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텃밭에는 젊은 호두나무가 네 그루 있다. 15년쯤 전에 1년생 실생 묘목을 사다 심었는데 호두가 열리기 시작한지도 칠팔 년은 된 것 같다. 새로 축대를 쌓고 지반을 고른 척박한 땅에 심어서 그런지, 두더지들이 뿌리 밑 땅속에 굴을 하도 뚫어서 그런지, 혹은 동해를 입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그루는 몇 년 전에 죽었다. 그래서 살아남은 네 그루만은 죽이지 않기 위해 해마다 나무 밑의 땅을 일구어 두더지 굴을 메꾸기도 하고 잡초를 뽑고 거름을 주곤 한다.
그런데, 지금 그 호두나무에 이상한 일이 생겼다. 호두나무는 암수한그루(자웅동주)로 알고 있고 실제로 지난해까지도 네 그루 모두에 호두가 열렸었는데, 올봄엔 가운데에 서 있는 한 그루만 지금 수꽃을 주렁주렁 피웠다. 자세히 보니까 암꽃은 수꽃을 피운 나무를 포함한 모든 나무에 피어 있다. 지난해에도 수꽃은 그 한 그루만 피웠는지는 그때 관심 있게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희한한 일이다. 부랴부랴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더니 한 블로그(안동 호두농장)에는 대강 아래와 같은 설명이 인용되어 있었다.
「호두나무는 급변하는 자연환경에 적응하고 근친교배를 피하기 위하여 스스로 암꽃과 수꽃을 서로 다른시기에 피움으로써 우성인자를 생산하는 매우 총명한 나무다. 암수꽃이 한 그루의 나무에서 피어나는 자웅동주이지만 수꽃이 먼저 피는 웅화선숙형과 암꽃이 먼저 피는 자화선숙형으로 나뉘고, 일부의 나무들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피는 자웅동숙형이다.」
이 설명을 읽고 나서 다시 살펴 보아도 지금 수꽃이 없는 나무엔 수꽃을 피운 흔적이나 맺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늦게라도 수꽃을 피울 것인지, 내년에도 그 한 그루만 수꽃을 피울 것인지, 아니면 내년엔 다른 나무가 수꽃을 피워 수분수 역할을 교대할 것인지, 앞으로 찬찬히 관찰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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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5일, 호두나무에 다시 수꽃이 피었다. 그런데 올해는 네 그루 모두에 수꽃이 달렸는데, 그중 세 그루는 수꽃이 이미 활짝 피어 축 늘어진 상태고, 지난해에 피었던 가운뎃 나무 한 그루만 아직 수꽃이 피지 않은 상태다. 그러니까 아마도 지난해에 가운뎃 나무에만 수꽃이 피어 있었던 것은, 그때 다른 나무의 수꽃은 이미 져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제야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가운뎃 나무만 자웅동숙형이라서 수꽃과 암꽃이 함께 늦게 피고, 다른 세 그루는 웅화선숙형이라서 자가수분은 안 되고 가운뎃 나무에게서만 수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가운뎃 나무가 없었더라면 다른 세 그루는 수분을 못했을 것이다. 올가을에는 호두가 익으면 자가수분(근친교배)을 한 가운뎃 나무의 호두 품질을 다른 나무들의 것과 비교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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