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삼

김종삼 시의 ‘서정적 자아’와 분단의식 - 서범석

공산(空山) 2015. 12. 9. 14:35

김종삼 시의 서정적 자아와 분단의식

서범석

 

1. 분단의 자력선(磁力線)

 

한국의 근현대문학을 시기 가름할 때, 민족문학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와 분단시대의 문학이다. 물론 태동기인 개화기와 잠깐의 광복기가 있기는 하지만, 개화기는 일제강점 그리고 광복기는 분단시대와 직간접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근현대문학은 일제강점기와 민족분단시대의 두 시기로 가름할 수 있는 것이다. 민족주의 입장에서 보면 일제강점기는 독립을 향한 저항의식이, 민족분단시대에는 통일지향의식이 가장 중요한 가치를 차지하게 됨은 필연적이다. 이러한 시대의식은 그 시대 모든 문학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혹시 그것과 관련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의 간접적 영향 아래 피어난 꽃이며 열매가 작품인 것이다.

 

김종삼 시인의 작품 역시 그러하다. 그것은 분단시대 문학이라는 자장 아래서 그 의식의 쇳가루들이 그려낸 자력선(磁力線)의 형상화인 것이다. 김종삼은 특히 북한 출신으로 월남하여 전쟁을 겪고 그 상처 안에서 신음하다 간 사람이기 때문에 분단의식이야말로 김종삼 시의 원형질인 것이다. 김종삼은 그의 산문 시인의 영역에서 나는 살아가다가 불쾌해지거나 노여움을 느낄 때 바로 시를 쓰고 싶어진다.”고 시를 쓰는 모티브에 대해 말했다. 여기서의 불쾌노여움이란 시의 동인(動因)이므로 그 내용 또한 이 자장 안에 속할 것으로 추단할 수 있다. 즉 그것들의 표출이거나 함의일 것이다. 김종삼은 이 글에서 스스로 처녀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돌각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걷고 걷던 7월 초순경, 지칠 대로 지친 끝에 나는 어떤 밭이랑에 쓰러지고 말았다. 살고 싶지가 않았다. 얼마나 지났던 것일까, 다시 깨어났을 때는 주위가 캄캄한 심야(深夜)였다. 그러면서 생각한 것이 <돌각담>이었다.

 

여기서 피란을 가게 된 것은 6.25 전쟁 때문이며, 그의 형이 육군 중령이었기 때문에 잡히면 반동가족으로 참살한다는 소문 때문이며, 살고 싶지가 않았다는 것은 양친이 서울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단과 그에 따른 전쟁의 고통, 불쾌노여움이 김종삼의 처녀작을 잉태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처녀작부터 민족분단의 상황이나 거기에서 생성된 분단의식의 자장 속에서 형상화되었던 것이다.

 

분단문학이란 남북 분단의 원인에 대한 탐구, 분단으로 인한 상처와 아픔,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의지 등 분단과 관련된 내용을 다룬 문학을 총칭하는 것이 사전적 개념이다. “8·15광복 뒤 분단시기에 우리 민족이 겪는 모든 갈등과 고뇌를 극복하고자 올바른 민족의식에 입각해서 창조하는 일체의 문학행위로 임헌영은 분단문학을 규정한 바 있다. 그러니까 8·15광복 이후 현재까지는 물론 더 나아가 민족통일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가 문학사적으로 볼 때 민족분단문학 시기인 것이다. 전후시인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김종삼은 그의 문학적 생애가 모두 분단과 관련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김종삼 시를 분단문학 또는 전쟁문학으로 고찰한 연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다른 주제를 논하는 가운데 그것의 한 부분으로 다룬 것으로 총체적 연구가 진행되지는 못하였다. 이에 본고는 김종삼 시의 분단문학으로의 성격에 관하여 서정적 자아를 중심으로 총체적으로 검토하기로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에서 말하고 있는 화자를 서정적 자아(Das lyrische Ich)’라고 부른다. 또 시인이 극적 인물로 탈을 쓰고 등장하여 말을 건넨다는 뜻으로 퍼소나(persona)라고도 한다. 그런데 서정적 자아에서 서정(抒情)’은 장르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지만, 자의(字義)로 볼 때 그것은 자신의 정서를 꺼내어 펼침의 뜻이다. 그럼 정서를 표출하는 자아는 누구인가. 물론 시의 화자이지만 그 화자의 정서의 원소유자는 시인 자신과 무관할 수 없다. 따라서 시에서의 서정적 자아란 시인의 정서적 자아의 한 모습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서정적 자아의 말하기는 시인 자신의 감정 표출이거나 그 감정이 이끌거나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에서의 서정적 자아의 목소리나 태도는 시의식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이렇게 볼 때 시의 서정적 자아에 관한 고찰은 시인의 정서나 의식을 검출할 수 있는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디아스포라로서의 서정적 자아

 

지상의 현세적 삶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불안과 고통의 삶을 갈등 속에 이어간 김종삼 시의 서정적 자아에 관하여 혹자들은 보헤미안(Bohemian)’이라고 언급하여 왔다. 보헤미안은 사회 관습에 거리낌 없이 방랑하면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거나 그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말의 연원은 프랑스어 보엠(Bohme)에서 찾을 수 있는데,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에 유랑민족인 집시가 많이 살고 있었으므로, 15세기경 프랑스인들이 집시(Gypsy)를 보헤미안이라고 부른 데 있다. 그러나 보헤미안이라는 말 속에는 그들의 문제적 삶과 관련하여 부랑자·사기꾼·도둑놈이란 뜻도 함께 녹아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김종삼의 실제적 삶이나 시 속에 나타나는 서정적 자아의 모습이 사회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하고 방랑적인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보헤미안이 거느리는 부정적 이미지와는 결부될 수 없다.

 

디아스포라(diaspora)흩어짐’, ‘이산(離散)’의 뜻으로, 팔레스타인 이외의 지역에 살면서 유대적 종교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이르는 말이다. 보헤미안은 정착하여 살지 못하고 방랑하지만, 디아스포라는 비록 조국(고향)을 떠났지만 다른 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떠나온 곳의 삶의 방식과 그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살아간다. 보헤미안은 삶의 목표나 미래가 불확실한 방랑의 삶이지만, 디아스포라는 목표가 뚜렷하고 떠나온 이상향에 대한 분명한 미래를 소망하는 수구초심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둘은 너무나 다른 것이다. 따라서 본고는 김종삼의 생애와 관련지으면서 그의 서정적 자아를 디아스포라의 의식적 특성을 가진 인물로 보고자 한다. 한민족의 디아스포라는 일제강점기 식민치하를 겪으면서 집중적으로 발생하여 2000만 민족의 1/3 가량이 한반도를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6.25 전쟁으로 발생한 많은 수의 남북한 이동인들도 디아스포라이다. 또한 최근 북한 동포들의 탈북 러시는 새로운 양상의 디아스포라를 양산하고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김종삼도 고향에서 일탈하여 평생 뿌리 뽑힌 삶을 영위하였던 것이고, 그의 정신은 항상 떠나온 출발점에 대한 그리움 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디아스포라인 것이고, 그러한 정신이 창조한 시의 서정적 자아 역시 디아스포라이다. 한편 이와 유사한 용어로 파리아(Pariah)’를 떠올릴 수도 있는데, 이는 인도의 카스트 아래의 카스트 계층으로서 불가촉천민으로 부랑자또는 사회적으로 버림받는 자라는 뜻이다. 오늘날에도 파리아들은 인도에서 엄청난 차별대우를 받기 때문에 사회적인 것을 포함, 모든 면에서 격리 수용되어 생활한다. 그러나 파리아는 조국인 인도를 떠나서 살지 않기에 비극적 운명의 존재라는 점에서는 디아스포라와 같지만, 그 생성원인과 생존공간이 다르기 때문에 김종삼의 서정적 자아의 경우 파리아보다는 디아스포라에 더 가깝다. 아무튼 김종삼의 경우 디아스포라와 같은 소외되고 비극적인 삶에서 오는 마음의 빈자리가 김종삼 시인의 삶의 공간이었고, 그 시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흩어진 것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된 순수 세계를 음악을 비롯한 예술과 관련된 언어 등으로 인유하여 노래하였던 것이다.

 

김종삼 시인의 생애에서 탈공간(脫空間, dislocation) 경험을 보면 출생지에서 성장지로, 조국에서 식민지 본국인 일본으로, 그리고 북한에서 남한으로 전치(轉置, displacement)되었다. 이러한 전치 경험은 삶의 건너뜀이고 그에 의한 빈자리에 자아의 능동성과 유효성이 폐기되거나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서정적 자아는 원점을 향한 그리움, 현실적 삶에서의 소극성(이는 김종삼의 경우 순수지향의식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떠돌이로서의 불안감, 고통에 대한 숨김이나 전유(轉有, appropriation) 등으로 의식화되어 김종삼 시에 형상화된 것으로 생각한다.

 

廣漠地帶이다기울기

시작했다잠시꺼밋했다

十字型의칼이바로꼽혔

堅固하고자그마했다

흰옷포기가포겨놓였다

돌담이무너졌다다시쌓

았다쌓았다쌓았다돌각

담이쌓이고바람이자고

틈을타凍昏이잦아들었

다포겨놓이던세번째가

비었다.

 

―「돌각담전문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이 시는 김종삼이 스스로 처녀작으로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처녀작은 작가로서의 문학적 인식의 출발점을 확인함으로써 작가의 상상력 구조의 원형을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여기에 나타나는 서정적 자아는 김종삼의 시적 상상력의 원형질을 함축하고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띄어쓰기와 행과 연의 완벽한 무시로 독해가 쉽지 않은 형태시로 되어 있는 돌각담의 서정적 자아에 대하여 살펴보자. 먼저 이 자아가 처한 세계 즉 시간과 공간을 보면, 그 시간은 凍昏이며 그 공간은 廣漠地帶이다. 이로써 서정적 자아는 추운 겨울 황혼녘에 넓고 적막한 곳에서 돌각담을 쌓고 있어 춥고 괴로운 황망한 존재로 드러난다. 마음에 걸려 유쾌하지 않고 속이 언짢다는 뜻의 꺼밋하다도 잠시밖에는 생각할 겨를이 없는 다급하고 불안한 존재인 것이다. 돌각담은 평북방언사전에 의하면 돌무더기이며, 이는 민속적으로 애기무덤의 한 형태이다. 그러니까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전쟁 중 피난길에서 죽은 이의 간이무덤을 다급하게 만드는 행위를 불완전하게(마지막에 세 번째가 빔으로서) 마쳤다는 기억을 권명옥의 해석처럼 凍昏, 시뻘겋게 얼어붙은 불변적 황혼의 미미지로 새겨 놓은 것이다. 이 시에서 견고하고 자그마한 칼은 죽은 이의 사망원인을 떠올리게도 하고, 망자를 위한 푸닥거리를 대신한 민속행위와도 관련시켜 읽을 수 있다. 흰옷을 포겨놓은행위는 백의민족으로서의 망자의 옷가지를 떠올리게 한다. 둘각담에는 월남한 디아스포라로서의 김종삼의 서정적 자아가 전하는, 전치 이전의 고향 사람들인 북한군에 의해 벌어진 전쟁 중 피난길에 겪은 참담하고 황망한 불안의 정서가 난해한 구조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방대한

 

공해 속을 걷자

 

술 없는

 

황야를 다시 걷자

 

―「걷자전문

 

걷자는 총 4행밖에 되지 않는 단형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행 사이를 비움으로써 각 행이 모두 한 연을 이루고 있어 우선 형태적으로 두루 비어 있음의 의미와 조응한다. 또한 그런 형태 때문에 읽는 시간을 더디게 만들어 그 의식이 지속적으로 끝나지 못함을 암시한다. 이 지속성은 마지막 행의 다시에 의하여 확실하게 표출되고 있다. 즉 이 시의 서정적 자아의 행위는 계속하여 끝없이 걷자로 요약될 수 있다. 시의 제목 또한 이러한 내용을 응축하고 있다. 그런데 서정적 자아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걷자고 청유하는 그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다짐하는 독백의 목소리이다. 외롭게 혼자이지만 계속하여 걸어가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확인하는 비장함이 느껴진다. 비장함은 마땅히 있어야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일치할 때 느끼는 존재의 비극성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서정적 자아는 현실과 불일치하는 있어야 할 이상적인 무엇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부정적 현실로 짐작되는 공해 속술 없는그리고 황야가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부정적 현실은 제1행의 방대한이 전체적으로 수렴하면서 전제하고 있는 양상이다. ‘공해(公害)’는 급속한 산업화에 따라 공장의 폐수, 매연과 소음, 각종 쓰레기 등으로 자연환경이 오염되어 입는 인위적인 재해를 이르는 말로 여기서는 더 넓은 상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서정적 자아는 재해로 뒤덮인 이 세상을 걸어가고 있으며 또 걸어가야 하는 비운의 존재가 된다. 이럴 때 김종삼이 그렇게 좋아하던 술이라도 있으면 위안이 될 텐데 그마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은 버려진 거친 들판, 즉 황야(荒野)인 것이다. 이러한 세상을 지속적으로 걸어야 하는 서정적 자아는 이방으로 전치된 디아스포라의 끝나지 않는 불운과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점철되는 불안의 존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술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담배 파이프로 각인된 이름난 애연가의 모습은 디아스포라로서 가지게 된 불안의식의 표상일 것이다.

 

3. 분단의식으로 바라보는 눈길

 

디아스포라로서의 김종삼 시의 서정적 자아는 그 존재 형성의 단초가 된 민족분단과 그 비극의 정점인 6.25 전쟁을 비껴나서 생각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먼저 서정적 자아의 분단의식이 드러나는 면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산 유대인인 디아스포라들은 떠나온 팔레스타인을 바라보면서 그곳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며 회상하거나, 정착한 이방에서의 소외되고 고된 삶의 애환을 가지고 살아간다. 마찬가지로 김종삼 시의 서정적 자아 역시 떠나온 곳에 대한 그리움의 회상소외된 삶의 애환의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는 디아스포라로서의 이중정체성을 보이고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이라 할지라도 나에겐

참담하게 보이곤 했다

어느덧

서른 여덟 해

그녀가 살아 있다면

나처럼 무척 늙었겠지

죽었다면 어떤 곳에 묻히었을까

순진하였던 그녀가

가난하여도 효성이 지극하였던 그녀가

 

―「전문

 

북녘으로부터 전치된 38년을 회상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이 시는 연으로 나뉘어 있지는 않지만, 내용상 앞부분 3행과 중간 부분 2행 그리고 뒷부분 5행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중간부분 어느덧/ 서른 여덟 해가 원인부분이고, 앞부분과 뒷부분은 그 결과의 내용을 담고 있다. 북녘이라는 시의 제목으로 짐작되듯이 그 원인은 민족분단이며, 38년은 38선을 연상하게도 하여 분단이 내용의 관건임을 함축한다. 앞부분은 남녘에 머물고 있는 서정적 자아의 분단 때문에 생긴 정신적 증상이며, 뒷부분은 북녘에 두고 온 가난하지만 순진하고 효성 지극했던 그녀를 잊지 못하는 안타까움의 정서적 현상이다. 서정적 자아는 불안한 그리움의 눈길로 세상을 더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들리는 어떤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도 참담하게 보인다는 서정적 자아의 눈길은 이산의 끈질긴 아픔을 독자의 가슴으로 애잔하게 옮겨 놓는다. 이러한 아름다운 것들의 비극은 일제강점기 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티프인데, 사랑하는 사람이나 나라를 잃은 사람들의 병적 증상인 것이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느낄 수 없는 정서적 마비 또는 결여현상이라 하겠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 만나게 되는 김종삼의 서정적 자아의 눈길은 이곳의 아름다움은 느끼지 못하면서 저곳(북녘)그녀에만 몰입하는 외롭고 불안한 시선인 것이다. 머리말 대신으로 쓰는 서시(序詩)에서도 헬리콥터가 지나자/ 밭 이랑이랑/ 들꽃들일랑/ 하늬바람을 일으킨다/ 상쾌하다/ 이곳도 전쟁이 스치어 갔으리라.’고 읊고 있다. 이 또한 아름다운 것들의 비극이 김종삼 시 이해의 입구에 자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걷고 있다 어느 古宮 담장옆을

 

옛 고향땅

녹음이 짙어가던 崇實中學

崇實專門 校庭

崇義女高 뜨락

장미 꽃포기들의 사이 길을

 

흰 구름 떠 있던

光成高普

正義女高 담장옆을

酒岩山 그림자가 드리워진

대동강 상류쪽을

 

또 어디였던가.

 

―「또 어디였던가전문

 

이 시에서도 서정적 자아는 역시 옛날 고향땅을 그리움의 눈길로 더듬고 있다. 어느 고궁 담장옆을 지나며(첫행) 회상의 눈길로 고향의 학교들, 길들, 대동강 등을 추억하고 있는 서정적 자아의 목소리는 또 어디였던가(끝행)’로 끝남으로써 그 그리움의 눈길이 끝나지 않음을 아니 끝날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산 이후 이 디아스포라로서의 서정적 자아는 38년 동안 떠나온 고향땅을 늘 더듬어 회상하는 그리움의 화신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서정적 자아의 애처로운 눈길은 달구지 길, 아우슈뷔츠·1, 실록(實錄), 서시(序詩), 평화롭게등을 비롯한 김종삼 시의 모든 서정적 자아의 눈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은 소외된 삶의 애환을 바라보는 서정적 자아의 눈길을 살펴보자.

 

離散가족의 경우를 보았다.

 

다 늙고 가난과 질병과 상흔에 찌들린

서로의 참담한 모습이 畵面에 비치자,

울부짖다가

부축을 받는

흔들림을 보았다.

그렇다.

죽음만이 참사가 아니다.

 

―「이산가족전문

 

이 시는 19845?학원?지에 발표된 작품으로, ‘畵面에 비치자에서 짐작되는 바대로 1983년에 있었던 KBS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시청경험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방송은 1983630일에 시작하여 138일에 걸쳐 453시간 45분 동안 계속됐는데, 출연한 이산가족은 53536명에 달했고, 1189건의 상봉이 이루어진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방송 기간 KBS 본관 앞은 가족을 찾으려고 모인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만남의 감격과 이산가족의 아픔을 생생하게 전하며 세계적인 화젯거리가 된 바 있다. 위의 시는 이 방송을 본 서정적 자아의 눈길로 그려진 소외된 삶의 애환에 대한 보고서라 할 만하다. 디아스포라가 바라보는 디아스포라의 삶인 것이다. 타향으로 전치되어 살아온 디아스포라들의 삶의 내용은 늙음, 가난, 질병, 상흔이며 그 애환의 모습을 서로 확인하며 울부짖는 장면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서정적 자아가 찾아낸 것은 흔들림으로 요약되며, ‘죽음만이 참사가 아니다.’라는 판단내용을 그렇다.’라고 결론적으로 확인한다. 여기서의 흔들림은 디아스포라들과 그 민족의 것이며 그것은 불안한 미래와 관련된다. 일반적으로 흔들림은 마음의 움직임 또는 사랑의 시작 등으로 작용하는데, 김종삼 시에서의 흔들림은 공포나 불안의식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나타나는 특이한 경우이다. ‘지금도 흔들리는 달구지 길’(달구지 길에서의 흔들림도 이와 관련될 것이다. 죽음만이 참사가 아니다.’라는 확언은 이산이 곧 죽음과 같은 고통임을 말하는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은 분단의식의 소유자인 서정적 자아에게 그 의식의 진원지인 전치의 현장은 트라우마로 각인되어 있을 것으로 추단된다. 김종삼이 월남하던 과정을 우리는 상세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시들은 그 전치의 과정을 형상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경험적 사실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분단으로 하여 월남한 사람이 김종삼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는 사실의 기록자가 아니라 시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즉 그 전치의 현장은 민족적인 의미의 형상화라는 말이다.

 

1947년 봄

深夜

黃海道 海州의 바다

以南以北境界線 용당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嬰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水深을 모른다.

 

―「민간인(民間人)전문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민간인으로서 1947以南以北境界線 용당의 바다를 통하여 심야에 남으로 전치되던 현장을 회상하고 있다. 위험한 분단의 선을 넘어 디아스포라의 길을 시작하는 일행이 겪은 참담한 사실을 객관적 거리를 두고 담담히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들켜서는 안 되는 탈북의 깊은 밤 바닷길에서 영아의 울음소리는 있어서는 안 되는 소리이기에 그 소리의 주체를 바닷물 속에 넣어 버린, 있어서는 안 되는 비극적 행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20년이 지나서도 잊을 수 없는 서정적 자아의 통한의 눈길과 우리는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행의 누구나 그 水深을 모른다.’는 진술은 분단으로 인하여 겪는 그 민족적 비극이 아무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깊다는 표현이고, 水深은 끝나지 않는 민족의 愁心으로 독자의 가슴에 새겨진다. 제목이 민간인으로 되어 있는 것은 군인도 아닌 민간인이 겪어야 하는 분단에 의한 군사적 피해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해방 이듬 이듬해 봄

十時十一時

솔밭 속을 기어가고 있음

멀리 똥개가 짖고 있음

달뜨기 전 넘어야 한다 함

경계선이 가까워진다 함

 

엉덩이가 들린다고 쥐어 박히고 있음

개미가 짖고 있음

달뜨기 전 넘었음

 

빈 마을 빈집들 있음

그런 데를 피해가고 있음

시간이 지났음

 

경계선이 다시 나타남

총기 다루는 소리 마구 보임

시야에

노란

붉은

검은 빗발침

 

개새끼들 길을 잘못 들었음

 

간간 遠近의 고함이

캄캄한 拘置所 전체가 벼룩떼이다

순찰 한 놈이 다녀갔음 벽 한 군데 거적떼길 들추어보았음 굵은 삭장 귀 네가 가로질린 살창임 합세하여 잡아당기고 있음 흙덩어리 떨어진 소리가 오래가고 있음

 

짐작 時計

二時 빠져 나갈 구멍이 뚫리고 있음

 

腦波 일고 있음

현재 罪目 反動 破壞分子

三時

 

三時四時 아직 순찰 없음

두 다리부터 빠져나와 있음

 

허연 달 밑

기어가기 시작함 엉덩이가 들린다고

쥐어박히고 있음

달 지는 쪽 西쪽과

쪽 파악하였음 엉덩이가 다시

높아지고 있음

 

―「달 뜰 때까지전문

 

이 시는 앞의 민간인보다 구체적으로 실감나게 탈북(전치)의 현장을 그리고 있다. 민간인이 서정적 자아의 회상의 눈길로 그린 것이라면, 이 시는 현재적 시점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 불안과 공포의 정서가 극적으로 실감나게 표출되어 있다. ‘달 뜰 때까지’(달이 뜨면 훤해져서 발각될 위험이 있으므로) 분단의 선을 넘어야 하는 일행은 10시부터 11시 사이 한 시간 동안이나 엉덩이가 들리지 않게 기어서 달뜨기 전에 넘었으나 그것은 길을 잘못 든 것으로 일행은 붙잡혀 구치소에 갇힌다. 그리고 탈출하기 위해 구멍을 뚫어 새벽 4시 경에 겨우 두 다리부터 빠져 나와다시 남향 길을 엉덩이가 들리지 않게기어가고 있다. 이러한 탈출의 극단적 공포는 일상에서 느끼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의식을 다르게 만든다. 이 시에 나타난 탈출에 걸린 시간은 약 6 시간 정도인데 6년보다 길게 느껴졌을 상대적 시간의식을 표현하기 위하여 여러 방법을 끌어들이고 있다. 먼저 제목을 달 뜰 때까지로 하여 촉박함을 나타내고, ‘흙덩어리 떨어진 소리가 오래가고 있음으로 공포의식을 표현하고, 시각을 알리는 단어는 모두 한자어로 하였으며, 시각을 나타내는 단어(三時)만으로 한 행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긴박한 시간이기에 공간의식은 흐려지고 전반적으로 탈출행위만이 현재진행형으로 반복되고 있다. 그리하여 개미가 짖고 있음’, ‘총기 다루는 소리가 마구 보임등의 감각의 혼란양상이 나타나 불안의식과 긴박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분단의식으로 가득한 서정적 자아가 디아스포라로 전치되는 현장을 공포와 불안의 눈으로 잡아서 그려내는 지울 수 없는 아픔의 이미지로 짜인 시들이다.

 

4. 전쟁 참상의 상흔과 평화 염원의 목소리

 

이제 디아스포라로서 서정적 자아에게 형성된 비극성의 정점이 되는 6.25 전쟁과 관련된 전쟁문학으로서의 김종삼 시에 관하여 논의해 보기로 하자. 웹스터 사전은 국가 또는 정치적 조직 집단 간에 폭력이나 무력을 행사하는 상태 또는 사실, 특히 둘 이상 국가 간에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수행되는 싸움이라고 전쟁을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칸트의 말대로 발전을 위한 필요악으로서의 전쟁을 역사발전의 법칙으로 진단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파괴와 창조라는 전쟁의 이율배반성이 인류사의 패러다임을 움직여 온 것은 사실이다. 이처럼 전쟁은 인류평화의 역설적 현상이지만 그 결과는 인간의 시간적, 물질적, 정신적, 문화적인 여러 현상을 불행으로 이끈다. 그래서 전쟁문학에서는 전쟁의 시작과 전쟁 중에 나타나는 인간의 무모성이나 잔혹성에 관한 고발과 반성의 실존적 휴머니즘이 그 중심을 차지한다. 그러나 김종삼의 전후시에서 6.25전쟁의 참혹상을 직접적으로 고발하거나 비판하는 내용의 시는 없다. 저 앞의 돌각담에서 본 것처럼 함축적으로 암시하거나 아우슈뷔츠로 우회하는 간접적이고 소극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다. 이는 전치된 서정적 자아가 갖게 되는 떠돌이로서의 불안의식에 의한 고통의 숨김이나 전유 또는 현실적 삶에서의 소극성으로 읽힌다. 전쟁체험이 하나의 원죄적 억압기제로 작용하여 주체의 욕망을 간접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두루 말하고 있는 순수지향의 미의식이 작용한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몇 줄 추리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본 再收錄이다

나치 獨逸로 하여 猶太族 七百五拾萬

아우슈뷔츠收容所에선 戰勢 기울기 시작 하루에 五千名씩 죽였다 한다

나치들의 왁살스러운 軍靴소리들은

有夫女들과 處女들도 발가벗겨 깨스에 처넣었고

울부짓는 어린 것들을 끌어다가 同族들이 판 깊은 구덩이에 同族들 지켜보는 가운데 던졌고

반항기가 있는 들은 즉각 絞首刑하였고

높은 굴뚝에서 치솟는 검은 煙氣

그칠 날이 없었고

날마다 늘어나는 死者들의 衣類

眼鏡과 신발들은 산더미처럼 쌓여갔고

死者들의 머리카락들은 軍服만들기 織造物이 되었고

死者들의 뼈가루들은 農作物 肥料가 되었고

 

산채로 무서운 毒藥방울의 醫學實驗用이 되었고

 

人間虐殺工場이었던 아우슈뷔츠 近方에선 지금도 耕作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실록(實錄)전문

 

이 시는 김종삼 시 중에서 전쟁의 참상을 가장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고발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제목도 실록(實錄)인 것이다. 아우슈비츠(Auschwitz)는 두루 아는 바처럼 폴란드 남부의 화학공업도시인데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유태인등 나치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750만 명이나 대량 학살하여 그 비인간적 만행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강제 수용소가 있던 곳이다. 김종삼은 이 아우슈비츠에 집착하여 이와 관련된 여러 편의 시를 남기고 있는데, 실록(實錄)을 비롯하여 지대(地帶), 아우슈뷔츠·Ⅰ」, 아우슈뷔츠·Ⅱ」, 아우슈뷔츠 라게르등이 그것이다. 실록(實錄)은 비인간적 학살의 참상을, 지대(地帶)는 전쟁에서 겪는 공포감을, 아우슈뷔츠·Ⅰ」은 전쟁에 의해 폐허가 된 모습을, 아우슈뷔츠·Ⅱ」는 평화를 그리는 일상인들의 파괴된 삶을, 아우슈뷔츠 라게르는 전쟁에 의한 애처로운 이산(離散)의 현장을 각각 그리고 있다. 이러한 전쟁의 참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아우슈비츠‘6.25’ 사이에 다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김종삼의 아우슈비츠에 대한 집중적 조명은 디아스포라로서 그의 ‘6.25’에 대한 우회적 방법이며, 전쟁에 대한 인류의 비인간적인 야만성을 일반화하려는 전략이라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서시(序詩)’는 맨 앞에서 내용을 이끌어가는 지향성의 남상(濫觴)이 되는 법인데, 김종삼의 서시(序詩)헬리곱터가 지나자/ 밭 이랑이랑/ 들꽃들일랑/ 하늬바람을 일으킨다/ 상쾌하다/ 이곳도 전쟁이 스치어 갔으리라.’고 읊조리고 있다. 상쾌함을 느끼는 전원에서 헬리곱터를 만나 느닷없이 전쟁을 떠올리고 있는 서정적 자아의 모습이다. 여기서의 전쟁은 바로 6.25이며, 서정적 자아는 전쟁이라는 트라우마를 통하여 생성된 김종삼의 심리적 자아라고 하겠다. 김종삼에게 있어 아우슈비츠6.25 전쟁의 인유 또는 대유인 것이다. 다음의 시는 6.25와 직접 관련된 전쟁문학으로 읽을 수 있다.

 

마지막 담너머서 총맞은 족제비가 빠르다.

집과 마당이 띠엄띠엄, 다듬이 소리가 나던 洞口

하늘은 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대낮을 펴고 있었다.

 

군데군데 잿더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못 볼 것을 본 어린것의 손목을 잡고

섰던 할머니의 황혼마저 학살되었던

僻地이다.

그 곳은 아직까지 빈사의 독수리가 그칠 사이 없이 선회하고 있었다.

원한이 뼈무더기로 쌓인 고혼의 이름들과 의 이름을 빌려

號哭하는 것은 洞天江의 갈대뿐인가.

 

―「어둠 속에서 온 소리전문

 

이 시는 1964년 발행된 ?한국전후문제시집?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그러니까 휴전된 후 한참 지나서 쓴 작품일 텐데, 서정적 자아는 아직까지 빈사의 독수리가 그칠 사이 없이 선회하고 있는 동천강가에서 호곡하는 갈대의 소리, 어둠 속에서 온 소리를 듣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갈대뿐인가.’라고 자문함으로써 그 소리가 인간인 우리 모두와 관련됨을 말하고 있다. 그 호곡 소리는 바로 원한이 뼈무더기로 쌓인 고혼의 이름들로부터 오는 상흔의 아픔소리인데, ‘의 이름을 빌려우는 것이기에 인간의 재앙에 무심한 신에 대한 원망이 섞여 있다. 그 원망은 제1연 제3행에서의 하늘은 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대낮을 펴고 있었다.’라는 진술에서 더욱 명백하게 증명된다. 사람들은 바른데 죄 없이 총 맞아야 하는 비극을 하늘은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늘이 외면하는 대상은 서정적 자아의 회상 내용인데, 의도적 행 가름을 하고 한자어로 강조된 僻地로 요약된다. 2행의 집과 마당이 띠엄띠엄, 다듬이 소리가 나던 洞口로 표상된 평화롭던 벽지 마을이 잿더미가 되었고, 가족들의 느닷없는 죽음으로 추측되는 못 볼 것을 본 어린것의 손목을 잡고/ 섰던 할머니의 황혼마저 학살되었던곳이다. 이러한 전쟁의 참상을 말하는 서정적 자아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정상적으로 말할 수 없으므로 잡고/ 섰던처럼 비정상적인 행갈이를 통하여 발화되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호곡할 수밖에 없는 국토와 민족의 상흔을 형상화하여 6.25 전쟁의 비극성을 고발하고 있는 시이다. 달구지 길에 보이는 달구지 길은 休戰線以北에서 죽었거나 시베리아 方面 다른 方面으로 유배당해 重勞動에서 埋沒된 벗들의 소리다.’처럼 많은 김종삼의 시에 전쟁으로 인한 죽음이나 이산 등의 상흔이 묻어 있는 것이다.

 

전쟁과 희생과 희망으로 하여 열리어진

좁은 구호의 여의치 못한 직분으로서 집없는 아기들의 보모로서 어두워지는 어린 마음들을 보살펴 메꾸어 주기 위해

역겨움을 모르는 생활인이었습니다.

 

―「여인부분

 

인용한 부분은 전쟁고아들을 돌보고 있는 한 보모를 칭송하는 목소리로 읊고 있는 작품인 여인의 제1연이다. 어려운 형편이지만 역겨움을 모르고 아기들의 상처 받은 어린 마음들을 친엄마처럼 돌보는 성자적 여인상을 그리고 있다. 그 여인의 삶을 전쟁과 희생과 희망으로 하여 열리어진것으로 진술하고 있는데, 전쟁으로 인하여 고아들이 발생했고 그래서 희생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희망이라는 단어이다. 그것은 어린이들이 있기에 어떠한 역경이라도 이겨내면서 그들을 기르면 희망의 미래가 열릴 것이라는 서정적 자아의 평화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사실 김종삼 시의 거의 모든 서정적 자아는 지고지순의 이상적 세계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의 본적(本籍)늦가을 햇빛 쪼이는’, ‘거대한 계곡’, ‘나무 잎새’, ‘영원히 맑은 거울’, ‘독수리’, ‘교회당 한 모퉁이’, ‘인류의 짚신이고 맨발’(나의 본적)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순수주의, 휴머니즘, 영원주의, 평화주의가 김종삼 시인의 정신적 본적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루를 살아도

온 세상이 평화롭게

이틀을 살더라도

사흘을 살더라도 평화롭게

 

그런 날들이

그날들이

영원토록 평화롭게

 

―「평화롭게전문

 

매우 직설적이고 쉬운 표현으로 영원한 평화를 희구하는 내용을 반복하는 짤막한 시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전쟁과 관련된 김종삼의 시들이 평화의 역설임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서정적 자아는 조심스럽게 아니면 우회적으로 6.25 전쟁이 불러온 참혹한 죽음과 이산의 고통 등 피폐된 민족의 삶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평화에 대한 역설의 목소리인 것이다.

 

5. 분단문학의 자장

 

본고는 지금까지 김종삼 시의 서정적 자아를 논의하면서 그가 가지고 있는 분단의식과 그것이 형상화되는 과정을 고찰하였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김종삼 시의 서정적 자아는 북한에서 남한으로의 전치에 의한 그의 디아스포라로서의 생애에서 형성된 것으로 끝나지 않는 불운과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점철되는 불안의 존재로 보았다.

 

둘째, 이러한 불안의식을 드러내는 서정적 자아는 그 존재 형성의 단초가 된 민족분단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그리하여 떠나온 곳에 대한 그리움의 회상소외된 삶의 애환을 담은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는 디아스포라로서의 이중정체성을 보이고 있다.

 

셋째, 김종삼 시의 서정적 자아는 조심스럽게 아니면 우회적으로 6.25 전쟁이 불러온 참혹한 죽음과 이산의 고통 등 피폐된 민족 삶의 상흔을 투영하고 있는데, 그것은 평화 염원에 대한 역설의 목소리인 것이다.

 

김종삼 시의 서정적 자아는 민족분단에서 잉태된 것으로 그의 시를 분단문학의 자장 안에 확실하게 정치(定置)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디아스포라와 같은 고통과 불안의 존재로서 서정적 자아는 분단의 극점인 6.25 전쟁의 상흔을 안고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로 그려내고 있는 김종삼 시의 모든 텍스트는 평화염원 나아가 영원한 순수세계의 이상을 꿈꾸는 역설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니까 김종삼의 모든 시는 그것이 어떤 지향성을 가지든 상관없이 인생의 모순적 운명의 형상화를 통하여 휴머니즘의 리얼리티를 실현하는 문학의 본질적 핵심에 도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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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범석, [비평의 빈자리와 존재 현실], 박문사, 201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