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삼

김종삼 시의 건너뜀과 빈자리 - 서범석

공산(空山) 2015. 12. 10. 14:27

김종삼 시의 건너뜀과 빈자리

서범석(시인/문학평론가/대진대학교 교수)

 

1. 디아스포라적 삶의 빈자리

 

김종삼(金宗三, 19211984) 시인이 타계한 것이 불과 30년도 되지 않아 일정부분 우리와 동시대를 살고 간 시인이지만, 몇 가지 생애적 자료의 불확실성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음을 먼저 말하고 싶다. 첫째는 그의 출생지인데, 김종삼 시인의 문학적 삶을 살펴보기 위하여 자료를 뒤지다 보면 모든 자료에서 황해도 은률 출생이라는 기록을 보게 된다. 그러나 김종삼은 은률 출생이 아니고 평양 출생이라는 것이다. 아직 정정하게 생존하는 시인의 부인 정귀례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은률은 시인의 외가가 있던 곳으로 유아시절 얼마 동안 머무른 곳이기는 하지만 김종삼은 평양에서 출생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친형인 김종문의 출생지가 평양인 점을 감안하면 신빙성 있는 증언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그의 생일문제인데 1921319일생으로 나와 있는 자료들이 많은데, 이는 틀림없는 오류로 판단된다. 김종삼 시인의 생일은 1921425일이고, 그의 생존시에도 양력으로 가족들이 425일에 생일을 기념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태어난 공간과 시간이 모두 오류인 셈인데 이는 그의 생애의 빈자리가 큼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그는 북한 땅에서 태어나 평양의 광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중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1938년 일본으로 가서 동경의 도요시마상업학교에 편입학하여 1940년에 졸업하였다. 2년 뒤인 1942년에는 일본 동경문화원 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19446월까지 다니고 중퇴하였다. 중퇴 이유는 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에 반대하여 집에서 학비를 보내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어서 7월에 동경 출판배급주식회사에 입사했다가 12월에 사직하고, 부두 노동자 등으로 전전하다가 이듬해 8월 해방직후 귀국하였다. 그리고 1947년 봄 월남하여 대부분 서울에서 살았다. 1953년에는 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김종삼 시인과 친분이 두터웠던 문학평론가 임긍재가 주관하던 ?신세계?에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문학적 삶을 시작하여 1984128일 타계할 때까지 약 30여 년간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생활인으로서의 개인적 삶은 크게 행복하지 못했던 같다. ?군사 다이제스트? 편집부, 국방부 정훈국 방송과 상임연출가(음악담당), 동아방송 제작부(음악담당 프로듀서) 등에서 근무했지만 안정된 직장생활을 길게 하지는 못했다. ‘음악에 대한 심취는 그의 경제적 삶을 더욱 고단하게 했던 것 같다. 제법 월급을 많이 받을 때에도 그는 가정보다는 천상병 같은 문단 술친구들을 비롯한 타인들과의 교유에 더 신경을 써서 생활비는 조금씩밖에 내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생활의 윤택시의 광채는 양립할 수 없다는 그의 신념이 발현된 생애였다고나 할까. 그는 기인적 행로를 술과 음악에 취해 걸어간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생애는 디아스포라적 삶의 연속이었고 그에 따른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을 잊기 위하여 방황의 길을 걸어간 사람으로서, 가족도 있고 나라도 있었지만, 마음의 공간은 늘 비어 있었는지 모른다.

 

디아스포라(diaspora)흩어짐의 뜻으로, 팔레스타인 이외의 지역에 살면서 유대적 종교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까 김종삼도 고향에서 일탈하여 평생 뿌리 뽑힌 삶을 영위하였던 것이고, 그의 정신은 항상 떠나온 출발점에 대한 그리움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서 비롯된 마음의 빈자리는 계속되었고 그 공간에 음악을 채우고 불쾌해지거나 노여울 때 를 썼다고 한다. 그의 시세계가 흩어진 것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된 순수 세계를 음악과 관련된 언어 등으로 인유하여 노래하였고, 그의 작품수가 문학적 생애에 비하여 턱없이 과작인 까닭이다. 디아스포라적 삶에서 오는 마음의 빈자리가 김종삼 시인의 삶의 공간이었고, 시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김종삼 시인의 생애에서 탈공간(脫空間, dislocation) 경험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출생지(평양 또는 은율)에서 성장지(평양 또는 은율)에로의 전치(轉置, displacement), 조국에서 식민지 본국(일본)으로의 전치, 북한에서 남한으로의 전치가 그것이다. 그것은 삶의 건너뜀이고 그에 의한 빈자리에 자아의 능동성과 유효성이 폐기되거나 윤색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자아는 원점을 향한 그리움, 현실적 삶에서의 소극성(이는 김종삼의 경우 순수지향의식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떠돌이로서의 불안감, 고통에 대한 숨김이나 전유(轉有, appropriation) 등으로 의식화되어 김종삼 시에서 형상화된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시의 주제적 측면은 그에 상응하는 방법적 특성을 불러오기 마련인데, 그게 바로 건너뜀에 의한 빈자리 만들기라고 판단된다.

 

2. , 그 비밀의 존재

 

시는 그때마다 무엇이 보이나 하고 궁금히 여기는 사람들 앞에서 문을 열어 보이고 곧 문을 닫아 버린다는 미국의 시인 샌드버그(Carl Sandburg)의 말처럼 분명한 정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비밀의 세계에 위치한다. 이형기 시인의 말처럼 정체불명의 영원한 미지수가 시이기 때문에 포우(E. A. Poe)시에 대한 정의는 단지 말의 전쟁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정리했고, 엘리엇(T. S. Eliot)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고 단정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시는 사람들이 얼른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난해하고 모호한 상징물로서 존재하는 것이 시의 본성인 것이다. ‘무한다면체의 얼굴에 깊고 넓은 함축성을 품고 있는 괴물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독자들은 시적 상황이나 내용 또는 사상 등을 만족하게 들여다 볼 수 없는 것이고,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은 시에 대하여 모르거나 오해하고 있는 것이리라. 시를 창작하는 입장에서도 가능하면 숨기고 감추면서 비밀의 여백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두도록 노력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비밀스러운 존재라는 것은 정체를 잘 모른다는 말이다. 이러한 존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첫째로 몸의 일부분(또는 전부)숨김이 필요하다. 둘째로는 몸이 다 보이더라도 변장을 하여 그 정체를 잘 알아볼 수 없도록 하여야 한다. 앞의 것을 숨김의 건너뜀이라 부르고자 하는데 이는 형태적으로 부분을 숨김(생략, 비약)으로써 의미의 건너뜀을 통하여 빈자리를 만드는 방법이다. 이는 의도적 생략이나 유추가 난해한 비약, 불완전한 구문, 시제의 불연속 등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뒤의 것은 변장으로서의 건너뜀이라고 이르고자 하는데 이는 비유나 상징 등의 수사적 방법을 통한 의미의 함축으로 빈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김종삼의 시를 보면 숨김의 건너뜀변장으로서의 건너뜀두 가지가 모두 적극적으로 활용되어 시의 본질로 핍진(逼眞)한다. 그러니까 김종삼 시인은 건너뜀으로 비밀의 공간을 조성하였고, 그것을 통하여 시의 본질인 비밀의 존재를 창조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는 형식주의자의 용어를 빌면 낯설게 말하기라고 할 수 있다. 비틀기, 반대로 말하기, 모호하게 말하기, 꺾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숨기기(감추기), 비워 두기, 비논리적으로 말하기 등을 통하여 긴장을 조성하고 그 긴장을 감내하는 시간을 통과하면서 이해와 동감을 만나는 순간에 감격적으로 도달하게 하여 독자들의 가슴을 울려 감동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그 긴장이 때린 감동의 파장이 클수록 독자의 가슴에 잊히지 않는 감명(感銘)’으로 새겨져 오랜 시간을 견디는 것이다.

 

시의 본질을 꿰뚫은 김종삼의 건너뜀은 우리들에게 그의 시를 오랜 동안 보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곱씹게 하고, 아름다움의 세계에 젖게 하는 요체가 되는 것이다.

 

3. 북치는 소년과 건너뜀

 

시는 산문과는 다른 담화구조로 되어 있다. 그 형태적 다름은 무엇보다 산문문학에 비해 그 길이가 짧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행과 연의 구분이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것이 시형식의 본질적 특징이다.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짧게 말한다는 것은 생략이나 응축에 의한 빈자리 설정으로 독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상상의 공간을 제공하여 효과적으로 말한다는 것이 된다. 또 행과 연을 구분하여 말한다는 것도 행과 행 사이 또는 연과 연 사이에 빈자리를 두고 건너뜀을 본질로 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건너뜀에 의한 빈자리의 설정은 시의 본질적 특성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건너뜀은 의미의 불확정성을 가져오게 되며, 그것은 시의 중요한 효과요인으로 기능한다.

 

김종삼 시인과 비슷한 시대를 살다 간 유명한 시인으로 우리는 김춘수와 김수영 시인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여기서는 세 시인의 대표작인 그리고 북치는 소년을 대상으로 하여 건너뜀의 양상을 비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누가 시의 본질에 더 가까이 갔는가의 문제와 직결되는 일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ㅡ김춘수, 전문

 

1952년에 발표된 이 시는 서정적 자아가 를 불러 주었을 때 그가 이 되었다는 것과 자신도 누군가의 꽃이 되고 싶으니 를 불러 달라고 말하면서 우리들은 모두 서로의 또는 눈짓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전하고 있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상징적으로 암시된 눈짓변장으로서의 건너뜀을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그, , 우리들을 변장시킨 의 시적 변용에 주목하게 만든다. ‘사람으로 바꾼 의미의 건너뜀을 통하여 감동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단순한 시적 장치에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시의 형태적 측면이나 문장구조에서 숨김의 건너뜀이 없다는 것이다. 이 시를 산문으로 붙여 놓아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 문장성분 하나 빠진 것이 없는 완성된 구문의 나열에 그치고 있다. 필연적 사유도 없이 문장이 끝날 때마다 마침표를 찍은 것도 산문적 발상의 결과이다. 그것은 행과 연을 구분한 것이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시의 본질적 특성에 알맞은 구조라고 말하기 어렵다. 생략된 언어나 사건이나 생각이 하나도 없이 완벽한 진술로 되어 있다. 이러한 설명적 형식은 산문에 적당한 방법이다. 그렇다고 이 시가 산문시도 아니다. 이 작품은 시의 본질에 도달하기 이전의 산문적 언술과 그에 따른 상상력의 부족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예술적 상상력이 미흡하고 따라서 시를 이해하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며 그래서 시적 긴장도 높지 않다. 한국의 대표적 시인의 대표시가 되기에는 부족한 구석이 많은 편이다. 독자의 몫으로 배정되어야 할 빈자리가 너무 좁다는 말이다. 김수영의 또한 비슷한 모습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ㅡ김수영, 전문

 

1968년에 발표된 역시 바람이라는 대립적 두 시어의 상징적 암시에 의한 의미의 건너뜀 말고는 이렇다 할 숨김의 미학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김춘수의 꽃보다는 울다웃다라는 행위의 상징도 겹침으로써 보다 비밀스러운 장치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문장성분 하나 빠지지 않은 완성된 모습의 구문은 여전하다. 두 거장의 이러한 시적 기술(記述)은 산문적 진술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시는 시의 문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시의 본질적 특성에 도달하였다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것이다. 누구의 말대로 우리는 우상의 가면을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변장으로서의 건너뜀은 있어도 숨김의 건너뜀이 없는 이들의 시는 범박하게 말하면 시의 본질에 반쯤만 접근한 것은 아닐까. 물론 이 작품들을 꼼꼼히 읽으면 더 많은 시적 장치와 시적 구조를 찾아내기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비밀의 존재인 시에 있어 형식적 측면이나 구문적으로 건너뜀의 공간이 더욱 넓었으면 하는 바람을 버릴 수가 없다. 그것은 독자의 몫을 축소시킨 것에 대한 아쉬움인 것이다. 이제 1969년 시집 ?십이음계?에 실린 김종삼의 북치는 소년을 보자.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ㅡ김종삼, 북치는 소년전문

 

이 시는 우선 앞의 두 작품보다 훨씬 간략한 형태로 되어 있다. 불과 다섯 행의 가벼운 몸무게를 가지고 있지만 커다란 빈자리를 독자들에게 마련해 주고 있다. 우선 제목을 보면 이나 은 누구나 다 아는 보통명사로 되어 있다. 그러나 북치는 소년은 어떤 특정한 사람이거나 특정한 사정을 아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고유명사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제목으로 되어 있어 독자의 궁금증이나 상상력을 부르는 어떤 빈자리가 들어 있다. 그 빈자리를 메울 수 있는 의미는 숨어 있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카드에서 유추할 수 있는 북치는 소년은 성탄 캐럴의 제목이다. 이 음악의 제목과 관련하여 독자에게 아직 숨겨진 2차적 내용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있다.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하고 있을 때, 북치는 소년병사가 있었는데, 탄환도 부족하고 사기도 떨어진 프랑스 군의 사령관이 퇴각명령을 알리는 북을 치라고 하였으나, 소년은 눈물을 흘리며 퇴각의 북을 칠 줄 모른다고 하면서 진군의 북을 쳐서 지원군이 온 것으로 이해한 병사들이 용기를 내어 진군함으로써 승리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령관이 그 소년을 다시 찾았을 때 소년은 이미 적탄을 맞고 북채를 두 손으로 굳게 움켜쥔 채 죽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시는 제목만 가지고도 이렇게 큰 빈자리를 마련하여 긴장을 불러오고 있다. 김종삼은 많은 시에서 고유명사, 음악용어 등을 사용하여 이러한 빈자리를 독자에게 내어주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시의 구문적 특성은 문장성분을 제대로 갖춘 완전한 문장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문장의 주성분인 주어도 서술어도 찾을 수 없는 몇 개의 구절만으로 되어 있는 시다. 그래서 우리는 숨어 있는 주어와 서술어의 정체를 밝히려고 긴장하게 된다. 숨긴다는 것은 긴장을 조성하는 일이다. 긴장의 시간이 흐른 다음 우리는 시의 제목으로 주어를 유추할 수 있다. 북치는 소년이라는 음악이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어떠하고, 가난한 아이에게 서양나라에서 온 크리스마스 카드처럼어떠하며,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어떠하리라는 사실을 암시받게 된다. 그 다음은 숨겨진 서술어를 찾을 차례이다. 그것은 어떠하다에 해당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한 단어로 분명하게 제시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독자들은 순간적이다’, ‘일회적이다’, ‘허망하다’, ‘순수하다’, ‘이상적이다’, ‘아름답다’, ‘의미 깊다’, ‘유혹적이다’, ‘유일하다’, ‘살고 싶다또는 죽고 싶다등을 연상하면서 미적 긴장의 파장에 공명하게 된다. ‘건너뜀에 의한 빈자리의 진가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나 보다 훨씬 큰 빈자리 속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이 들어가서 미적 유희와 정신적 쾌락에 동참하게 된다는 말이다. 순수 세계를 지향하는 시인의 미의식을 음미할 수 있는 대표작이라고 말하기에 주저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숨김의 건너뜀이 이룬 미적 결실이다.

 

북치는 소년은 확장직유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직유는 다 아는 것처럼 ‘A(, /) B처럼(같이, 듯이) 하다의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확장직유는 B가 복수로 나열되는 형태를 말한다. 그리고 관계사 뒤의 서술어인 하다에 의하여 AB의 동일성이 드러나는 설명적인 비유가 직유이다. 위의 시에서 AB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에 해당하는 것인데, A는 모두 숨어 있고, B만 세 개로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설명부분인 서술어 하다가 생략되어 숨어 있다. 따라서 직유이지만 설명적 부분을 감춤으로써 은유적 성격이거나 아니면 더 나아가 상징적 함축성을 가지게 하여 보편적인 직유와는 아주 다르게 비밀의 세계를 창조한다. 직유이든 은유이든 비유는 ‘A=B’라는 동질성(등가성)을 원리로 하여 이루어진다. 이 시에서 A북치는 소년이라는 음악으로 본다면 그것은 복수의 B처럼 어떠하다는 것인데 그것마저 생략되어 불확정성을 더욱 고조시킨다. 북치는 소년=내용 없는 아름다움=크리스마스 카드=진눈깨비로 유추하여 읽을 수 있지만 또 하나의 등가항인 어떠하다가 생략되어 긴장의 미학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는 숨김의 건너뜀변장으로서의 건너뜀을 모두 갖추고서 몇 겹의 베일에 싸여 있는 비밀스러운 존재가 된다. 그리하여 이중삼중으로 건너뛰어 독자의 미적 상상력을 커다란 빈자리로 초대하여 즐기게 하는 것이다.

 

4. ‘건너뜀의 대 잇기

 

지금까지 살펴본 김종삼 시의 건너뜀의 방법은 시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그의 독특한 노력이나 재능으로 인정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실험적 기법, 개성적 세계관, 모더니즘적 미의식의 발현 등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따른 난해성의 문제를 많은 사람들이 우려할 수밖에 없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대중에게 쉽게 많이 읽히기 위하여 시를 짓는다면 시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며 시의 발전 또한 기약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현재 한국시단을 휩쓸고 있는 난해시문제 또한 이러한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들은 김종삼이라는 거울에 비춰 볼 때 나름대로의 진정성 있는 예술창조의 한 모습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매미가 허물을 벗는, 점액질의 시간을 빠져나오는, 서서히 몸 하나를 버리고, 몸 하나를 얻는, 살갗이 찢어지고 벗겨지는 순간, 그 날개에 번갯불의 섬광이 새겨지고, 개망초의 꽃무늬가 내려앉고, 생살 긁히듯 뜯기듯, 끈끈하고 미끄럽게, 몸이 몸을 뚫고 나와, 몸 하나를 지우고 몸 하나를 살려내는, 발소리도 죽이고 숨소리도 죽이는, 여기에 고요히 내 숨결을 얹어보는, 난생처음 두 눈 뜨고, 진흙을 빠져나오는 진흙처럼

 

ㅡ오정국, 진흙을 빠져나오는 진흙처럼전문

 

김종삼의 북치는 소년에 보이는 건너뜀의 방법이 한결 발전된 모습으로 이 시에 나타나 있음을 우리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산문시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주어와 서술어를 갖춘 완전한 문장이 하나도 없는 시적 구문을 통하여 북치는 소년의 혈통을 확인하게 된다. 오정국이 김종삼 시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지 필자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 구문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고뇌를 통하여 깨달은 시적 본질의 영역에 가 있음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바처럼 이 시의 핵심은 진흙을 빠져나오는 진흙처럼에 놓여 있다. 그러나 북치는 소년처럼 직유형태를 분명하게 찾아보기 어렵도록 앞부분이 복잡성을 띠고 있다. 그 복잡성의 내용을 종합하고 마무리하는 결론적 성격을 마지막 직유 부분이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직유 부분에서 원관념인 A도 보조관념인 B도 그것들의 동일성 설명 부분인 서술어도 모두 건너뜀으로 처리되어 북치는 소년보다 더욱 난해하고 동시에 긴장이 높고 의미가 깊다. 그러나 필자는 이 시를 진흙을 빠져나오는 진흙처럼이 일단 가상의 A1이고 앞부분들이 모두 A1과의 동일성을 설명하는 서술구문으로 가상 B들의 복합체로 보고자 한다. 그렇게 읽으면서 숨어 있는 진짜 A의 정체를 풀어가는 방법을 택하자는 독법이다. 그렇게 볼 때 가상의 A1은 매미가 허물을 벗는 것이며, 점액질의 시간을 빠져나오는 것이며, 서서히 몸 하나를 버리고 몸 하나를 얻는 것인데 그것은 살갗이 찢어지고 벗겨지는 순간이다. 그때에 날개에 번갯불의 섬광이 새겨지고, 개망초의 꽃무늬가 내려앉는 새로운 생성이 이루어진다. 그 시간은 생살 긁히듯 뜯기듯 고통을 수반하는 시간이며, 끈끈하고 미끄럽게, 몸이 몸을 뚫고 나와, 몸 하나를 지우고 몸 하나를 살려내는 신비한 시간이다. 이와 같은 고통을 통과한 탄생의 신비함은 발소리도 죽이고 숨소리도 죽이는 경외의 시간이 되며, 생명체인 서정적 자아의 숨결을 고요히 얹어보는 동질성 확인의 시간처럼 보인다. 이렇게 보면 이 시에 나타난 비유체계는 진짜 A = 가상 A1 = 가상 B들의 복합체(설명부분)'가 된다. 요약하면 A진흙을 빠져나오는 진흙처럼과 같은 것으로서 새롭고 신비한 존재의 생성 시간이거나 생성 그 자체가 된다. 그러니까 A는 몇 겹의 비밀에 쌓여 있어 정체를 숨기고 있는 그 무엇인데 우리는 다만 생명생성, 예술창조, 가치구현, 이상실현 등을 상정하면서 정답 없는 미적회로를 유영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김종삼의 내용 없는 아름다움에 빠져 미적 유희를 즐기듯이 말이다.

 

두 개의 목이

두 개의 기둥처럼 집과 공간을 만들 때

창문이 열리고

불꽃처럼 손이 화라락 날아오를 때

두 사람은 나무처럼 서 있고

나무는 사람들처럼 걷고, 빨리 걸을 때

두 개의 목이 기울어질 때

키스는 가볍고

가볍게 나뭇잎을 떠나는 물방울, 더 큰 물방울들이

숲의 냄새를 터뜨릴 때

두 개의 목이 서로의 얼굴을 바꿔 얹을 때

내 얼굴이 너의 목에서 돋아나왔을 때

 

ㅡ김행숙, 숲속의 키스전문

 

김행숙의 이 시에서 우리는 반복되는 ㄹ때라는 시간의 제시만을 만날 뿐 완전한 문장은 하나도 찾을 수가 없다. 그만큼 빈자리가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다만 숲속의 키스라는 제목에 의지 하여 그것이 숲속에서 키스할 때라는 것을 암시받을 뿐 어떠한 의미도 확실하게 해석하기 어렵다. 그냥 익명의 중얼거림의 연쇄로 이루어진 언어조직을 통하여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差延)에 편승할 뿐이다. 김종삼 시에서 보는 숨김의 건너뜀변장으로서의 건너뜀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그 정도가 지나쳐 이 시가 만들고 있는 비밀의 정체를 파악하기는 지난하다. 여기서 두 개의 목은 환유적 표현으로 키스하는 두 사람을 떠올리게 하고, ‘집과 공간은 정감 있는 사이로, ‘불꽃처럼 손이 화라락 날아오를 때는 열정적 포옹으로, ‘두 개의 목이 서로의 얼굴을 바꿔 얹을 때는 완벽한 합일 정도의 정황을 감지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도 정확하게 읽은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도록 조직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극도의 낯설게 하기에 의한 긴장의 시간이 너무 길어 숲속에서 하는 키스의 막연한 감각적 잔여만이 남게 된다.

 

분홍색 얇은 꽃 이파리 결 따라 팔랑거리는 물

암술 수술의 간절함으로 가녀린 물

비린 거울처럼 내가 비춰지는 몸속의 물

비추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물

바람에 섞여 흩어지다가 머리칼을 적시는 물

방바닥까지 내려온 구름처럼 나를 잠기게 하는 물

흐릿한 먹물로 찍어 쓴 초서처럼 내 몸 위에 씌어지는 물

그 물결로 나를 살랑살랑 흔드는 물

햇볕에 마르는 희디흰 광목에

보고 싶은 얼굴의 형상으로 번지다 마는 물

알약과 함께 삼켜지는 물

저녁나절 창문을 어루만지다 돌아가는 물

어항에 담겨 물고기의 숨이 되는 물

 

방 한가운데서 거룩하게 끓어오르는 물

향기로운 찻잎을 적시는 물

서로 마주 앉아 예를 다해 정중하게 마시는 물

이어서 내장을 닦고 방광에 모이는 물

더러운 물

썩어서 끓어오르는 물

네 살갗의 작은 구멍마다 송송 맺히는 물

짠물

 

물이 물을 때렸어. 뱀처럼 엉킨 물. 발가벗은 물. 물이 물을 박살냈어. 철썩철썩 때리는 물의 손가락. 기어가는 물. 뒹구는 물. 쇠처럼 굳은 물. 참지 못하고 마침내 쏟아지는 물. 뺨 위에 씌어지다 귓바퀴 뒤로 흘러내리는 물. 물과 물이 마주 앉아 서로를 비추다 가버렸어. 물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나날의 그림자. 축축한 이 거울이 죽으면 나도 죽게 되는 물.

 

(입속에서 하루 종일 물이 끓었다)

 

ㅡ김혜순, 마음전문

 

김혜순의 마음역시 문장성분을 제대로 갖춘 문장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김종삼의 북치는 소년에 나오는 건너뜀의 양상이 여기서는 더욱 복잡하고 극단적이어서 난해하기 이를 데 없다. ‘이라는 기표에서 끝없이 미끄러져 나가는 기의들을 좇아 환유된 이 시의 의미구조를 파악한다는 것 역시 도로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여기에서의 을 원형상징으로 읽기에는 그 의미망이 너무 복잡다단하다. 그야말로 흐릿한 먹물로 찍어 쓴 초서처럼불분명하고 얽혀 있어 해독하기 어렵다. 모두 4연으로 되어 있는 이 시에서 제12연은 행갈이를 하였으나 제3연은 행 구분이 없는 산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제4연은 괄호 속에 넣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4연은 내용의 구조를 총괄적으로 함축하는 것으로 판단되어 주목을 요한다. 여기에서 하루일생을 뜻하는 기본 개념적 은유로 읽을 수 있고, ‘끓다분노한다/원망한다/괴롭힌다정도로 읽는다면, ‘이 일생 동안 서정적 자아 또는 인간을 괴롭히는 존재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제12연에 보이는 물은 대체로 부정적인 속성과 긍정적인 속성을 함께 가지고 있지만 결국은 더러운 물이고 짠물이다. 그것은 불결하지만 고통 속에 간직하며 살아야 하는 인생 앞에 지속적으로 펼쳐지는 고난과 그에 따른 인고의 숙명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제3연은 이 들이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상호관계성에 의하여 유지됨을 형상화한 듯이 보인다. 결국 이 시의 은 인간의 숙명, 이상, 본성 등과 관련된 삶의 지속적 고뇌나 고통과 관련되리라고 추단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시의 의미망은 그렇게 단순하게 요약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복잡미묘한 양상으로 짜여 있어 구조주의적 중심이나 목적을 상정하여 읽히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김종삼이 시도했던, 그리고 필자가 시의 본질이라고 말했던 건너뜀은 이 시대 들어 극단적인 경향을 보이면서 건너뜀의 미학을 실현하고 있다.

 

5. 방법론의 외연 넓히기

 

지금까지 본고는 김종삼 시인의 탈공간의 디아스포라적 삶에서 빈자리를 발견했고, 그 빈자리를 술과 음악 그리고 시로 채웠다고 말했다. 이러한 시인의 자아는 그 빈자리에 폐기되거나 윤색되어 원점을 향한 그리움, 순수지향의식, 삶의 불안감, 숨김이나 전유 등이 혼합된 주제의식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시의 내용에 조응하는 건너뜀이라는 창작방법을 통하여 빈자리를 만들어 냈다고 주장한 셈이다. 건너뜀에 의한 빈자리는 시의 본질을 구현하는 방법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을 미적 세계로 동참하게 하여 즐기게 하는 의미 깊은 시적 장치로서 기능함을 비교적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건너뜀에 의한 빈자리는 후대 시인들의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단하고 그 대 잇기의 양상을 간략히 소개하였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반론을 예상할 수 있다.

 

첫째, ‘건너뜀에 의한 난해성이 시의 본질이라고 하였지만, 그 정도를 어디까지 이해하고 수용하여야 하느냐하는 것은 문제로 남는다.(물론 혹자는 난해할수록 좋다고 말하겠지만…….)

 

둘째, ‘빈자리를 통하여 독자를 참여하게 한다고 하였지만, 그로 인한 난해성은 독자를 참여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시를 기피하게 만드는 모순된 진리라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한국의 현대시에 보이는 건너뜀이 김종삼의 방법만을 이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은 변장으로서의 건너뜀보다 숨김의 건너뜀을 강조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그것이 합당한 것인가.

 

필자는 이러한 반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싶다. ‘건너뜀의 정도나 수용여부는 시인 개인의 체질과 선택의 문제이다. 그러나 건너뜀이 시적 기술의 본질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에 따른 독자들의 시 기피현상도 독자의 몫일뿐이다. 독자를 고려하여 시의 본질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건너뜀이 김종삼만의 것은 아니지만 그가 산 시대에 그만큼 시의 본질에 근접한 시인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또 김종삼의 시도 약한 건너뜀으로 느슨한 긴장감을 주는 시들이 적지 않음도 사실이다. ‘숨김의 건너뜀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시인들이 변장으로서의 건너뜀에 편향되어 있는 것은 재고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시 창작에 있어 어디 정답이 있겠는가. 다만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그 방법적 외연을 넓혀 나가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