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의 시

해변의 묘지 - 폴 발레리

공산(空山) 2020. 12. 10. 21:10

   해변의 묘지 

   폴 발레리(Paul Valery 1871~1945)

 

   사랑하는 혼이여, 불후의 명성 같은 것을 얻으려 하지 말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깊이를 탐구하고자 하라.

   —핀다로스 「델프의 무녀들」

 

 

   비둘기들 노니는 저 고요한 지붕은

   철썩인다. 소나무들 사이에서, 무덤들 사이에서.

   공정한 정오는 여기에서 불길로 바다를 짠다.

   언제나 되살아나는 바다를!

   신들의 정적에 오랜 시선을 보냄은

   오 사유 다음에 찾아드는 보상이여!

 

   섬세한 섬광은 얼마나 순수한 솜씨로 다듬어내는가

   지각할 길 없는 거품의 무수한 금강석을,

   그리고 이 무슨 평화가 수태되려는 듯이 보이는가!

   심연 위에서 태양이 쉴 때,

   영원한 원인이 낳은 순수한 작품들,

   시간은 반짝이고 꿈은 지식이다.

 

   견실한 보고, 미네르바의 단순한 사원,

   고요의 덩어리, 눈에 보이는 저장고,

   솟구쳐 오르는 물, 불꽃의 베일 아래

   그 많은 잠을 네 속에 간직한 눈,

   오 나의 침묵이여!…… 영혼 속의 건축,

   허나 수천의 기와 물결치는 황금 꼭대기, 지붕이여!

 

   단 한 번의 숨결 속에 요약되는 시간의 사원,

   이렇게도 순수한 데까지 올라 나는 내 바다의

   시선에 온통 둘러싸여 익숙해진다.

   또한 신에게 바치는 내 지고의 제물인 양,

   잔잔한 반짝임은 심연 위에

   지극한 경멸을 뿌린다.

 

   과일이 쾌락으로 용해되듯이,

   과일의 형태가 사라지는 입 안에서

   과일의 부재가 더없는 맛으로 바뀌듯이,

   나는 여기 내 미래의 향연을 들이마시고,

   하늘은 노래한다, 소진한 영혼에게,

   웅성거림 높아가는 기슭의 변모를.

 

   아름다운 하늘, 참다운 하늘이여, 보라 변해 가는 나를!

   그토록 큰 교만 뒤에, 그토록 기이한,

   그러나 힘에 넘치는 무위의 나태 뒤에,

   나는 이 빛나는 공간에 몸을 내맡기니,

   죽은 자들의 집 위로 내 그림자가 지나간다

   그 나약한 움직임에 나를 순응시키며.

 

   지고(至高)의 횃불에 몸을 맡긴 영혼이여,

   나는 너를 응시한다, 연민도 없이

   퍼붓는 빛의 찬미할 정의여!

   나는 너를 가장 순수한 자리에 올려놓는다.

   스스로를 응시하라!……그러나 빛을 돌려주는 것은

   맥없는 그림자의 절반을 전제한다.

 

   오 나만을 위하여, 나 홀로, 내 자신 속에,

   마음 곁에, 시의 원천에서,

   공허와 순수한 사건 사이에서, 나는

   기다린다, 내재하는 내 위대함의 반향을,

   항상 미래에 오는 공허함 영혼 속에 울리는

   가혹하고 음울하며 드높은 저수조의 메아리를!

 

   그대는 아는가, 녹음의 가짜 포로여,

   이 여윈 철책을 먹어드는 만(灣)이여,

   내 감겨진 눈 위에 반짝이는 눈부신 비밀이여,

   어떤 육체가 그 나태한 종말로 나를 끌어넣으며

   무슨 이마가 이 백골의 땅에 육체를 끌어당기는가를?

   여기서 하나의 번득임이 나의 부재(不在)들을 생각한다.

 

   닫히고, 신성하고, 물질 없는 불로 가득 찬,

   광명에 바쳐진 대지의 단편,

   불꽃들에 지배되고, 황금과 돌과 침침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곳, 이토록 많은

   대리석이 망령들 위에서 떠는 이곳이 나는 좋아.

   충실한 바다는 여기 내 무덤들 위에 잠든다!

 

   빛나는 암캐여, 우상숭배의 무리를 쫓아내라!

   내가 목자의 미소를 띠고 쓸쓸히

   고요한 무덤의 하얀 양떼를,

   신비로운 양들을 오래도록 방목할 때,

   그들에게서 멀리하라

   사려 깊은 비둘기들을, 헛된 꿈을, 호기심 많은 천사들을!

 

   여기에 이르면, 미래는 태만이다.

   정결한 곤충은 건조함을 긁어대고,

   모든 것은 불타고 흩어져,

   어느 가혹한 본질을 가진 대기 속에 흡수된다

   부재에 도취하는 인생은 드넓게 펼쳐지고

   고초는 감미로워지며, 정신은 맑도다.

 

   감춰진 사자(死者)들은 바야흐로 이 대지 속에 있고,

   대지는 사자들을 덥혀주며 그들의 신비를 말린다.

   저 하늘 높은 곳의 정오, 움직이지 않는 정오는

   자신 속에 스스로를 사유하고 스스로에 동의한다.

   완벽한 두뇌여, 완전한 왕관이여,

   나는 너의 내부의 은밀한 변화이다.

 

   너의 공포를 저지하는 것은 오직 나뿐!

   나의 뉘우침도, 나의 의혹도, 나의 속박도

   모두가 네 거대한 금강석의 결함이어라……

   허나 대리석으로 무겁게 짓눌린 사자들의 밤에,

   나무뿌리에 감긴 몽롱한 사람들은

   이미 서서히 네 편이 되어버렸다.

 

   사자들은 두터운 부재 속에 용해되었고,

   붉은 진흙은 하얀 망령들을 삼켜버렸으며,

   살아가는 천부의 힘은 꽃 속으로 옮겨갔도다!

   어디 있는가 사자들의 그 친밀한 언어들은,

   고유한 기술은, 특이한 영혼들은 어디 있는가?

   눈물이 솟아나는 곳에 유충들이 기어간다.

 

   간지럼 타는 소녀들의 날카로운 외침,

   눈, 이빨, 눈물 젖은 눈시울,

   불장난하는 어여쁜 젖가슴,

   굴복하는 입술에 번들거리는 피,

   마지막 공물, 그것을 지키려는 두 손,

   이 모두 땅 밑으로 들어가고, 유희(遊戱)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대, 위대한 영혼이여, 그대는 바라는가

   육체의 눈에 파도와 황금이 만들어내는,

   이 거짓의 빛깔도 없는 덧없는 꿈을?

   그대 노래하려는가 그대 한줄기 연기로 사라질 때에도?

   가거라! 일체는 사라진다! 내 존재는 구멍 나고,

   성스러운 초조함도 이렇게 죽어간다!

 

   검게 빛나며 깡마른 불멸이여,

   죽음을 어머니의 젖가슴으로 만드는,

   끔찍하게 월계관 쓴 위안부여,

   아름다운 허위 그리고 경건한 책략이여!

   그 누가 모르랴, 그 누가 거절하지 않으랴,

   이 텅 빈 두개골, 이 영원한 웃음을!

 

   땅 밑에 누워 있는 조상들이여, 주인 없는 머리들이여,

   삽으로 퍼 올린 하 많은 흙의 무게에 짓눌려

   우리네 발걸음을 휘청거리게 하는구나.

   참으로 갉아먹는 자, 부인할 길 없는 구더기는

   묘지의 석판 아래 잠자는 당신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구더기들은 생명을 먹고 살며, 나를 떠나지 않는다.

 

   자기에 대한 사랑일까 아니면 미움일까?

   구더기의 감춰진 이빨은 나에게 바짝 가까워서

   그 무슨 이름이라도 어울릴 수 있으리!

   무슨 상관이랴! 구더기는 보고 원하고 꿈꾸고 만진다!

   내 육체가 그의 마음에 들어, 나는 침상에서까지

   이 생물에 소속되어 살아간다!

 

   제논! 잔인한 제논이여! 엘레아의 제논이여!

   그대는 나래 돋친 화살로 나를 꿰뚫었어라

   진동하며 날고 또 날지 않는 날개 돋힌 그 화살로!

   너는 나를 꿰뚫었구나!

   아! 태양이여…… 이 무슨 거북의 그림자인가

   영혼에게는, 큰 걸음으로 달리면서 꼼짝도 않는 아킬레스여!

   아니, 아니다!…… 곧추 일어서라! 연속되는 시대 속에!

   부셔버려라, 내 육체여, 생각에 잠긴 이 형태를!

   마셔라, 내 가슴이여, 태어나는 바람을!

   신선한 기운이 바다에서 솟구쳐 올라

   나에게 내 혼을 되돌려준다…… 오 짜디짠 힘이여!

   파도 속에 달려가 그 영혼을 다시 용솟음치게 하라!

   그렇다! 본디 착란하는 대해(大海)여,

   아롱진 표범의 가죽이여, 태양이 비추이는

   천만가지 환영으로 구멍 뚫린 그리스 병사들의 외투여,

   이 같은 고요 속의 소동에

   반짝이는 네 꼬리를 물어뜯는,

   스스로의 푸른 육체에 취한 절대적인 히드라여!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거대한 대기는 내 책을 펼쳤다 또 다시 닫는다.

   가루가 된 파도는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단배들이 먹이를 찾아다니는 이 잠잠한 지붕을!

   ―『해변의 묘지 Le Cimetière marin』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