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일기

고모를 뵈러 가다

공산(空山) 2021. 2. 26. 20:57

아버지의 5남 4녀 형제자매 중 지금 생존해 계시는 분은 고모 둘뿐이다. 고모 네 분은 모두 아버지의 동생들인데 그 중에서 둘째와 넷째 고모만 생존해 계시는 것이다. 오늘은 아내와 함께 둘째 고모를 뵈러 가기로 했다. 둘째 고모를 뵈러 가기 전에, 우선 지저동의 큰고모댁을 먼저 찾아 보기로 했다. 큰고모는 십수 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전쟁때 유복자로 태어난 하나뿐인 아들, 그러니까 내겐 고종 형님의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큰고모가 계실 때는 명절마다 찾아뵙곤 했었지만, 그 고모가 돌아가신 후엔 고종 형님을 만나기가 어려워지고 소식마저 끊겼다. 형님의 도박과 그로 인한 형수와의 이혼설 등 흉흉한 소문만 가끔 들려올 뿐이었다. 큰고모가 사시던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주택가의 골목길엔 비슷한 집들이 늘어 서 있어서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이사를 갔을지도 모를 일이어서 오늘은 일단 집찾기를 포기하고 돌아섰다.

 

평광의 둘째 고모를 찾아가는 길도 쉽지는 않았다. 너덧 해 전에 사촌들과 함께 가서 오랜만에 고모를 뵙고 왔던 길이지만, 본마을의 안길과 밭들 사이로 난 농로의 갈래가 여럿이어서 어느 길로 들어서야 그 막바지 골짜기로 이어질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고종 동생에게 전화로 물어서 알게 된 번지를 자동차의 네비게이션에 입력하고서야 가까스로 찾아갈 수 있었다. 고모는 아직 건강해 보였고 혼자 살고 계셨다. 오랜만에 찾아간 우리를 무척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오늘은 고모의 아들 중에서 가까이 살며 농사를 짓는 셋째와 넷째 아들이 와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인동초와 보리수(물포구), 오갈피나무 등을 우려 고모가 직접 만드셨다는 감주가 시원하니 맛있었다. 둘째 고모도 큰고모 아들의 소식은 모른다고 하셨다. 예닐곱 해 전에 와서 그해 송이를 따 마련한 돈 기백만 원을 몽땅 빌려간 뒤로는 소식이 끊겼다고 하셨다. 나는 고종 동생들에게 줄 시집을 몇 권 가지고 갔는데, 한글을 깨치지 못한 고모에게 시를 두어 편 골라 읽어 드렸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해서 궁금했던 이야기들을 오늘 나는 고모한테서 들을 수 있었다. 여든일곱(돼지띠 1935년생)의 연세에도 고모는 옛일들을 많이 기억하고 계셨다. 검단동에 친정이 있던 어머니가 그 먼 산골까지 시집을 가게 된 것은 검단동에 사시던 큰할아버지(고모와 아버지에겐 큰아버지)가 중매를 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또한 아버지가 일본에 징용을 간 것은 결혼전 광복 2년 전쯤이었고 광복후 2년쯤 지나서 귀국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집에 와서 아버지(닭띠 1921년생)와 어머니(범띠 1926년생)의 연세와 나의 출생연도를 기준으로 연표를 작성해 보니 고모가 말씀하신 아버지의 귀국연도에 몇 년의 오차가 있었다. 고모는 그 무렵 8,9세의 어린 나이였으니 기억에 오차가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어머니가 서른하나이던 1956년(잔나비띠)에 나를 낳으신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 아버지의 귀국이 고모의 기억대로 1947년쯤이라면 그해에 결혼을 하셨다고 해도 어머니는 스물둘에 결혼을 하신 것이 된다. 그러나 호적등본에는 1944년 6월에 혼인신고를 했다고 되어 있다. 1944년이면 어머니가 열아홉 살 때인데, 신고가 늦어지던 그 시절의 사정을 감안하면 내가 알고 있던 대로 어머니가 열여덟 살 때인 1943년에 결혼하신 것이 맞을 것이다. 

 

다음에 고모를 뵙게 되면 이 연대의 오차에 대해서 다시 말씀을 들어 보리라. 그리고 앞으론 좀더 자주 찾아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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