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삼

김종삼 시의 공간 - 한명희

공산(空山) 2015. 12. 9. 14:11

 김종삼 시의 공간

한명희 (시인. 강원대 교수)

 

공간과 시정신

 

전후 한국 시사에서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한 사람의 하나로 김종삼을 꼽는데 주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김종삼은 1951년〈돌각담〉을 발표하며 시단에 등단, 1984년 타계할 때까지 32년 간 시작 활동을 했다. 그 기간 동안 169편의 시를 남겼으니 그를 다작의 시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들을 통해 보여준 그의 시세계는 분명 독특한 것이었다. “현대시가 낳은 가장 완전도가 높은 순수시인”이라는 평가나 “30년이 넘는 시작과정을 통하여 독특한 스타일의 시를 보여줌으로써 다른 사람이 따를 수 없는 자기세계를 구축해 왔다”는 평가는 모두 김종삼 시의 독특성에 바쳐진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시에 있어 참으로 특이한 제작시의 반열에 그의 시가 놓인다”는 말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장 외딴 집이요, 가장 신비한 세계”라는 평가는 비유적이긴 하지만 김종삼의 시세계가 개성적이라는 점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최근에 들어 김종삼에 대한 논의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풍부해지고 있지만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차는 많지 않은 편이다. 기법면에서는 묘사와 절제, 잔상 효과, 담화체계상 청자의 부재, 장면제시의 기법 등이 논의되어 왔고 시정신으로는 비극적 세계 인식, 인간부재 의식, 초월적 낭만주의 혹은 환상적 초월의식, 죽음에 대한 친화감, 불안의식, 죄의식 등이 논의되었다. 용어는 조금씩 다르지만 김종삼의 시세계를 예술지상주의 혹은 비세속성, 미학주의 등으로 규정하는 데는 연구자들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다. 김종삼의 시 중 일부가 난해한 시로 의미 해독의 길을 쉽게 열어 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논자들 사이에 이견이 적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라고 하겠다.


김종삼 연구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글, 문제제기적인 글을 들라면 이숭원과 정상균의 것을 꼽아야 할 것이다. 이숭원은 김종삼의 시를 인간부재의 시, 실험적인 존재부정의 시로 보는 관점에 반기를 든다. 그는 김종삼 시에 나타나는 죽음에 대한 인식 및 삶의 의미에 대한 성찰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전개하면서, 김종삼 시에 나타나는 아름다움이 인간의 삶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겪는 죽음과 삶의 체험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방법을 원용하여 김종삼의 시세계를 분석한 정상균은 김종삼을 ‘희열’에 대한 형벌을 스스로 만들고, ‘受刑’의 자세 속에 그의 시의 특유의 경지를 제시해 보인 ‘운명의 시인’으로 평가한다. 그의 글에서 특히 탁월한 분석력을 보여주는 부분은 김종삼 시에 드러나는 ‘모순의 시관과 세계관’을 밝힌 부분이다. 여기서 그는 김종삼이 시와 非詩, 시인과 비시인, 시를 아는 것과 시를 모르는 것, 아름다운 곳과 전쟁터, 사랑과 죽음, 비행과 추락 등의 대극적인 정서를 하나의 작품이나 진술 속에 병치시키는 버릇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연구들이 소홀히 하고 있는 김종삼 시의 이미지, 그 중에서도 집․ 학교․ 병원 등의 공간에 주목하고자 한다. 많은 수의 김종삼의 시들이 집․ 학교․ 병원의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병원’에 대해서는 그가 오랫동안 질병을 앓았다는 자전적 체험과 관련한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학생도 교사도 아니면서 ‘학교’를 소재로 한 시를 많이 썼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병원’과 ‘집’의 의미도 달리 해석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김종삼 시에 빈번히 드러나는 공간 이미지를 중심으로 작품 분석을 시도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그의 시세계의 특징을 밝히는 것이다. 한 시인의 시에 자주 드러나는 이미지는 그의 시정신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지향과 집

 

김종삼 시에 많이 나타나는 공간 중 하나가 바로 ‘집’이다. 초가집(〈스와니江이랑 요단江이랑〉, 〈소리〉), 삼칸초옥(〈往十里〉), 통나무집(〈꿈의 나라〉), 납작집(〈새〉), 판자집(〈虛空〉), 목조건물(〈연인〉)에서부터 뾰죽집(〈뾰죽집〉), 방갈로(〈샹펭〉), 오두막(〈라산스카〉)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에는 수많은 형태의 ‘집’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들 집은 대부분 ‘죽음’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어 주목된다.

 

① 사면은 잡초만 우거진 무인지경이다

자그마한 판자집 안에선 어린 코끼리가

옆으로 누운 채 곤히 잠들어 있다

자세히 보았다

15년 전에 죽은 반가운 동생이다

더 자라고 둬 두자

먹을 게 없을까

―〈虛空〉

 

② 새로 도배한

삼칸초옥 한칸 房에 묵고 있었다

時計가 없었다

人力거가 다니지 않았다.

 

하루는 도드라진 電車길 옆으로 챠리 챠플린 氏와

羅雲奎 氏의 마라돈이 다가오고 있었다.

金素月 氏도 나와서 求景하고 있었다.

    ―〈往十里〉1, 2연

 

인용한 시 ① 「허공」에 나타나는 ‘판자집’은 ‘15년 전에 죽은 반가운 아우’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잠들다’는 말은 ‘죽는다’는 말의 완곡어로 쓰이거니와, ‘판자집’은 죽은 동생이 잠들어 있는 곳이라는 측면에서 ‘무덤’의 이미지를 환기한다. 특히 ‘판자집’이 “사면은 잡초만 우거진 무인지경”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쉽게 가지 않는 곳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②에서 화자가 거주하는 공간은 ‘삼칸초옥’이다. 이 집에 ‘시계가 없’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 정지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인력거가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의 통행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삼칸초옥에 있는 화자의 보다 특징적인 면은 ‘챨리 챠플린’, ‘나운규’, ‘김소월’ 등 이미 사망한 사람들이 ‘마라돈’을 하거나 ‘구경’을 하는 것을 본다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없고, 산사람의 통행도 없으며 죽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을 얘기하는 것으로 보아 이 시의 화자가 묵고 있는 ‘삼칸초옥’은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이 분명해진다. 특히 ‘초옥’이라는 말은 풀로 만들어졌다는 측면에서 무덤의 분위기를 환기한다. 위의 시 ①, ② 모두에서 ‘집’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으며 ‘풀’(잡초, 초옥)과 관련되어 있어 ‘집’과 ‘무덤’의 연관성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원형적 측면에서 무덤은 “지하의 주거지(the underworld dwelling)”로 이해된다. 김종삼 시에 ‘집’의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그의 무덤 지향, 더 크게는 죽음 지향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또 언제 올지 모르는/ 또 언제 올지 모르는 / 새 한 마리가 가까이 와 지저귀고 있다./ 이 세상에선 들을 수 없는/ 고운 소리가/ 천체에 반짝이곤 한다./ 나는 인왕산 한 기슭/ 납작집에 사는 산사람이다.

 

     ― 〈새〉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을 “인왕산 한 기슭/ 납작집에 사는 산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납작집’은 “이 세상에선 들을 수 없는/ 고운 소리”가 들리는 곳이라는 측면에서 ‘죽음’과 관련되며, 상징적으로도 ‘새’는 ‘영혼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소리라면 저 세상에서 울려오는 소리라고 보아야 할 것인데, 이 시의 화자는 그것을 듣고 있는 상황이므로 죽은 상황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나는 인왕산 한 기슭/ 납작집에 사는 산사람이다”라는 표현은 자신을 죽은 것으로 보는 상태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시 〈허공〉과 〈왕십리〉에 나타나는 집과 마찬가지로 시 〈새〉에서의 ‘집’ 역시 ‘인왕산 한 기슭’, 즉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으며, 산기슭에 있다는 점에서 ‘풀’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화자가 자신을 이미 죽은 사람처럼(무덤 속에 있는 사람처럼)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이 어둡고 부정적인 것으로 그려지지 않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새〉에서 화자는 저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고운 소리”로 표현하고 있으며 그것것것것천체에 반짝이곤 한다”라고 말한다. ‘죽음’것것비극적인 색채을 띠지 않는다는 것은 김종삼 시의 중요한 특질을 이룬다. 물론 ‘죽음’을 통해 ‘인간의 비정함’을 보여주는 〈掌篇. 1〉, 〈民間人〉, 〈西部의 여인〉 같은 시들이 존재하기는 한다. 그러나 ‘죽음’이 인간의 삶의 모습의 일부가 아니라 시인 자신의 문제가 될 때, 그것은 그가 지향하는 세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① 무척이나 먼

언제나 먼

스티븐 포스터의 나라를 찾아가 보았다

조그마한 통나무집들과

초목들도 정답다 애뜻하다

스티븐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같이 한 잔 하려고.

―〈꿈의 나라>

 

② 어느 산록 아래 평지에/ 널찍한 방갈로 한 채가 있었다/ 사방으로 펼쳐진/ 잔디밭으론/ 가즈런한/ 나무마다 제각기 이글거리는/ 색채를 나타내이고 있었다// 세잔느인 듯한 노인네가/ 커피 칸타타를 즐기며/ 벙어리 아낙네와 손짓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까이 가 말참견을 하려 해도/ 거리가 좁히어지지 않았다.

     ― <샹펭>

 

위의 두 시는 모두 화자의 ‘죽음 지향’을 보여준다. ①에서 화자는 ‘스티븐 포스터’가 사는 ‘통나무집’을 ②에서는 ‘세잔느인 듯한 노인네’가 사는 ‘방갈로’를 방문하려고 한다. 시 ①에서 화자는 ‘스티븐 포스터’와 “같이 한 잔 하려고” 하며 ②에서는 세잔느인 듯한 노인네와 벙어리 아낙네의 대화에 끼어들고자 한다. 같이 한 잔 한다거나 대화에 끼어 든다는 것은 격이 없이 친한 사이에서 가능한 것이므로, 화자의 이러한 시도에는 스티븐 포스터나 세잔느와 같은 처지에 놓이고 싶다는, 즉 죽고 싶다는 소망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두 시에서 화자가 죽음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은 화자가 묘사하고 있는 집과 집 주변의 분위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①에서 화자는 ‘스티븐 포스터의 나라’를 “조그마한 통나무집들과/ 초목들도 정답다 애뜻하다”고 하여 긍정적인 곳으로 그려내고 있다. ②에서 ‘세잔느인 듯한 노인네’가 사는 ‘방갈로’ 역시 ‘평지’, ‘널찍한’, ‘사방으로 펼쳐진/ 잔디밭’, ‘가즈런한/ 나무’ 등의 시어가 환기하는 정서에 의해 긍정적인 공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특히 ‘방갈로’는 ‘커피 칸타타’를 즐길 수 있는 곳이라는 측면에서 화자에게 편안한 곳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두 시에서 왜 하필이면 ‘스티븐 포스터’나 ‘세잔느’ 같은 예술가가 등장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이들이 “절대순수, 절대가치의 미적 세계를 표상”이며, “일상적 세계와는 다른 순수한 삶의 표상”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인용한 시 외에도 「꿈 속의 향기」, 「라산스카」, 「샹뼁」에는 죽음으로서의 집(기와집, 오두막, 스카이 라운지)과 죽은 예술가(김소월, 라산스카, 로트렉끄)가 함께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김종삼이 죽음을 지향하는 것이 순수 예술에 대한 경사와도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평화에 대한 염원과 학교

 

김종삼 시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공간의 하나는 ‘학교’이다. ‘학교’는 일차적으로는 배움의 장소이고 유년 시절의 많은 시간을 보낸 소중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김종삼의 시에는 유년의 기억과 관련해서 학교를 떠올기억 경우는 물론이고 현실의 삶과 학교를 병치시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들도 많다. 그의 시에서 ‘학교’는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김종삼의 두 번째 시집은 “시인학교”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이 시집에 실린 같은 제목의 시를 분석하는 것에서부터 ‘학교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 보자.

 

公 告// 오늘 講師陣// 음악 部門/ 모리스 라벨/ 미술 部門/ 폴 세잔느// 시 部門/ 에즈라 파운드/ 모두 缺講.// 金冠植, 쌍놈의새끼들이라고 소리지름. 持參한 막걸리를 먹음. 敎室內에 쌓인 두터운 먼지가 다정스러움./ 金素月/ 金洙暎 休學屆// 全鳳來/ 金宗三 한 귀퉁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눔. 브란덴브르그 협주곡 제五번을 기다리고 있음.// 校舍./ 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에 있음.

      ― 「詩人學校」

 

화자가 ‘시인학교’라고 이름한 이 학교는 강사와 학생이 독특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교사(校舍)의 위치 또한 특이하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학교와는 달리 생각해야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학교에서 강의를 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은 모리스 라벨, 폴 세잔느, 에즈라 파운드 등 각각 음악, 미술, 시의 대가들이다. 그리고 김관식, 김수영, 전봉래, 김종삼 등의 시인들이 ‘시인학교’를 다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학교는 강사진이 ‘모두/ 결강’하고 교실 내에 두터운 먼지가 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교실내에 쌓인 먼지를 다정스럽게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나 학생들이 막걸리나 소주를 ‘지참’하고 다니는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金冠植,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소리 지름”이라는 표현이 강사들의 결강에 대한 격렬한 항의로 느껴지기보다는 김관식의 성격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도 이 시를 평화로운 분위기로 만드는데 기여한다.


이 시에는 시인들이 모여 음악, 미술, 시를 배우면 좋겠다는 시인의 소망이 일차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시인은 학교를 “레바논 골짜기”에 위치시킨 것일까? ‘레바논’은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이 치러졌으며, 1976년 1월부터 10월말까지는 내전을 겪었고, 같은 해 10월 ‘레바논 성전 이라드 선언’이 있었던 70년대 가장 치열했던 격전을 치르고 있던 국가였다. 정상균의 적절한 지적처럼, 이 학교의 강사나 수강자들이 레바논에 특별히 인연이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화자는 전쟁이 나서 폐허가 되어 있을 곳에 시인학교를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레바논 골짜기’에 예술가들이 모여서 음악과 미술과 시를 얘기했다면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화자의 생각이 개입되어 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굳이 ‘학교’라는 장소에 그 예술가들을 모아놓은 것은 시인의 의식 속에 ‘학교’는 평화로운 곳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극의 현장에 학교를 놓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렇게 역사적인 참상이 있는 곳과 학교를 병치시키는 방식은 시 「아우슈뷔츠」에도 나타난다.

 

어린 校門이 보이고 있었다/ 한 기슭엔 雜草가// 죽음을 털고 일어나면/ 어린 校門이 가까웠다.// 한 기슭엔/ 如前 雜草가,/ 아침 메뉴를 들고/ 校門에서 뛰어나온 學童이/ 學父兄을 반기는 그림처럼/ 복실 강아지가 그 뒤에서 조그맣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우슈뷔츠 收容所 鐵條網/ 기슭엔/ 雜草가 무성해 가고 있었다

     ― 「아우슈뷔츠」

 

이 시는 1, 2로 되어 있는데, 인용한 부분은 1이다. 의미가 모호한 부분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우슈뷔츠’ 수용소 기슭의 잡초와 교문 기슭의 잡초의 병치만은 분명히 드러나 있다. “아우슈뷔츠 수용소 철조망/ 기슭”에 “잡초가 무성해 가고” 있는 것과 “어린 교문” 기슭의 잡초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찾아내기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학교(교문)가 긍정적인 기능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2연에서 보는 것처럼 “죽음을 털고 일어나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3연에서 보여주는 학교 교문과 관계된 정경 역시 따스하고 평화롭다. “아침 메뉴를 들고/ 교문에서 뛰어나온 학동이/ 학부형을 반기는 그림처럼/ 복실 강아지가 그 뒤에서 조그맣게 쳐다보고 있는”, 그야말로 “어린” 시절 학교에서 벌어질만한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도 아우슈비츠라는 비극의 장소에 학교를 위치시키고 있으며, 이 학교는 화자의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위의 두 시에서 학교는 레바논, 아우슈비츠의 비극에 대한 안타까움과 평화에 대한 염원을 나타내는 곳으로 쓰이고 있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이렇게 학교를 이상적인 공간으로 생각하는 것은 김종삼에게 있어 매우 특징적인 면이라고 하겠다. 그의 시들을 살펴보면 학교는 평화롭고 따뜻한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五학년 一반입니다.

저는 교외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저의 학교도 교외에 있습니다.

오늘은 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므로 오랜만에 즐거운 날입니다.

북치는 날입니다.

우리 학굔

높은 포플라 나무줄기로 반쯤 가리어져 있습니다.

아까부터 남의 밭에서 품팔이하는 제 어머니가 가물가물하게 바라다보입니다.

운동 경기가 한창입니다.

구경온 제또래의 장님이 하늘을 향해 웃음지었습니다.

점심때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가져 온 보자기 속엔 신문지에 싼 도시락과 삶은 고구마 몇 개와 사과 몇 개가 들어 있었읍니다.

먹을 것을 옮겨 놓는 어머니의 손은 남들과 같이 즐거워 약간 떨리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품팔이하던

밭 이랑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고구마 이삭 몇 개를 주워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모습은 잠시나마 하나님보다도 숭고하게 이 땅 위에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이제 구경왔던 제또래의 장님은 따뜻한 이웃처럼 여겨졌습니다.

     ― 「五학년 一반」

 

이 시는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의 순박성과 그 어투를 그대로 되살려서 천진한 화해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데, 시의 평이한 표제와 진술식의 스타일이 안에 담긴 감동적 내용과 대조가 되어 시적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5학년 1반」이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는 이 시는 초등학교 운동회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 여기서 학교는 사람들에게 “오랜만에 즐거운 날”을 제공하는 곳으로 제시되어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가난한 사람이나 신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도 모두 즐거워할 수 있고 웃을 수 있는 곳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남의 밭에서 품팔이하는” 어머니조차도 이 날은 점심 때 “도시락과 삶은 고구마 몇 개와 사과 몇 개”를 보자기에 싸서 아들(화자)의 운동회에 참석한다. 화자의 “어머니의 손”이 “남들과 같이 즐거워 약간 떨리고 있”다는 것은 이렇게 잠시나마 품팔이하던 일을 놓고 아들에게 점심 도시락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즐거움의 표현이다. 이 학교 운동장은 이렇게 고단한 삶을 잠시 잊게 하는 운동장이며, 신체장애를 지닌 장님조차 “따뜻한 이웃으로 여겨”지게 하는 곳이다. “구경온 제또래의 장님”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이 장님은 화자와 비슷한 나이로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닌다면 5학년쯤 되었겠지만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운동회날 만큼은 장님 아이도 학교로 와 맘껏 웃으며 운동회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5학년 1반」에서 학교는 가난한 사람도, 장애를 가진 사람도 다같이 즐거울 수 있는 평화의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도 ‘남들과 같이’ 즐거워할 수 있으며 장애를 가진 사람도 ‘따뜻한 이웃으로 여겨’지는 ‘학교’ 같은 공간이 전세계로 확대될 때, 세상은 전쟁이나 폐허대신 평화가 넘치는 곳이 될 것이다. 김종삼의 시에서 학교가 등장하는 것은 바로 그런 세상에 대한 염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걷고 있다 어느 古宮 담장옆을

옛 고향땅

녹음이 짙어가던 崇實中學과

崇實專門 校庭과

崇義女高 뜨락

장미 꽃포기들의 사이 길을

흰 구름 떠 있던

光成高普

正義女高 담장옆을

酒岩山 그림자가 드리워진

대동강 상류쪽을

또 어디였던가.

 

― 「또 어디였던가」

 

이 시는 5연 12행으로 되어 있는데, 이 짧은 시에 학교 이름이 다섯 가지나 나오고 있다. 여기서 학교 이름 하나하나의 의미를 짚어보는 일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다만 화자가 거론하고 있는 학교가 지니는 정서가 어떠한 것인지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화자는 자신의 현재 상황을 “걷고 있다”란 말로 압축해 버린 후 특정한 장소들을 기억해내려고 애쓴다. 그런데 화자가 기억해 낸 장소는 숭실중학, 숭실전문, 숭의여고, 광성보고, 정의여고 등의 학교이다. 화자가 왜 이러한 학교들을 떠올리는지에 대한 정보를 위의 시는 충분히 전달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화자의 회상의 목적이 고향에 있는 학교를 떠올리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5연에서 “주암산 그림자가 드리워진 대동강 상류쪽을”이란 표현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화자의 관심이 학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자가 회상하는 장소는 모두 평화로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학교를 수식하는 “녹음이 짙어가던”, “흰 구름 떠 있던” 등의 수식어와 “장미 꽃포기들의 길”이라는 명사구가 그것을 증명한다. 현재 상황은 감춘 채 과거의 특정 장소, 그것도 평화로운 장소들만을 떠올리는 것은 현재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어쨌든 이 시는 화자가 생각하는 가장 평화로운 공간이 학교라는 점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병원과 성자적 자세

 

김종삼에 대한 연보가 확실히 정리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여러 연구자들의 글을 살펴보면 그가 죽기 전 10여 년간 병을 앓았으며 병원 신세를 진 적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병원 체험은 그의 시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병원, 혹은 병을 소재로 한 많은 시를 탄생시킨다. 「무슨 曜日일까」, 「掌篇. 4」, 「평범한 이야기」, 「앞날을 향하여」, 「투병기」, 「오늘」 등이 그러한 시이다. 그러나 이들 병원과 관련된 시들을 전기적 사실과 관련해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앞 장에서 필자는 김종삼 시에 ‘학교’라는 공간이 자주 나타나며 이것은 그의 평화 지향과 관계있다는 설명을 했다. 김종삼은 학생이나 선생의 신분이 아니면서도 ‘학교’ 이미지를 시에 자주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병원’에 대해서도 다른 각도에서의 해석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① 나는 입원하여도 곧 죽을 줄 알았다.

십여 일 여러 갈래의 사경을 헤매이다가 살아나 있었다.

(중략)

한 아낙과 어린것을 안은 여인이 나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나는 냉큼 손짓으로 인사하였다.

(중략)

산소 호흡 마스크를 입에 댄 채 이틀이 지나며 산소호흡기 사용료는 한 시간에 오천 원이며 보증금은 삼만 원 들여 놓았다며

팔려고 내놓은 판자집이 팔리드래도 진료비 절반도 못 된다며, 살아나 주기만 바란다고 하였다.

(중략)

가망이 없다는 통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이가 생존할 때까지 돈이 아무리 들어도

그이에게서 산소 호흡기를 떼어서는 안 된다고 조용히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되풀이 하여 조용히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앞날을 향하여」

② 작년 1월 7일/ 나는 형 종문이가 위독하다는 전달을 받았다/ 추운 새벽이었다/ 골목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허술한 차림의 사람이 다가왔다/ 한미병원을 찾는다고 했다/ 그 병원에서 두 딸아이가 죽었다고 한다/ 부여에서 왔다고 한다/ 연탄가스 중독이라고 한다/ 나이는 스물 둘, 열 아홉/ 함께 가며 주고받은 몇 마디었다/ 시체실 불이 켜져 있었다/ 관리실에서 성명들을 확인하였다/ 어서 들어가 보라고 한즉/ 조금 있다가 본다고 하였다.

― 「장편」

 

위에서 인용한 시는 모두 병원과 관련된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더 정확히는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화자의 연민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시 ①의 경우는 화자 자신이 병원에 입원한 환자로 설정되어 있지만 화자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자기보다 다 딱한 처지에 놓인 다른 환자다. 화자는 “십여 일 여러 갈래의 사경을 헤매이다가 살아나”, “시체실 주위를 배회하거나/ 죽어가는 사람의 침대 옆에 가 죽어가는 얼굴을 들여다보”거나 “특별치료 병동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에 놀러가곤”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화자의 이러한 행동은 병든 사람으로서 미리 죽음에 익숙해지려는 노력 이상의 의미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자가 ‘마실을 다니’면서 특히 주목하게 된 사람은 산소 호흡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남편을 살려보려고 애쓰는 한 ‘여인’이다. 화자가 이 여자를 “만날 때마다 반”기며 “십구일 동안이나 의식불명이 되었다가 살아난 사람도 있는데 뭘 그러느냐고”서 위로하는 이유는 이 여자의 가난과 착한 심성에 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여자는 “팔려고 내놓은 판자집이 팔리드래도 진료비 절반도 못” 되는 상황이며, 결국은 “가망이 없다는 통고를 받”았지만 “그이가 생존할 때까지 돈이 아무리 들어도/ 그이에게서 산소 호흡기를 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가난하고도 착한 사람이다. ②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형 종문이가 위독하다는 전달을 받”고 병원에 가는 도중 ‘한미병원을 찾는다’는 사람을 만난다. 그 사람은 스물 둘, 열 아홉 먹은 딸을 연탄가스 중독으로 잃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부여에서 왔다는 것으로 보아 두 딸은 부모와 떨어져 서울에서 살다가 변을 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화자는 위독하다는 형에게 먼저 가보기보다 그 남자와 함께 시체실에 가보고 관리실에서 성명을 확인하는 일까지 지켜봐준다. 화자가 이 남자를 쉽게 떠나지 못하고 ‘어서 들어가 보라고’ 말하는 것은 이 남자의 ‘허술한 차림’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위의 두 시를 포함해서 김종삼 시에 나타나는 병든 사람들, 또 그들의 보호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가난하지만 착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에서 시인은 동정 이상의 반응을 보인다. 인용하지 않은 시 「시체실」에서는 ‘시립 무료병실’에서 ‘10여 년 간 기거하고 있는/ 여동생’을 ‘하나님의 딸’이라고까지 표현한다. 김종삼이 이렇게 가난한 병자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이 세상이 이렇게 착하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병들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판단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아가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봉사하겠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나는

밋숀 병원의 圓柱처럼

주님이 꽃 피우신 울타리

지금 너희들 가난하게

생긴 아기들의 많은

어머니들에게도 그랬거니와

柔弱하고도 아름다웁기 그지 없음은 짓밟혀 갔다고 하지만

지혜처럼 사랑의

먼지로서 말끔하게 가꾸어진

자그마하고도 거룩한

생애를 가진 이도 있다고 하잔다.

(1연 생략)

제각기 色彩를 기다리고 있는 새싹이 트이는 봄이 되면 너희들의 부스럼도 아물게

되면

나는

밋숀 병원의 늙은 간호부라고 하여 두잔다

- 「마음의 울타리」

 

위의 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을 끈다. 하나는 “유약하고도 아름다웁기 그지 없음은 짓밟혀 갔다”는 진술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주님이 꽃 피우신 울타리”, “밋숀 병원의 늙은 간호부”로 비유하는 것이다. “유약하고도 아름다웁기 그지 없음”이 짓밟힌다는 것은 ‘밋숀 병원’, ‘간호부’ 등이 등장하는 이 시의 문맥으로 보아 병드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라고 하겠다. 화자는 이러한 상황이 “많은 어머니들에게도 그랬거니와”라고 하여 ”, 당연한 사실로 받아 비고 있다. 그리고 특히 “가난하게/ 생긴 아기들의 많은/ 어머니들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여 ‘가난’을 강조 상황이다. 앞에서 병원름다웁기 그화자황이병든앞에서 , 혹은 그 가족병원름로하듯이 위의 시 「마음의 울타리」기 도 화자는 병든앞에서 을 위해 기꺼이 ‘마음의 울타리’가 되어주고자 한다. 화자는 이 ‘울타리’를 ‘주님이 꽃 피우신’ 것이라고 하여 신성한 의미까지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유약하고도 아름다웁기 그지 없음은 짓밟혀” 버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 즉 가난하고 착하게 사는 사람은 살기 어려운 세상이라는 생각은 김종삼이 맘에 맞지 않는 현실을 견디는 한 방법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병들어 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김종삼의 자부심의 일면을 형성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 병이 들었다는 것은 착하고 아름답게 살고 있다는 증거이며 나아가 신성하게 살고 있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이다.

 

머지 않아 나는 죽을거야

산에서건

고원지대에서건

어디메에서건

모차르트의 플루트 가락이 되어

죽을거야

나는 이 세상에 맞지 아니하므로

병들어 있으므로

머지 않아 죽을거야

끝없는 평야가 되어

뭉게 구름이 되어

양떼를 몰고 가는 소년이 되어서

죽을거야

 

― 「그날이 오며는」

 

이 시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는데, 네 번이나 반복되는 ‘죽을거야’를 중심으로 의미상의 단락을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단락에서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그것도 머지 않아 죽을 것이라는 대전제를 내놓는다. 그리고 두 번째 단락에서는 자신이 죽을 장소와 죽을 방식에 대해 얘기하며, 세번째 단락에서는 자신이 ‘머지 않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여기서 화자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화자는 자신이 “이 세상에 맞지 아니하”며, “병들어 있”기 때문에 죽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에 맞지 않다는 것, 병들어 있다는 것은 일면 현실에 대한 패배의식으로 읽히지만 조금 달리 생각해 보면 이것은 화자의 긍지와 관련되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에 맞지 않아 곧 죽게 될 것이라는 말에는, 죽은 뒤의 세상이야말로 자기에게 맞는 세상일 것이라는 기대가 들어있다. 그리고 화자에게 그러한 세상을 앞당겨주는 것이 바로 자신이 병들어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이 시의 화자가 겪 이 세상병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세상을 억지로 살아가느라고 생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화자에게 있어 ‘죽음’은 자신에게 맞는 세상으로 가는 것이며 병을 치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화자의 ‘죽음’에 대한 기대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시의 의미상의 네 번째 단락에서 화자는 ‘그날’의 자신의 모습을 ‘양떼를 몰고 가는 소년’, 즉 예수에 비유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는 선한 목자에 비유되고 있으며, 이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위에서 인용한 시 「앞날을 향하여」, 「장편」, 「마음의 울타리」 등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이 시에서도 자신이 병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돌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때의 의지는 영웅의식, 우월의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노래하면서도 평화롭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과 평화의 시학

 

한 시인의 시에서 특정한 이미지가 반복되어 나타난다면, 이 이미지들은 그 시인의 의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종삼의 시에는 집, 학교, 병원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이 글은 이 이미지들을 중심으로 김종삼 시의 특징을 분석해 본 것이다. 김종삼 시에 나타나는 집들(초가집, 삼칸초옥, 통나무집, 납작집, 판자집, 뾰죽집, 방갈로, 오두막) 등은 모두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그 집들은 대부분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으며 식물 이미지로 둘러 싸여 있다는 점에서 ‘무덤’의 표상으로 이해된다. 원형적 측면에서도 ‘무덤’이 ‘지하의 주거지’로 이해되어 왔다는 점에 미루어볼 때, 김종삼 시에 집의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그가 죽음을 지향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김종삼 시에 등장하는 ‘집’들의 특징적인 면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겠는데 하나는 그곳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곳에 주로 순수 예술가들(스티븐 포스터, 세잔느, 김소월, 라산스카, 로트렉끄 등)이 산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가 죽음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 순수 예술에 대한 경사와도 관련이 있음을 입증한다.


김종삼 시에 나타나는 또하나의 특징적인 공간은 ‘학교’이다. 「시인학교」, 「아우슈뷔츠」 등의 시에서 ‘학교’ 레바논, 아우슈비츠 등 역사적인 비극이 자행된 곳에 위치한다. 이것은 그의 평화 지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김종삼에 있어 학교는, 「5학년 1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가난한 사람도 장애를 가진 사람도 다같이 즐거울 수 있는 평화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왜 김종삼 시에 ‘병원’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는가에 대해서는 그의 개인적 이력과 관련한 대답, 즉 오랜 투병 생활을 했다는 것이 가장 손쉬운 대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병원’과 관련해서 보여주는 의식은 매우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에서 병든 사람은 거의 대부분이 가난하지만 착한 사람들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병든 이유는 “유약하고 아름다웁기 그지 없”이 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 맞지 아니하므로/ 병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김종삼에 있어 병원은 “세상 욕심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 보여주는 김종삼의 태도는 성자적 자세와 거의 흡사한 것이다.


이렇게 집, 학교, 병원으로 구분하여 김종삼의 시세계를 요약해 보았지만, 이 세 가지 공간들은 다시 하나의 의미망으로 다시 묶일 수 있을 것이다. 학교와 병원도 넓게는 ‘집’에 속한다. ‘집’이 ‘죽음’과 관계된다는 것은 이 글의 2장에서 자세히 밝힌 바 있는데, ‘병원’도 곧 죽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는 측면에서 죽음과 관련된다. ‘학교’는 김종삼이 평화의 공간으로 제시한 곳인데, 그에게 있어 평화는 죽음과 다르지 않다. 이 세상은 병든 사람, 즉 “유약하고 아름다웁기 그지없는” 사람들이 살아가기에는 알맞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다른 세상’(죽음)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죽음과 평화에 대한 희구, 그것이 김종삼 시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시안》 2012 여름호

 

한명희: 1992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시집읽기》, 《두 번 쓸쓸한 전화》, 《내 몸 위로 용암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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