하는 거라. 이상한 일이야. 그런 환영에 도의를 지키려고 너는 끊임없이 망설이고 있네. 귀신이 된 남편에게 미안해서 수절하는 청상과부처럼, 없지만 사실적인 대상을 향한 이 난폭한 감정은

 

   신의 모습을 허용하지 않는 어떤 유일신교의 신앙처럼 여겨지기도 해. 절대적인, 완전한 진리, 우주적인 10차원의 사랑을 믿어서 너는,

 

   답답할지도 몰라 멍청할지도 몰라 어쩌면 광신도처럼 눈빛이 살짝 이상할지도 몰라

 

   우리는 가장할 수도 있을 거야. 혹은 우리는 사랑이 정말 있다고 믿을 수도 있을 거야. 체념하고 포기하고 그런데 실상은 완전히 체념하지 않고 정말로 포기하지 않고, 이건 그게 아니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거야.

 

   말을 바꿔봐야 그리 다르지도 않아. 중요한 건 네가 안다는 거야. 너는 사랑한 적이 있어. 있지도 않은 너의 유일한 사랑에 대한 존경과 예절 때문에 너는 언제까지 더러운 고독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아무에게도 미안해하지 않겠어, 결심하면서, 너는 전속력으로 뒤로 달려가는 거야. 달리고 달려서 너의 이십대와 십대를 지나, 너의 탄생과 현생인류를 지나 화석에까지 닿는 거야. 너는 드디어 시조새의 이빨과 깃털. 너는 언젠가 돌멩이였던 평온. 나무가 된 다프네의 굳어가는 입술에 입 맞추는 햇살.

 

 

    ―『울프 노트』문학과지성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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