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할머니의 봄날 - 장철문

공산(空山) 2021. 2. 21. 20:47

   할머니의 봄날

   장철문

 


   볕 아깝다
   아이고야 고마운 이 볕 아깝다 하시던
   말씀 이제사 조금은 알겠네
   그 귀영탱이나마 조금은 엿보겠네
   없는 가을고추도 내다 널고 싶어하시고
   오줌장군 이고 가
   밭 가생이 호박 몇구덩이 묻으시고
   고랫재 이고 가
   정구지 밭에 뿌리시고
   그예는
   마당에 노는 닭들 몰아 가두시고
   문이란 문은 다 열고
   먹감나무 장롱도
   오동나무 반닫이도 다 열어젖히시고
   옷이란 옷은 마루에
   나무널에 뽕나무 가지에 즐비하게 내다 너시고
   묵은 빨래 처덕처덕 치대
   빨랫줄에 너시고
   그예는
   가마솥에 물 절절 끓여
   코흘리개 손주놈들 쥐어박으며 끌어다가
   까마귀가 아재, 아재! 하고 덤빈다고
   시커먼 손등 탁탁 때려가며
   비트는 등짝 퍽퍽 쳐대며
   겨드랑이 민둥머리 사타구니 옆구리 쇠때 다 벗기시고
   저물녘 쇠죽솥에 불 넣으시던 당신
   당신의 봄볕이
   여기 절 마당에 내렸네
   당신 산소에서 내려다보이는 기슭에는
   가을에 흘린 비닐 쪼가리들 지줏대들 태우는 연기 길게 오르고
   이따금 괭잇날에 돌멩이 부딪는 소리 들리겠네
   당신의 아까운 봄볕이
   여기 절 마당에 내려 저 혼자 마르고 있네

 

         

   -- 『산벚나무의 저녁』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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