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삼

김종삼 시의 ‘셀프 아키타입’ 양상 - 서범석

공산(空山) 2015. 12. 9. 14:28

김종삼 시의 '셀프 아키타입' 양상

서범석

 

 

1. 서론 탈가정의 비정상적 삶

 

김종삼(19211984) 시인은 이북 출신으로 6.25 전쟁 전에 가족들이 월남하였고, 본인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후 전쟁 전에 월남하여 문학적 생애를 대부분 남한에서 살았다. 그래서 디아스포라(diaspora)로서의 어려운 삶을 남한에서 겪으면서 음악과 술 그리고 담배에 과도하게 집착하면서, ‘불쾌노여움을 느낄 때 뿌리 뽑힌 자로서의 정한(情恨)을 시로 형상화한 시인이다. 그러니까 그의 시는 흩어진 것에 대한 그리움에서 시작되었으며, ‘상실된 순수 세계를 향한 염원이 그 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

 

서울에서의 김종삼의 삶은 부인 정귀례 여사의 증언대로 변태비정상의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생활인로서의 김종삼의 이러한 비정상적인 모습은 한 마디로 탈가정(脫家庭)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데 가정경제에 대한 무관심, 가족들에 대한 등한함, 가족 신앙을 멀리 한 점 등이다.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경제적으로 너무나 어렵게 살았다는 것인데, 사실 동아방송국을 비롯한 몇 군데 직장을 꽤 오랫동안 다닌 그가 왜 그렇게 가난하였는지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가정경제의 어려움을 모르고 가장으로서의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한 데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월급을 타면 대부분 본인이 쓰고 아주 조금씩만 부인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은 과 밀접히 관련되는데, 돈이 없으면 책을 내다 잡히고 술을 마셨고, 가족이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면 지붕을 타고 도망하여 마셨으며, 꼭 술을 마셔야 시를 썼다고 한다. 이러한 가정경제에 대한 무관심과 술·담배에 대한 집착은 가족의 불만과 반감으로 연결되었다고 차녀 김혜원 씨는 회고하고 있다. 가정경제에 대한 무관심은 바로 가족에 대한 등한함으로 연결된다. 시인 석계향의 중매로 만나 1년 정도 교제한 뒤 김종삼이 불쌍하게 보여서결혼했다는 부인 정귀례 여사는 김종삼 시인이 집안 경조사 또는 자식들의 입학식이나 졸업식 등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단 한 번 차녀 졸업식에 참석했는데 그것도 사진만 찍고 도망갔다고 한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도 가정적이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다음으로 그가 가족 신앙인 기독교를 멀리 한 점을 들 수 있다. 그간의 연구에는 김종삼이 기독교를 신봉한 것처럼 다룬 것들이 보이는데 사실 그는 생전에 교회 다니며 착실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그런 타입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부친 김서영(金瑞永)은 신문기자를 지낸 인테리켄차로 기독교 감리교회의 장로를 지냈으며 부인 정귀례 여사도 천주교를 신봉하였지만 결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후에는 부인의 신앙생활 덕분에 천주교 묘지에 안장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김종삼은 가족의 정신적 지주인 종교까지 멀리하여 철저히 탈가정적 삶의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본고는 이상과 같은 김종삼의 탈가정의 삶이 그의 셀프 아키타입(self archetype)’의 면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사실 인류의 성자들은 대부분 가정이나 가족에 얽매이지 않는 탈가정적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것은 더 높은 이상에 대한 구도이며, 더 깊은 정신적 자아실현을 위한 고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거시적 휴머니즘이야말로 신성(神聖)지향의 셀프 아키타입인 것이다.

 

아키타입(Archetype)은 칼 융(Carl Jung)이 인간의 집단무의식에 전승되는 인류 공통의 경험을 유형화한 보편적인 이미지의 패턴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까 아키타입은 인류의 과거 체험의 법전화이며, ‘수많은 동일 유형 체험의 정신적 잔재로서 이의 투사에 의하여 정서적으로 공감의 영역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신화·원형비평의 입장인 것이다. 융에 의하면 셀프 아키타입의 구체적 모습은 인류의 성인(聖人)이라고 부르는 예수,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 등에서 볼 수 있는 신성(神聖) 지향성으로 우리 안에 있는 신(God with in us)’의 모습이다. 한명희는 김수영 시에서의 셀프 아키타입을 통하여 비판과 저항의식, 자유에의 지향, 역경(力耕)주의적 성향, 죽음에 대한 초월적 자세 등을 읽어 내고 있는데 이는 본고의 시사점이 되었다.

 

김종삼 시에 대한 심리주의적 접근에 의한 시의식 탐구는 한이각, 송경호, 이위조, 라기주, 한명희, 정상균, 장동석 등에 의하여 상당한 업적이 쌓여 있다. 그리고 사물의 존재에 남아 있는 순수의식의 본질(현상학적 잔여)을 기술하려는 테마비평의 방법으로 김종삼의 의식의 지향성(환상성, 이미지, 시의식 등)을 탐구한 것들도 많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행연구들은 심리적 내면성에 관하여 단편적 또는 부분적으로 다룬 것들이 대부분이며 특히 셀프 아키타입에 관하여 본격적으로 다룬 논문은 없는 것 같다. 이에 본고는 김종삼 시에 나타나는 셀프 아키타입의 양상에 대하여 의식의 대상인 노에마(noema)를 귀납적으로 고찰하면서 그의 상실된 순수 세계를 향한 노에시스(noesis)를 검토하고자 한다.

 

2. 순수의식과 영원지향

 

세계상실자로서 황야에서 떠도는김종삼의 탈가정적 아키타입의 원형질을 찾을 수 있는 작품이 1955?전시한국문학선?에 실려 있는 개똥이-일곱 살 되던 해의 개똥이의 이름로 추단된다. 이 시는 전시에 전염병이 돌아 아이들이 죽어가는 당시 상황의 비극성을 전하는 작품으로 보이는데, 이 시에 새끼줄 치고/ 소독약 뿌리고/ 집을 나왔읍니다.’라는 가출(家出) 모티프가 보인다. 그 가출의 모티프는 병마나 죽음과 같은 세상의 환란에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가야겠읍니다/ 엄지발톱이 돌부리에 채이어/ 앉아볼 자리마다 흠이 잡히어/ 도라다니다가 말았읍니다.’라는 가출 후의 고행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외출이란 시에도 밤이 깊었다/ 外出하자/ 나는 飛翔할 수 있는 超能力怪物體이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성인들이 세상의 고통, 무상함, 환란, 무질서 등을 보고 가족과 집을 버리고 출가하여 고행하면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과 흡사한 서정적 자아의 모습을 김종삼의 시에서 만나게 된다. 마치 예수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태복음10장과 24)는 성경구절을 연상하게 한다.

 

이 시의 일곱 살 개똥이에 대한 서정적 자아의 노에시스는 김종삼의 셀프 아키타입 표출의 시작점으로 생각된다. 김종삼의 시를 일별해 보면 이상하리만치 어린이이미지의 출현 빈도가 월등히 많음을 금방 알 수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불개미알만이 씰고 어지롭다고떠나간 개똥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김종삼 시에 나타나는 수많은 어린이 이미저리는 모두 개똥이의 초상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 신의 은총도 받지 못하고 인간들의 무모한 만행이나 비운으로 역경을 겪게 되는 천사 같은 존재들이란 말이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川邊 一錢 均一床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짜리 두 개를 보였다.

 

―「장편(掌篇)·2전문

 

극빈한 가족의 외식풍경(?)을 그렸다고나 할까, 어버이의 생일에 10전 짜리 2인분 식사를 사 드리려는 효성 깊은 거지소녀가 식당 주인으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하는 모습이 가슴 시리게 울려오는 작품이다. 여기서의 거지소녀는 그 불운의 근원이 거지장님 어버이로 보이는데,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어버이에 대한 신실한 효성은 뜨겁게 간직하고 있는 불운의 천사같은 모습이라 하겠다. 이러한 죄 없는 어린이 노에마에서 우리는 무구한 순수의식을 검출하게 된다. 그것은 어머니 배-ㅅ속에서도/ 보이었던(오동나무가 많은 부락입니다)’ 인간의 천성으로 휴머니즘의 원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다한 개똥이의 초상이 지닌 불운의 요소를 요약해 보면 가난, 전쟁, 이산, 질병, 장애, 죽음, 고독 등인데 그 중 어느 것도 어린이 자신이 선택한 것은 없다.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천부적 인권마저 짓밟혀야 하는 어린 것들의 노에마들과 관련되는 김종삼의 순수의식은 이상적인 휴머니즘의 세계 실현에 대한 역설적 표현들이다. 권명옥의 규명처럼 김종삼은 체험적 기분(a feeling experience)인 자신만의 정서에 충실했고, 자신이 체험하지 않은 정서를 결코 노래한 적 없는 정서적 순혈주의자인 것이다.

 

싱그러운 巨木들 언덕은 언제나 천천히 가고 있었다

 

나는 누구나 한번 가는 길을

어슬렁어슬렁 가고 있었다

 

세상에 나오지 않은

樂器를 가진 아이와

손쥐고 가고 있었다

 

너무 조용하다.

 

―「풍경전문

 

 

이 시는 서정적 자아가 걷고 있는 인생길의 풍경을 말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연부터 제3연까지는 과거형으로 되어 있고, 마지막 제4연만이 현재형이다. 그러니까 싱그러운 巨木들 언덕천천히또는 어슬렁어슬렁 가고있었던 과거는 세상에 나오지 않은/ 樂器를 가진 아이와/ 손쥐고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 현재는 너무 조용하다.’는 것이다. 3연의 세상에 나오지 않은/ 樂器를 가진 아이라는 역설은 메시지의 핵심이 되는데, ‘세상에 나오지 않은의 피수식어가 惡器인지 아이인지 모호하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던 김종삼 시에서 음악이나 어린이이미지는 순수의식과 연결되는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세상일에 얽매이거나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순수의 길을 걸어온 결과로써 현재는 매우 평화롭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그 순수의 세계가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함축되어 있다고 하겠다. 앞에서 본 수많은 불운의 천사로서의 어린이 이미지들은 바로 이러한 이상적 평화의 삶을 이어가지 못하는 어린이들의 역설적 존재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평화에 보이는 잠 깨는 아침마다’ ‘어린 것들은 행복한 얼굴이기를 바라는 영원지향의 순수의식의 형상화인 것이다.

 

이상과 같은 김종삼의 어린이에 관한 지대한 관심은 성경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복음 18)”는 예수를 연상하게 하는 김종삼의 셀프 아키타입이다. 이러한 영원지향의 순수의식은 당연히 세속의 물질적 욕망을 경계하며 이상적 정신주의를 지향하게 한다.

 

오늘은 용돈이 든든하다

낡은 신발이나마 닦아 신자

헌 옷이나마 다려 입자 털어 입자

산책을 하자

북한산성행 버스를 타 보자

안양행도 타 보자

나는 행복하다

이 세상이 고맙다 예쁘다

 

긴 능선 너머

중첩된 저 산더미 산더미 너머

끝 없이 펼쳐지는

멘델스존의 로렐라이 아베마리아의

아름다운 선율처럼.

 

―「행복전문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오늘 용돈이 든든하여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용돈은 새 신발이나 새 옷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겨우 버스 요금을 낼 수 있는 정도이다. 버스 타고 산에 가서 중첩된 산더미들을 보면서 행복했던 독일 음악가 멘델스존과 아름답고 순결한 그의 음악을 떠올리며 누리는 시간을 만끽한다. 그에게 행복은 결코 돈이나 물질이 아닌 순수한 아름다움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비와 지혜만으로 살아오다가 죽은 이’(추가의 그림자)遺品이라곤 遺産이라곤/ 五線紙 몇 장인 청빈한 생애를 살다 간 사람을 존경하며 추모하고 있다. 그리고 오십평생 단칸 셋방뿐이다()’, ‘나는 인왕산 한 기슭/ 납작집에 사는 사람이다.()’, ‘토큰 열여덟개를 사서 주머니에 깊숙이 넣었다. 며칠 동안은 넉넉하다.(오늘)’고 물질주의와는 거리가 먼 청빈한 삶을 노래한다. 그러면서 집이라곤 비인 오두막 하나밖에 없는/ 草木의 나라(라산스카)’를 그리며 세상 욕심이라곤 없는 불치의 환자처럼 생존하여 갔다(평범한 이야기)’고 고백한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을 넘어선 이 같은 순수의식의 이상적 영원지향은 비뚤어진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김종삼은 환멸의 습지(이 짧은 이야기)’질곡 路上(전주곡)’으로 보고, ‘人工靈魂 사이/ 아스팔트 길에는 時速違反의 올페가 타고 뺑소니치는 競技用 자전거 사이(올페의 유니폼)’의 비극적 시인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인류의 성자들은 모두 돈이나 물질적 삶을 멀리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특히 예수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고, 환전상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은 뒤,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마가복음11)고 격노하는 모습은 물질적 삶에 대한 적극적 비판이다.

 

영원지향의 순수의식을 형상화하고 있는 불운의 천사로서의 어린이 이미저리와 물질적 삶을 멀리하는 태도 그리고 세속적인 것에 대한 비판의식 등은 탈가정적 생애와 더불어 김종삼 시에 나타나는 셀프 아키타입의 본류가 되는 것이다.

 

3. 긍휼심과 신성지향

 

성인(聖人)이란 덕과 지혜가 뛰어나고 사리에 정통하여 사람들이 우러러 받드는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을 뜻한다. 인류의 스승이 되는 이러한 성인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도덕적 언행의 목적가치를 나에게 두느냐 아니면 남에게 두느냐가 관건이 될 수 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기주의(利己主義)인가 이타주의(利他主義)인가로 범인(凡人)과 성인(聖人)을 구별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전종준이 ?유싱킹 : 긍정의 힘을 뛰어넘는 생각?에서 말하는 내 생각(iThinking)’이 아닌 남을 위한 긍정의 생각인 유싱킹(uThingking)’이 중요한 것이다. ‘이익행복의 초점을 내가 아닌 남에게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성자적인 신성지향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공자의 인() 사상의 요점을 담고 있는 사람도 못 섬기는데 어찌 귀신을 말하겠느냐”(?논어? 선진편)사람 섬기기’, 석가모니의 으뜸 가르침인 자비(慈悲), 즉 인자한 얼굴로 남을 사랑하는 마음과 고난에 처한 남을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 예수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 전서? 13)고 가르치는 사랑, 이것들은 모두 보다 의 이익과 행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실천적 핵심은 다른 사람을 불쌍하고 가엾게 여겨서 도와주는 긍휼 (矜恤)’에 있다. 김종삼 시의 도덕적 메시지의 핵심은 이 긍휼에 있으며 그것이 그의 셀프 아키타입의 꽃이며 열매이다.

 

희미한

風琴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아닌 人間을 찾아다니며 물 몇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머나먼 廣野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우에선

 

―「물통전문

 

물통은 가벼운듯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인생론을 함축하고 있는 작품이다. 2연의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은 바로 인생의 존재의미를 묻고 생각하게 돕기 때문이다. 그 질문에 대한 서정적 자아의 대답이 제3연의 人間을 찾아다니며 물 몇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이다. 여기서 인간을 찾아다니며타인을 위하여, ‘물 몇 사소한 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니까 이타적인 긍휼의 선행은 조금밖에 하지 못했다는 후회와 자책의 고백으로 들린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인생의 의미는 남을 위해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후회의 목소리를 통해 작은 것이 큰 것이다.’라는 지혜를 덤으로 얻는다.

 

뿐만 아니라 그 후회와 자책의 과정을 표현한 제1연의 형상화 방법에서 김종삼 시의 탁월한 미적 성취를 보게 된다. 질문을 받고 생각해 보니 뚜렷하게 내세울 게 없음을 희미한으로 바꾸고, 그 자책과 절망감이 風琴 소리가/ 툭 툭 끊어지는 것으로 변주하여 가슴을 울려 주며, 그 황망한 심정을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라는 주관적 행갈이를 통하여 동감케 하는 등의 내용과 형식의 절묘한 조응이 전해 주는 미적 성취에 감흥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제4연의 머나먼 廣野의 한복판에서 실존적 인간의 고독을,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에서 인간의 한계성을, ‘하여금 따우에선에서 그러한 인간이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이 긍휼이라는 사실을 우주적, 종교적, 철학적으로 암시받게 된다. 이러한 김종삼의 서정적 자아가 가는 길이 바로 앞 장에서 논의했던 어린이 이미저리와 물질적 삶을 멀리하는 태도 그리고 세속적인 것에 대한 비판의식과 직통하는 길이다. 그리고 그가 남긴 분단이나 전쟁 소재의 많은 작품들 또한 그러하다.

 

내가 많은 돈이 되어서

선량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맘 놓고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리니

 

내가 처음 일으키는 微風이 되어서

내가 不滅平和가 되어서

내가 天使가 되어서 아름다운 音樂만을 싣고 가리니

내가 자비스런 神父가 되어서

그들을 한번씩 訪問하리니

 

―「미사에 참석한 이중섭씨전문

 

이 시에 나타나는 긍휼의식은 너무나 선명하여 첨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선량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처음의 미풍, 불멸의 평화, 천사, 신부가 되고자 하는 주체가 누구인가는 궁금하다. 우선 제목으로 보아 미사에 참석한 이중섭 씨가 듣거나 말한 기도의 내용으로 볼 수 있고, 아니면 이중섭의 그림을 보고 그 내용과 생애를 생각하며 서정적 자아가 중개하는 기도나 기원의 목소리로도 볼 수 있다. 어느 것이 되었든지 그것은 김종삼 시인의 서정적 자아의 긍휼의식을 전하는 신성지향의 셀프 아키타입의 희원이 담겨 있는 것이다. 따라서 김종삼의 시에는 가엽슨 것들의 秋波가 덥히어 지는(석간)’, ‘성자처럼 인간을 어차피 동심으로 흘러가게 하는(오월의 토끼똥·)’, ‘어린 마음들을 보살펴 메꾸어 주’(여인), ‘자비한 것 말고 또 무엇이 있으리(유성기)’, ‘어떤 일이 있어서도 녀석들을 죽이지 않겠다(장편·1)’, ‘그래도 살아보겠다는 가난한/ 불구자 돕기 운동이 펼쳐졌으면(관악산 능선에서)’ 하고 바라는 환상의 수난자이고 아름다운 인도주의자(베들레헴)’의 신성지향의 목소리들이 가득한 것이다.

 

4. 죽음 초탈과 천상지향

 

모든 생물이 겪는 생명과정의 완전 정지 상태인 죽음은 인간에게도 비극적인 종말이기에 대부분 두려워하거나 부정하고 싶은 것이 본능이다. 그러나 예수나 소크라테스의 생애는 직접 몸을 희생하여 정신적 삶을 완성하여 보여 주고 있으며, 불교에서도 죽음을 생사윤회에서 벗어나 열반에 드는 일로 인간 완성을 뜻한다. 그리고 공자가 백성이 나를 믿지 않는다면 나는 존립할 수가 없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하고 있으며, “아침에 도를 듣고 깨우쳤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있는데, 이는 인간에게는 죽음보다 소중한 것이 있으며 인간의 생물적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말이다. 한마디로 성현들은 생사를 초월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정신적 삶을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김종삼 시의 서정적 자아 역시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는 초탈하는 자세를 보여주는데, 이 또한 그의 셀프 아키타입의 형상화라고 하겠다.

 

머지 않아 나는 죽을거야

산에서건

고원지대에서건

어디메에서건

모짜르트의 플루트 가락이 되어

죽을거야

나는 이 세상에 맞지 아니하므로

병들어 있으므로

머지 않아 죽을거야

끝없는 평야가 되어

뭉게 구름이 되어

양떼를 몰고 가는 소년이 되어

죽을거야

 

―「그날이 오며는전문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그날이 오면’ ‘죽을거야를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거기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삶에 대한 아쉬움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 서정적 자아는 고통의 감정을 쾌락의 감정으로 전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토록 죽음에 대하여 초탈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세상저 세상에 대한 확실한 판단과 신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세상은 나에게 맞지 않으며 병들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미련이 없다. 그리고 저 세상은 모짜르트의 플루트 가락’, ‘끝없는 평야’, ‘뭉게 구름’, ‘양떼를 몰고 가는 소년이 되어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노에마들에서 아름다움’, ‘영원함’, ‘절대자유’, ‘평화로움에 대한 의식의 지향을 읽어내게 된다. 그것은 천당이나 열반 또는 무릉도원에서의 삶으로 돌아가는 천상적 삶에로의 지향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죽는다고 한들 어떤 미련이나 공포가 남아있을 리 없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김종삼의 초탈한 마음은 그럭저럭에 붙어 있는 단문에서 모짜르트와 슈베르트는 애석하게도 서른두 살에 죽었다는데, 아무 쓸모 없이 살아온 이놈은 너무 오래 살았다. 더 늙기 전에 덕지덕지하고 추해지기 전에 세상을 하직해야만 한다.”라고 말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하기에 수면제를 잠들면 깨어나지 않으려고 많이 먹었다(아침)’, ‘이승과 저승이 다를 바 없다고……오늘 날짜로 죽자고 중얼거리면서(사별)’, ‘앞당겨지는 죽음의 날짜가 넓다.()’, ‘해괴한 팔짜이다 또 죽지 않았다(죽은을 향하여)’ 등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죽던 날에서는 다비드아랫도리를 만져보다가/ 관리인에게 붙잡혀 얻어터지고 있었다라고 자신의 죽음을 희화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초탈한 모습이 바로 김종삼의 또 하나의 셀프 아키타입의 양상이라고 하겠다. 그의 이러한 서정적 자아는 그리스도는 나의 산계급이었다고(부활절)’라고 말하기도 하고, ‘나의 ……해질 무렵 나타내이는 石家이다.(나의 본)’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石家는 중의적으로 해석한 것이지만 이러한 표현들은 신성지향의 내면을 엿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나 지은 죄 많아/ 죽어서도/ 영혼이/ 없으리(라산스카)’라는 구절도 이러한 신성지향의 표현이라고 하겠다.

 

햇살이 눈부신

어느 날 아침

 

하늘에 닿은 쇠사슬이

팽팽하였다

 

올라오라는 것이다.

 

친구여, 말해다오.

 

―「올페전문

 

이 시는 언뜻 한 장의 성화(聖畵)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시간적 배경은 제1연의 햇살이 눈부신/ 어느 날 아침인데 여기서의 햇살과 제2연의 하늘에 닿은 쇠사슬이 신비하고 신성한 이미지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신화·원형비평에서 본다면 햇살과 쇠사슬은 모두 상향의 관념과 결합되고 특히 빛은 신성의 상징으로 신이나 성령을 암시하고 쇠사슬은 거기로 갈 수 있는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과연 서정적 자아는 올라오라는 것이다.’라고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연을 바꿈으로서 생각의 시간을 마련한 후, 그래도 청자인 친구를 부르며 말해 달라고 부탁한다. 조언이 필요할 만큼 하늘에 오르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갈 수 있다면 가고 싶은 것이 서정적 자아의 본심일 것이다. 이 시에 대한 해석이야 다양할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시인의 천상지향의 의식을 검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김종삼의 시에서 죽음의 노에마를 통하여 천상의 삶을 향하는 노에시스를 읽을 수 있다.

 

입원하고 있었읍니다

육신의 고통 견디어 낼 수가 없었읍니다

어제도 죽은 이가 있고

오늘은 딴 병실로 옮겨간 네 살짜리가

위태롭다 합니다

 

곧 연인과 死刑 간곡하였고

살아 있다는 하나님과

간혹

이야기-ㄹ 나누며 걸어가고 싶었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의 한 손을

잡아 주지 않았읍니다.

 

―「궂은 날전문

 

김종삼 시에는 많은 죽음의 모티프가 나와 있는데, 그것은 생의 종점에 가까울수록 출현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그는 198412월 간경화로 타계하기까지 여러 번 병원을 드나들며 병마에 시달렸다. 그래서 죽음에 가까워진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죽음과 관련된 시를 여러 편 남기게 되었을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김종삼은 죽음에 대하여 초탈한 모습을 보이지만, 위의 궂은 날에서는 사정이 좀 다른 양상을 보인다. 1연에서는 병고와 함께 죽음의 근접에서 오는 약간의 불안의식이 감지된다. 그리고 제2연에서는 연인에 대한 간곡한 사랑의 미련도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의 한계를 느낄 때 우리는 절대자에게 다가서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김종삼 시의 서정적 자아도 간혹 시궁창에 산다 해도/ 의 은혜이다.(非詩)’ 또는 옛 벗들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음도/ 의 은총이다.(오늘)’ 등의 말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궂은 날의 서정적 자아는 신에게 매달리고 싶지만 하나님은 저의 한 손을/ 잡아 주지 않았읍니다.’라고 말함으로써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드러낸다. 그것은 기독교 가정에서 살아온 사람으로서 최후의 탈가정적인 모습이며 끝까지 죽음에 대하여 초탈하고자 하는 주체적 셀프 아키타입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계를 지닌 나약한 인간으로 태어나 불행한 디아스포라(diaspora)로서 평생을 살다간 김종삼의 안쓰러운 성자(聖者)’의 모습을 여기서 확인하게 된다.

 

5. 결론 - 탈세계의 성자상(聖者像)

 

본고는 칼 융(Carl Jung)셀프 아키타입의 개념을 원용하여 김종삼 시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신성지향의 양상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였다. 그러한 작업은 노에마(noema)를 귀납적으로 고찰하면서 의식의 지향성인 노에시스(noesis)와 관련지어 수행하였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김종삼의 생애를 가정경제에 대한 무관심, 가족들에 대한 등한함, 가족 신앙을 멀리 한 점 등을 들어 탈가정(脫家庭)의 삶으로 분석하고 이러한 삶이 투영된 시들이 그의 셀프 아키타입의 원형질적 양상임을 밝혔다.

 

둘째, 김종삼 시에 무수히 나타나는 어린이이미저리를 분석하여 그들이 겪는 전쟁, 이산, 질병, 장애, 죽음, 고독 등의 노에마를 통하여 영원지향의 이상적인 휴머니즘의 세계 실현에 대한 역설적 표현의 순수의식을 검출하였다.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된 물질적 삶을 멀리하는 태도와 세속적인 것에 대한 비판의식 등도 함께 논의하였다.

 

셋째, ‘보다 의 이익과 행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의 실천적 양상인 긍휼 (矜恤)’에 관한 모티프를 분석하여 그것이 김종삼의 아름다운 인도주의자로서의 모습을 나타내는 셀프 아키타입의 핵심으로 판단하였다.

 

넷째, 서정적 자아가 말하는 숱한 죽음의 노에마들에서 아름다움’, ‘영원함’, ‘절대자유’, ‘평화로움에 대한 희원을 읽어내고, 삶에 대한 미련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초탈한 김종삼의 셀프 아키타입을 모습을 논의하였다. 그러면서 무신론적 실존주의로서의 안쓰러운 성자(聖者)’의 모습도 검토하였다.

 

김종삼은 고향땅에서 전치되어 평생을 디아스포라로서의 삶을 살아온 시인이다. 본고에서 검출한 탈가정적이고 고통 받는 세상의 사람들에 대한 긍휼의식, 그리고 죽음에 대한 초탈한 셀프 아키타입의 모습은 한 마디로 평화로운 세계를 염원하는 성자상(聖者像)’이라 하겠다. 이는 삶의 기록으로서의 문학적 특성을 실현한 것으로서, 김종삼은 민족의 분단과 전쟁에 대하여 아파하고, 불행한 사람들의 삶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성스러운 평화의 세계를 그리는 순수의식을 개성적으로 노래한 시인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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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범석 저서 [비평의 빈자리와 존재 현실](박문사, 2013)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