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삼

그리운 안니 로리 - 어느 노시인에 대한 회상

공산(空山) 2015. 12. 9. 16:45

 

그리운 안니 로리

-어느 노시인에 대한 회상  

( '저녁바람'님의 블로그에서)

 

1970년대 후반이면 내 나이 역시 20대 후반으로 출판사 편집실을 전전하며 밥벌이하는 자취생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다.  

그 무렵 내가 편집장으로 일하던 모 출판사에 초로의 한 남자가 매일같이 드나들고 있었다. 주름 조글한 잠바차림에다 머리에는 늘 베레모가 얹혀져 있었는데, 행색이 마치 노숙자처럼 남루했다. 그는 시인이었다. 그리고 그 출판사 사장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 인연으로 시인의 시집을 그 출판사에서 내게 되었는데, 내가 편집하고 교정을 보아 얼마 전에 시집이 출간되었던 것이다.

 

시인의 출근은 그 후로 죽 계속되었다. 사연인즉슨, 출판사에서 인세를 지급하지 못해 책으로 대신 주게 되었고, 시인이 그 책을 매일 여남은 권씩 배낭에다 담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시집을 배낭 안에 챙기기 전에 꼭 거치는 사전작업이 하나 있었다. 내가 그 시집을 교정 보면서 딱 한 군데 오자를 냈는데, 그것을 일일이 고치는 작업이었다. 오자는 ‘날빛’을 ‘달빛’으로 잘못 안 탓이었다.

 

시인은 커터 날로 ‘달’의 디귿 한 획을 일일이 긁어 없애 ‘날’로 만드는 것이었다. 친구인 사장이 달빛이 더 좋지 않으냐고 훈수해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 작업을 계속하곤 했다. 나는 민망한 눈빛으로 지켜볼 따름이었고.

 

그런데 시인은 왜 그렇게 매일 시집을 배낭에다 넣어갖고 가는 것일까? 사정을 알아보니, 무슨 까닭인지 오래 전에 집을 나와서 여관방을 전전하는 시인이 그 시집을 지인들에게 팔아 생활비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턱대고 지인들의 직장엘 찾아다니며 시집에다 서명을 해주고는 책값을 받아낸다고 한다. 그 돈은 대부분 소주를 사는 데 소진된다는 얘기도 들었다.

 

시인의 기행은 이미 문단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명동이고 무교동이고 간에 길을 가다가 아는 문인을 만나면 대뜸 세금 내놓으라고 손을 내민다고 한다. 그러면 으레 그런 양 상대는 주머니를 뒤져 되는 대로 돈을 건네고. 물론 그 돈 역시 소주에 녹게 마련이라 시인은 대부분 반취 상태로 세상을 건너는 것이었다. 그래도 시인의 계산법은 반듯하여 뒷날 피징세자를 찾아가 시 한 편씩을 건넨다고 한다. 우아한 부채상환 방식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시인의 문명은 드높았다. 어떤 평론가는 소월, 미당과 함께 한국의 10대 시인에 넣기도 했다. 분단의 고통 또는 뿌리 내리지 못한 현대인의 삶을 정제된 언어로 노래했던 시인의 작품 하나를 먼저 음미해보도록 하자.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嬰兒를 삼킨 곳

스물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민간인’ 전문)

 

 

 

시인은 또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로라하는 클래식 전문가로서 한때 모 방송국에서 클래식 담당 DJ 일을 했었다고 한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해박함으로 방송 DJ를 하면서 지냈던 때가 시인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던 듯하다. 그가 특히 좋아했던 음악은 바흐였다고 한다.

 

출판사를 찾던 시인의 발걸음이 어느덧 뜸해지고, 한동안 시인의 소식은 바람결로도 전해져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몇 년이 지난 후 어느 겨울 초입, 문득 시인의 부고를 듣게 되었다. 그렇다. 그렇게 오래 살 시인은 아니었다.

 

나는 그제서야 그의 귀한 시에 오자를 내고도 제대로 사과하지 못한 내 주변머리가 한심스러웠고, 그 추웠던 시절, 해장국 한 그릇, 소주 한 잔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 나의 소견머리가 밉살스러웠다. 이 글은 그러한 내 소행에 대한 때늦은 반성이고 애도이다.

 

“나 지은 죄 많아/ 죽어서도/ 영혼이 없으리”라는 가슴 저린 시행을 남기기도 한 그 시인의 이름은 김종삼이다. 그리고 내가 편집 교정한 시집은 ‘시인학교’였다. 이승에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했던 김종삼 시인이 저승에서는 부디 잘 착근하시기를 기원하며, 그의 시 한 편 감상하는 걸로 이 애도의 글을 접기로 하자.

 

 

그리운 안니 . 로 . 리 

                        

  

나는 그동안 배꼽에

솔방울도 돋아

보았고

 

머리위로는 몹쓸 버섯도 돋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는

'맥웰'이라는

老醫의 음성이

 

자꾸만

넓은 푸름을 지나

머언 언덕가에 떠오르곤 하였습니다

 

오늘은

이만치하면 좋으리마치

리봉을 단 아이들이 놀고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는

얕은

파아란

페인트 울타리가 보입니다

 

그런데

한 아이는

처마 밑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고

짜증을 내고 있는데

 

그 아이는

얼마 못가서 죽을 아이라고

 

푸름을 지나 언덕가에

떠오르던

음성이 이야기ㄹ 하였습니다

 

그리운

안니 . 로 . 리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출처 : '저녁바람'님의 블로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