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시

오정국「살청」평설 - 이숭원

공산(空山) 2020. 9. 27. 08:29

   살청殺靑

   오정국

 

 

   이 문장은

   팽팽하던 힘을 스스로 파멸시킨 흔적

 

   길바닥에 떨어진

   밧줄이거나

   땡볕 끝에 쏟아진 소낙비 같다

 

   몇 줄 더 뭉갰다면

   어금니로 끊어냈다면

   칼이나 돌, 가 될 뻔했는데

 

   낙뢰 맞은 나무마냥 벌판에 서 있다

   전율과 폐허를 한꺼번에 겪은 듯

 

   아무 일도 아닌 듯

   아무 일도 아니게

 

   우듬지로 올라가는 물길을 끊고

   우듬지에서 내려오는 푸른빛을 삼켜버린

   옹이들, 검은 상처의 혹 덩어리 같은데

 

   나는 언제나

   내게로 되돌아온 발걸음이었다

 

   찬 서리 내리고

   여름 한철 잎사귀를 털어낸

   나무들, 상징의 간격이 뚜렷해졌다 붉은 열매는

   더 붉게, 검은 씨앗은 더 검게

 

 

   옹이를 "검은 상처의 혹덩어리"로 보았는데, 이 눈길에는 생명의 전율을 폐기하고 스스로 파멸의 폐허를 선택한 극단의 정신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다. 생명의 윤기가 사라진 극한의 상태를 연상해본 것이다. 그런 사물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의 의식이 그 방향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팽팽하던 힘을 스스로 파멸시킨" 그런 문장을 구사할 수 있을까? 그런 시를 쓸 수 있을까? 푸른 우듬지를 향해 상승의 의지를 키워 온 시인이라면 그런 극단의 전환을 꿈꾸어 볼 만하다. 그것도 자신을 갱신하고 시를 뒤바꾸는 도약의 몸짓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정국 시인은 의식의 전환을 모색한다. 허식과 가장으로 얼룩진 번지레한 표피, 너저분한 장식의 범벅을 떨쳐내고, 겨울나무에 매달린 붉은 열매, 검은 씨앗 같은 그런 고절孤節의 삶, 고절枯折의 시를 소망하는 것이다. 거간꾼들이 활개치는 개떡 같은 세상에서 그런 꿈을 꾸는 사람은 틀림없는 시인이다. 코로나로 흉흉한 세상에서 펄펄 끓는 머리로 몇 날 몇 밤을 지새워 돈이나 힘과는 전혀 상관없는 폐허의 꿈을 꾸었으니 오정국 시인의 의지에 경의를 표한다.

 

   이숭원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