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분홍 입술의 시간 - 이인원

공산(空山) 2021. 5. 17. 11:56

   분홍 입술의 시간

   이인원

 

 

   방금

   발등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면

   책갈피 속에 영영 잠들었을 이 한 컷

   그때

   셔터에 잡히지 않았다면

   까맣게 지워졌을 장면들

 

   기억 속에 순장된 얼굴

   눈꺼풀 아래 매장된 만남과 이별

 

   발굴이 되기도 도굴이 되기도 했다

 

   누가 가슴에 삽을 댄 것일까

   깜짝 놀라 깨어난 분홍 입술의 시간

 

   벼락같은 한 장면과 다 늙어 죽어 다시 만난다면

 

   네가 죽고

   내가 산다면

   내가 죽고

   네가 산다면

 

   그래도

   나는 분홍색으로 질문했을 것이다

 

   푸르렀던 젊은 날 개장해 보자

   녹슨 애증의 시절 이장해 보자

 

   도톰한 분홍 입술의 시간

   자꾸 달싹거리는 날에는

 

 

  『그래도 분홍색으로 질문했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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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원 : 1952년 경북 점촌에서 출생. 숙명여자대학교 졸업. 1992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마음에 살을 베이다』, 『사람아 사랑아』, 『빨간 것은 사과』 등이 있음. 2007년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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