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어造語의 시학 - 김종삼의 삶과 문학
권명옥(시인·전 세명대학교 교수)
<1>
시인 김종삼 (1921~1984)은 생애의 대부분을 낯선 이방의 땅 남한/서울에서 보냈다. 1947년 정월 스물 여섯 나이에 양친 및 막내 종수宗洙(4남)와 월남, 63세를 일기로 사망하기까지 40년 가까이 가난과 소외 그리고 굴욕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 갔다. (국방 경비대 군인 장남 종문宗文과 일본 거류민 종인宗仁(3남)은 월남 길에 함께하지 않았다.)
낯선 땅에서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해 뒷날 그는 이런 말들을 털어 놓는다.
― 나는 시에 대해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애착도 느끼지 않는다. 다만 창피 안 당할 정도로 써 갈길 뿐이다.
― 살아가노라면 어디서나 굴욕 따위를 맛볼 때가 있다. 그런 날이면 되건 안 되건 그적거리고 싶었다. 무엇인가 장난삼아 그적거리고 싶다.
남한/서울에서의 신산한 이방살이는 앞질러 그에게 너무나 모욕적인 두 죽음을 안겨 준다. 시인과 가족들이 당도해 처음 짐을 푼 곳이 서울의 어느 동네였는지 알 수 없으나 거기서 일이 년이 지나 종수가 죽고 말았다. 다시 이 년쯤 뒤 이번(1951년)에는 역시 월남한 둘도 없는 친구 전봉래全鳳來가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였다. (이 때 김종삼은 양친을 서울에 남겨 둔 채 혼자 대구에 피란 왔고, 전봉래는 부산으로 갔었다.)
김종삼은 낯선 이방살이 내내 이 모욕적인 두 죽음에 줄곧 들려 지냈던 듯싶다. 이 시기 전후에 그는 시작詩作에 손댔는데, 가뜩이나 과작인 시편 여기 저기 뜬금없이 이들은 실명으로 얼굴을 내밀곤 한다. 따지고 보면 그가 한평생 술과 음악(서양 고전음악)과 깊은 침묵/묵상에 칩거한 것이나, 그리고 끼인 시간대 (timebetween, 사이 시간) 인식에 사로잡혀 집요하게 탈주脫走를 꿈꾼 것이나 모두 이와 무관하지 않다면 않다고 할 수 있다.
(A) 오늘도 이곳을 지나노라면
獅子 한 마리 엉금 엉금 따라온다.
입에 넣은 손 멍청하게 물고 있다.
아무 일 없다고 더 살라고.
―「발자국」
아우는 스물 두 살 때 결핵으로 죽었다.
나는 그 때부터 술꾼이 되었다.
―「장편」
(B) 全鳳來
金宗三 한 귀퉁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눔.
브란덴브르그 협주곡 五번을 기다리고 있음.
―「시인학교」
인용시편 중 (A)의 첫 작품 마지막 행은 발표 당시에는 “그 동안 죽어서 만나지 못한 어렸던 동생 종수가 없다고”였다. 작품 속 짐승 환영 곧 ‘獅子’는 다름 아닌 시인/화자 자신의 정서적 등가물 또는 페르소나로 볼 수 있는데, 동생 ‘종수’의 부재에 망연자실해 “(입에 넣은 손 멍청하게 물고 있다.”)하고 있음을 본다.
여기 또 하나 굴욕적인 죽음 경험이 시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 164-1번지. ㄷ자(字) 구조의 저택 건물 안쪽에 정원/안마당을 앉힌 고래등 같은 조선 먹기와집이 언제부터 장남 김종문 장군의 소유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김종삼이 결혼(1956년) 전까지 양친과 함께 얹혀 살던 집이다. 양친은 이후에도 한 동안 더 얹혀 지내다 성북동 골짜기 마가리에 셋집을 얻어 따로나와 살았다. (이 셋집에서 부친은 연탄가스 사고 중독 후유증으로 작고했다.) 모친은 만년의 한 해 가까이 2남 김종삼 집(월세 방)에 기거했다. 임종이 가깝자 성북동 164-1번지로 며느리(정귀례)를 앞세우고 찾아갔으나 문전박대 당하고 근처 혜화동 대학병원으로 이동 중 택시에서 운명했다. 그 길로 포천시 소재 부인터 공동묘지로 곧장 가서 장례 절차 없이 부친 묘소 곁에 매장하였다. (양친의 묘소는 이후 망실되고 말았다. 김종삼 생전의 일이다.)
굴욕의 경험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쿤데라는 그의 산문집에 썼다. 말하게 되면 너무나 모욕적인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비록 문학적 굴절을 거칠지라도 그에게는 유일한 발화의 형식이 그나마 시였다.
시 「어머니」에 시인의 어떤 단지심(斷指心)이 읽힌다.
나는 속으로 치열하게 외친다.
부인터 공동 묘지를 향하여
어머니 나는 아직 살아 있다고
세상에 남길 만한
몇 줄의 글이라도 쓰고 죽는다고
그러나
아직 못 썼다고
―「어머니」
시인은 미망인(정귀례)과 두 딸 혜경(53세)과 혜원(50세)을 남겨 둔 채 의정부시 외각 울대리의 한 성당 묘역에서 영면하고 있다. 그가 일찌기 양친 묘소를 모셨던 포천시 부인터 공동묘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그리고 자신의 시비가 서 있는 소흘읍 고모리 호수공원에서도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 88서울올림픽이 열린 시기 어름에 일본에 거류하는 3남 종인宗仁이 뒤늦게 형의 무덤을 찾아 더욱 긴 격조(隔阻)의 예감인 듯이 통곡하고 돌아갔다 한다.
<2>
들뢰즈와 가타리는 소수 집단 문학의 대표적인 특성으로 삶과 문학의 일체론, 언어의 탈영토화 등을 적시한다. 지배 집단 문학에 만연한 언어적 유희나 레토릭, 다작(多作)과 다변, 유머 등은 그래서 김종삼 문학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그의 시에서 받게 되는 심각한 어휘 빈곤과 한량없는 적막 또는 묵상적 느낌은 이러한 연유에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새로운 어휘의 창안 곧 조어(造語)는 김종삼 시학의 요체가 된다.
시인이 시작에 손 대고 처음 제작했다는 작품 「돌각담」은 진술 내용이 대동소이한 두 편이 존재하는데, 다음은 개작된 나중 작품이다. 진술 내용을 거의 그대로 둔 채 형태만 환골탈태했다. 띄어쓰기, 문장부호, 단락의 구분(행 및 연) 등의 문법적 요소 일체를 소거한 채 내리닫이로 잇대어 표기하고 있는 이 작품은 어떤 형상을 모사模寫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형상시/그림시이다.
굳이 내리닫이 표기 그대로 예시하는 것은 발표 당시의 작가적 태도를 존중해서이다. 형상시는 먼저 시각으로 읽힌다.
어떤 언술 형태에서 개작을 통해 띄어쓰기 등 문법적 요소 일체가 제거되었다면 진술 내용에 대한 무화 내지 약화의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점을 개작 과정의 첨삭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음부터
廣漠한 地帶이다
이는 먼저 쓴 작품의 모두 연(冒頭聯)인데, 여기서 첫 행이 삭제되고 남은 ‘廣漠한 地帶이다’가 문맥상 전혀 무관한 다음 연(“기울기 시작했다”로 시작되는 연인데 곧 돌각담이 기울기 시작했다는 뜻이다)과 뒤섞이게 함으로써 독해에 어려움(혼란)을 주고 있다.
“/다음부터/”는 시 「돌각담」의 진술이 어떤 구조적인 틀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알게 하는 거의 유일한 지표이다. 그러니까 인용한 예시대로 이 행을 두게 될 경우 “다음부터 광야(광막한 지대)이다” 또는 “이제 곧 광야가 시작된다”로 읽혀져 전체적인 전언의 윤곽을 파악하기가 보다 쉬워진다.
다음, 나중 작품에 삽입된 첨가의 경우를 살펴보자(첨가는 “잠시꺼밋했다”와 말미의 “포겨놓이던세번째가비었다” 두 곳에 이루어졌다). 작품 「돌각담」은 전체적으로 어떤 쫓기는 시간 그 동사적 흐름 위에 설정된 시간적 구조인데, 여기에 “잠시 꺼밋했다”를 삽입함으로써 한층 더 그 심도를 보태고 있다. 시간부사어 ‘잠시’가 “꺼밋했다”의 과거시제와 결합해 어떤 시간적인 경과 또는 정황적 흐름을 보탠다.
사실 숨 쉴 겨를 없이 연거푸 쏟아내는 동사형 진술들, 곧 “기울기시작했다―바로꽂혔다―자그마했다―놓였다” 또는 “돌담이무너졌다―다시쌓았다―쌓았다―쌓았다” 등은 화자와 일행의 돌각담 쌓기 작업이 기실 얼마나 촉박한 시간의 흐름 위에서 이루어졌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한 편, 작품 「돌각담」에 나오는 일련의 부사들도 반드시 시간부사어로 읽혀야 한다는 점 또한 유념할 일이다.
다음부터→이제 곧, 이제부터
바로(꽂혔다)→이내(꽂혔다), 곧장(꽂혔다)
그러니까 “다음부터/광막한 지대이다”는 “이제 곧 광야가 시작된다”의 의미(이는 이후의 돌각담 쌓기가 서둘러 광야로 출행하기 직전 작업이었음을 시사한다.)이고, “바로 꽂혔다”의 진술도 “똑바로(正) 꽂혔다”가 아니라 “곧장 꽂혔다” 또는 “이내/사정 없이 꽂혔다”의 의미이다. 이와 같이 시간부사어로 읽었을 때 비로소 후속되는 반복적인 진술들, 곧 “무너졌다―다시쌓았다―쌓았다―쌓았다”와 호응을 이루게 되어 전체적으로 어떤 쫓기는 시간의 황망함이라는 진술적 틀을 복원할 수 있게 된다.
평북지방 방언에서 돌각담은 돌무더기, 돌각무덤, 돌무덤 등으로 이칭되는 이름의 하나이다. 시 「돌각담」은 전란 중 길 위에서 만난 한 죽음에 대하여 화자와 일행이 시간에 쫓기는 황망함 중에도 돌로 무더기를 쌓아 장사 의례를 치뤘던 일을 회상한 노래로 볼 수 있다. 이 땅의 산야 외진 곳에 산재하는 돌각담/돌무더기는 대개의 경우 아총(兒塚)인 죽은 아이의 무덤이었지만 전란 중 새로 생겨난 경우 폭격이나 괴질 등으로 연고 없는 땅에서 죽음을 맞은 사람들의 임시 무덤이기 십상이다. “십자형(十字型)의칼이꽂혔다”는 죽음 의례 중의 푸닥거리로, “흰옷포기가포겨놓였다”는 초혼 행위에 사용된 망자의 흰 옷가지로 보아 무방하지 않을까.
따라서 형상시 「돌각담」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이해할 수 있다.
화자 일행은 ‘시간에 쫓기는 가운데 돌각담을 쌓았다. 돌각담이 곧 무너질 것 같았으나 시간에 쫓기어 자리를 뜨게 되었다’는 것이 진술의 대강이다. 그런데 시간에 쫓긴 돌담 쌓기가 기실 길에서 만난 한 죽음의 장사의식임이 시사되고, 그것이 어떤 독신(瀆神) 행위에 가까운 무례(無禮)였음이 암시된다. 그래서 예의 돌각담 형상을 모사해 형상시(形象詩)를 제작함으로써 사자(死者)에 대한 고해성사를 대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적 전언이 언어보다 형상에 더 의존하는 시 「돌각담」은 조어 ‘凍昏’으로 초점화된다. 쌓은 돌각담이 이제라도 무너져내릴 듯 위태로운 가운데 시간에 쫓긴 나머지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으며 “(포겨놓이던세번째가비었다”가 시의 말미에 자리하는 이유이다), 이때 마지막으로 둘러본 화자 일행의 시야에 부조(浮彫)처럼 꽂힌 풍경(인상) 그것이 동절기 핏빛으로 얼어붙은 염혼의 어둠 곧 ‘凍昏’이다.
일찍이 미셸 라공은 추상화를 말하는 자리에서 장 포트리에의 일련의 작품들을 환각 예술이라 불렀다. 앙포르멜 회화의 길을 연 포트리에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파리 점령군 나치 독일군에 처형된 인질 곧 처형자들의 영상에 사로잡힌 나머지 사람의 머리 크기의 연작들을 제작해 <인질(otage)>전(1945년)을 열었다. 이 그림은 얼핏 보면 두꺼운 파트 반죽의 진득한 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자세히 관찰할 때 흙투성이가 되어 짓밟힌 인질들의 머리임을 시사했다. 이 인질 연작 그림들에 대해 앙드레 말로는 고통의 상형문자라 불렀다.
김종삼이 낯선 땅 이방을 황야로 인식하고 노래한 「걷자」나 「엄마」, 「묵화」, 「물桶」등의 황야시편을, 그리고 의미가 삭탈된 한낱 뜻 없는 글자들을 가지고 마치 돌멩이로 무더기를 쌓듯 쌓아올린 무덤 형상을 우리는 환각 예술 또는 굴욕의 상형문자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시 「민간인(民間人)」은 「돌각담」과 시적 진술에 있어 매우 흡사한 가족관계인데 두 작품 모두 화자 일행이 어느 죽음에 입힌 독신적(瀆神的) 행위에 대한 자괴적 회상이고 노래이다. 만일 여건이 허락되었더라면 김종삼 시인의 또 다른 형태시/그림시 「民間人」을 우리는 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3>
김종삼은 죽은 친구 전봉래(全鳳來)를 회상한 시 여러 편을 남겼다(시 외에 「피란 때 연도 전봉래」등 산문 두 편도 있다). 절창 「G·마이나」와 「시인학교」, 「전봉래」, 「장편·3」등이 있고, 이밖에 「베르카·마스크」, 「베루가마스크」, 「둔주곡」등도 전봉래의 회상으로 보인다. 이들 시편들에는 예외 없이 음악(서양고전음악)이 전면화된다.
한 때에는
낡은 필림 字幕이 지났다.
아직 散策에서 돌아와 있지 않다는
그 자리 파루티타 室內
마른 행주 廚房의 整然
―「전봉래」
全鳳來
金宗三 한 귀퉁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눔. 브란덴브르그 협주곡 五번을 기다리고 있음.
校舍,
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에 있음.
―「시인학교」
토방 한곁에 말리다 남은
반디 그을 끝에 밥알 같기도 한
알맹이가 붙었다.
밖으로는
당나귀의 귀 같기도 한
잎사귀가 따 우에 많이들
대이어 있기도 하였다.
―「베르카·마스크」
전봉래(1922-51)는 평남 안주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에 유학(아카데미프랑세)한 젊은 불문학도(프랑스어 번역시집 『창조와 혼돈』 상재)이자 이미 10여편 시를 발표하기도 한 시인이었다. 어려서 철봉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친 후 평생 불구에 가까운 기형(곱추와 유사했다 함)으로 살았다.
1951년 피란지 부산의 한 다방에서 수면제를 다량 복용하고 음독 자살했는데, 바흐의 음악을 청해 들으며 죽어갔다.
환도 후 광화문 일대 다방가에 ‘낮도깨비’(고향 선배 평론가 임긍재가 붙여 준 별명) 김종삼이 바흐나 세자르 프랑크, 드비시 같은 음악가의 LP판 음반을 옆구리에 낀 채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다녔다. 그는 당시 김관식 시인과 더불어 문단의 2대 기인으로 통했는데, 그의 기행은 어쩌면 낯선 땅에서 맞은 모욕적인 두 죽음(아우 종수와 단짝 전봉래의 죽음)에 대한 일종의 히스테리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김종삼의 교유관계는 빈약하기 짝이 없어 중증 결벽증 환자다운 것이었다. 전봉래를 잃은 뒤 마음 트고 지낸 친구라야 고작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갓 나온 김수영 정도였다. 이밖에 3인 연대시집을 함께 내기도 한 전봉래의 아우 전봉건, 임긍재의 매부 김광림이 있었으나 모두 동생뻘 따라지들(월남민)이었다. 60년대부터 명실상부 한국 시단을 좌지우지 호령한 3김 중 김춘수는 김종삼 김수영과는 일면식이 없었다고 한다. 어쩌다 대구에서 상경한 김춘수가 큰 맘 먹고 이들(김종삼 김수영) 집으로 전화를 넣으면 다짜고짜 “너 누구야” 고함을 질러대는 바람에 그때마다 놀라 수화기를 내려놓았다고 전해진다.
물
닿은 곳
神恙의
구름밑
그늘이 앉고
杳然한
옛
G·마이나
―「G·마이나 ― 全鳳來兄에게」
시 「G·마이나」에서 우리는 이른바 인간 존재에 대한 어떤 ‘제어된 슬픔’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극도로 억제된 감정/언어와 천애(天涯) 밖에 설정된 듯한 먼 대상(죽은 친구), 그리고 조어 ‘신양(神恙)’으로 초점화되는 우수 등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어 ‘神恙’은 영혼성(천상)과 육신성(지상)이라는 상호 모순적인 두 요소의 위화적 조합이다. 화자는 지금 ‘물 닿는 곳’ 거기 당도하고서도 어제의 육신의 근심(꼽추몸)을 끊어내지 못하는 친구의 슬픔(‘그늘이 앉고’)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이 작품의 거리는 오히려 수직의 공간적 거리인데 천양(天壤) 간 텅 빈 공간 부피가 새삼 친구의 부재를 확인시킨다. 낮은 음정 단조의 옛 가락 G·마이나가 천양간 별리(別離)를 잇고 있다.
<4>
낯선 땅에 혼자 떨어져 사는 사람 이주자에게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그리운 얼굴이나 풍경은 마음에 뜬 별과 같다. 기억/추억과 별 사이의 동질성 때문일까, 밤 하늘을 수놓는 수 많은 별들은 일반적으로 기억 또는 추억의 대상으로 상징된다. ‘별’과 기억 또는 ‘그리움의 대상’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동질성이 성립된다.
1) 둘 모두 현전 부재이고, 거리상 멀리 떨어져 있다.
2) 둘 모두 눈을 감든가 또는 어둠 속에서 한층 선명해진다.
3) 둘 모두와 ‘나’ 사이는 상호적이 아니고 일방적이다 (‘나’(내)가 언제든지 떠올리고 바라기 할 수 있는 짝사랑과 같다).
전래 동요가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하고 노래하듯이 그것은 1대 1의 대응관계를 원칙으로 한다. 이때 가령 윤동주의 「별 헤는 밤」 같은 작품들이 우리 시에서 ‘별’이 기억 또는 그리움의 대상을 표상하고 상징하는 하나의 문학적 관습으로 굳어지게 한 계기를 만든 듯싶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중략)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별’과 ‘기억의 대상’이 1대 1의 개별적 대응관계를 보이고 있는 것은 기억의 대상이 아직 그만큼 생생하고 개별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가져온 보자기 속엔 신문지에 싼 도시락과 삶은
고구마 몇 개와 사과 몇 개가 들어 있었습니다.
먹을 것을 옮겨 놓는 어머니의 손은 남들과 같이 즐거워
약간 떨리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품팔이하던
밭이랑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고구마 이삭 몇 개를 주워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모습은 잠시나마 하나님보다도 숭고하게 이 땅
위에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오학년일반」
이런 묘사/시는 말하자면 천체 중에 뜬 별 중 그 중 또렷하고 밝은 큰 별이라 할만하다. “먹을 것을 옮겨놓는 어머니의 손은 남들과 같이 즐거워 약간 떨리고 있습니다”와 같이 미세한 감정의 변화까지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현전 부재 장면을 이처럼 몰입적으로 재현해내는 일은 어떤 무아지경이나 황홀경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기억의 시간 그 망아적 몰입을 엑스타시extase, 그리스어 어원에 따르자면 ‘자기의 바깥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곧 현재적 시간에의 절대적 동화를 의미한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두 가지의 기억, 곧 살아있는 기억과 소외된 기억으로 나눌 수 있다. 진정한 기억은 사진첩이나 종이에 위탁된(메모) 기억 따위와 달리 기억의 대상이 온갖 일상들과 연결되어 그때그때 살아나게 하는 기억이어야 한다. 그러나 기억은 아무리 보존하고 싶어도 그것은 부재(不在)에 대한 확인의식일 뿐이다. 기억은 망각의 부정이 아니라 망각의 한 형식이다.
어느덧
서른 여덟 해
그녀가 살아 있다면
나처럼 너무 늙었겠지
죽었다면 어떤 곳에 묻히었을까
―「北녘」
서른여덟 해 전의 애인은 이름마저 망각되어 익명으로 처리된다. 기억이 지탱할 수 있는 시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쿤데라는 조셉 콘래드, 곰브로비치, 나보코프 등 이주자들의 생애를 더듬으며 그것(이주자들의 생애)은 곧 산술적 물음이라고 적었다. 그러니까 이 시의 서른여덟 해는 김종삼이 낯선 땅 남한/서울에 당도해 한 해 한 해 손가락을 꼽으며 센 그의 살아 낸 햇수이다. 그리고 그 서른 여덟 해의 하루하루는 또 날짜들을 세면서 살아냈던 나날들이 아닐 수 없다. (「生日」, 「오동나무가 많은 부락입니다」, 「연인」, 「背音」등에서도 시인은 날짜를 세었다.)
김종삼 시인에게 어머니와 아우 종수는 말하자면 천체 중 가장 또렷하고 밝은 별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속절없이 그 선명성을 잃어간다.
자세히 보았다
15년 전에 죽은 반가운 동생이다
더 자라고 둬 두자
시 「虛空」의 일부인데, 눈에 담고 살았던 ‘살아있는 기억’ 아우의 얼굴마저 이제 자세히 보지 않고는 알아볼 수 없다. 김종삼 시인에게 어머니와 어린 동생 종수는 어디까지나 유년기 공간 속의 그들이다(그러니까 이들 시편들은 남한/서울 한 집에서 함께 일상을 살던 어머니와 종수 곁에서 쓰여졌다).
잔잔한 聖河의 흐름은
비나 눈 내리는 밤이면
더 환하다
―「聖河」전문
조어 ‘聖河’의 표면적인 뜻은 ‘성스러운 강’ 또는 ‘하늘에 흐르는 강물’ 정도가 아닐까. 조어 ‘聖河’에서 먼저 연상되는 것은 ‘은하(銀河)’―온 하늘을 두른 띠 모양의 엷은 빛의 성운(星雲)―이다. ‘聖河’가 ‘은하(수)’와 연관 관계일 때, ‘聖河’는 동음자(同音字)를 고리로 ‘성하(星河)’와 유음법적인 연결도 가능했을 성싶다.
시 「聖河」의 전언은 “聖河의 흐름은 비나 눈 내리는 밤에 더 환하다”인데, 여기서 시적 표현을 모두 사상하고 남은 진술인즉 새로 창안해 낸 조어 ‘聖河’에 대한 어떤 개념적 정의뿐이 된다.
반드시 조어인 경우가 아니어도 그의 시가 어떤 새로운 개념에 대한 정의를 진술하고 있음은 흔하게 발견된다. 그가 ‘꽃과 이슬을 노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예』에 발표/등단이 거절된 사건은 매우 상징적이다. 이는 일찍부터 그의 시가 우리 안에서 우리와 다른 이질성의 정서를 주로 노래하였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시 「고향」, 「나의본적」, 「앙포르멜」등은 새로 창안한 그의 조어 또는 조어적 상상력에 대한 개념적 정의이고 노래들이다.
나의 本籍은 늦가을 햇볕 쪼이는 마른 잎이다 밟으면
깨어지는 소리가 난다
(중략)
나의 本籍은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
겨울이 온 敎會堂 한 모퉁이다
―「나의本籍」
그러니까 시 「聖河」는 별들―그리움의 대상들―이 개별성을 잃고서 그 윤곽이 무너지고 이목구비마저 지워진 흐릿한 모습으로 한 데 무리지어 뒤엉킨 채 소실점을 향하여 이동하는 흐름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는 노래이다. 그러니까 별 바라기이다. 일견 그의 시적 주제는 삶이고 인생이되 정지된 삶이고 정지된 인생이다. 죽음 문턱에서처럼 회상된 인생인 것이다. 그것은 살아가야 할 어떤 것이 아닌 이미 살아버린 것에 대한 탐구가 된다.
「聖河」는 ‘聖’의 천상성(天上性)과 함께 ‘비나 눈 내리는 밤이면/ 더 환하다’고 진술되고 있어 이것이 비지상적 비현실적 ‘강’임을 암시하고 있다. (지상(地上)의 강이나 하천은 비나 눈 내리는 밤이면 눈에 띄지 않는다.) 날씨―특히 비나 눈 내리는 궂은 날씨―나 계절, 음식/맛 등은 인간의 기억/추억을 자극하는 가장 원초적인 요인들이다. 거기(기억)에 날짜와 같은 인공적 요소는 포함되지 않는다.
조어 ‘성하聖河’―‘동혼凍昏’이나 ‘신양神恙’을 포함하여―와 우리의 불가해가 마주치는 접점 거기에 김종삼 시의 경계가 놓인다고 말할 수 있다.
<5>
김종삼 시인에게 남한/서울은 큰 틀로 하나의 일그러진 상 왜상(歪像anamorphosis)으로 존재한다. 작품 「걷자」는 시인의 일상적 삶의 공간인 서울의 도심을 노래한 것이다.(시인은 대구 피란 시절을 제외하고는 서울에서 벗어나 보지 못했다.)
방대한
공해 속을 걷자
술 없는
황야를 다시 걷자
―「걷자」
여기서 ‘황야’는 전경화(foregrounding)됨으로써 크게 클로즈업되어 눈에 들어온다. ‘방대한’보다 상대적으로 긴 휴지 곧pause가 ‘/술 없는/’ 다음의 행말에 놓이기 때문이지만, 서울 도심이 ‘황야’로 묘사되는 것은 일종의 왜상이다. 엄청 크게 소리 내어 읽어야 하는 ‘황야’ 그 이목구비 없는 대형의 민둥 얼굴 속으로 흡입되어 화자는 오늘도 하릴없이 걷고 걷고 또 걷는다. 엘 그레코의 그림 <수태고지>에서 천사가 성모보다 훨씬 크게 그려진 불비례(不比例)와도 유사한 경우이다.
민둥 얼굴 그 개산적(槪算的) 이미저리는 김종삼 시의 속성이다. 그의 시에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시간이나 장소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작품 공간에는 사자나 소 등 짐승의 환영 같은 현실성 없는 이미지들도 난무한다. 가령 시 「墨畵」는 은유의 노래이고 그 풍경이다. ‘소’로 은유된 하루는 발등이 붓도록 곤비하고, 그 하루 하루가 ‘적막’으로 이어지는 황야(낯선 땅 서울)와 황야 사람들을 노래한 은유적 풍경일 뿐이다. 그가 망아(忘我)의 경지에 들어 묘사하는 어머니도 그의 유아기 공간 속 젊은 날의 어머니일 뿐이다.
일상이 간난과 굴욕, 신산에 차 있는 사람들은 그곳으로부터 멀리 달아나 다음 장소에서 살고자 하는 꿈, 탈주의 꿈을 꾸게 된다. 그래서 먼 이국의 도시나 전원, 섬이나 별(별은 천체에 떠 있는 섬들이다) 등은 역사적으로 인류가 꿈꾼 오래된 탈주 모델들이다. 이승에서 저세상으로의 이동도 탈주이며, 종교는 큰 규모의 탈주 모델이다.
(A) 다시 끝없는 荒野가 되었을 때
하늘과 땅 사이에
밝은 화살이 박힐 때
나는 坐客이 되었다
신발만은 잘 간수해야겠다
큰 비가 내릴 것 같다.
―「鬪病記」
(B)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아닌 人間을 찾아다니며 물 몇 桶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물桶」
(A)에는 큰 비를 대비해 신발을 간수하려는 좌객/앉은 방이(화자)가 보일 뿐 세상에 아무도 없다. 큰 비는 구약시대 노아의 홍수가 그랬듯이 새 세상의 도래에 앞서 나타나는 예후이다. 신화는 깨끗한 새 세상에 앞서 큰 비를 준비한다.
(B)는 묵시록적인 종말의 개념을 구체화했다. 예시 부분은 이 시 전 4연 중 제 2연 및 3연으로 최후의 심판에서 주고받은 심문과 답변의 요약이다. 이와 같은 개산적 이미지는 역사적 시간대 전반을 백안시하는 자의 태도이다. 다시 말해 묵시록적인 종말을 위해 역사를 포기한 자의 심리인 것이다. 낯선 이방에 당도해 사글세방을 전전하면서도 일면 술과 음악, 묵상에 빠져 살다 간 그의 삶이 이미 그러했다.
작품 「그날이 오며는」은 일찍이 종말을 위해 역사를 폐기했던 저 초기 기독교 신앙인들이 종말의 무효화(disconfirmation)를 경험했을 때처럼 시인이 절망에 떨어져 노래한 더없이 슬픈 시이다. 탈주(脫走)의 오랜 꿈 ‘그날’이 죽음으로 수정되고 있다.
머지 않아 나는 죽을거야
산에서건
고원지대에서건
어디메에서건
모짜르트의 플루트 가락이 되어
죽을거야
나는 이 세상엔 맞지 아니하므로
병들어 있으므로
머지 않아 죽을거야
끝없는 광야가 되어
뭉게 구름이 되어
양떼를 몰고 가는 소년이 되어서
죽을거야
―「그날이 오며는」 전문
개인의 죽음으로 세상의 종말을 대신하고 있는 이것은 기쁨인 것인가, 아니면 슬픔인가. 어느 신학자의 말마따나 각 개인의 죽음이 정녕 반복되는 재림인 것인가. 이 시가 한량없이 평화로운 토운을 띤다는 사실이 또한 우리의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 권명옥
시인. 전 세명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시집으로『남향』. 편저『김종삼 전집』이 있음.
■ 출전 : [시와소금] 2012. 봄호
'김종삼' 카테고리의 다른 글
民間人 (0) | 2015.12.10 |
---|---|
김종삼 시의 건너뜀과 빈자리 - 서범석 (0) | 2015.12.10 |
그리운 안니 . 로 . 리 (0) | 2015.12.09 |
그리운 안니 로리 - 어느 노시인에 대한 회상 (0) | 2015.12.09 |
김종삼 시의 ‘서정적 자아’와 분단의식 - 서범석 (0) | 2015.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