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길
장석남(1965∼ )
밤길을 걷는다
걸음은 어둠이나 다 가져라
걸음 없이 가고 싶은 데가 있으니
어둠 속 풀잎이나
바람결이나 다 가져라
걸어서 닿을 수 없는 데에 가고 싶으니
유실수들 풋열매 떨어뜨리는 소리
이승의 끝자락을 적신다
그러하다가
새벽달이 뜨면 올올이
풀리는 빛에 걸음을 걸려라
걸려 넘어져라
넘어져 무릎에 철철 피가 넘치고
핏속에 파란 별빛들과 여러 날 시각을 달리해서 뜨던 날
셋방과 가난한 식탁,
옹색한 여관 잠과 마주치는 눈길들의
망초꽃 같은 세미나
꼬부라져 사라졌던 또 다른 길들 피어날 것이다
환하고 축축하게 웃으면서 이곳이군
내가 닿은 곳은 이곳이군
조금은 쓰라리겠지
내가 밤길을 걸어서
새벽이 밝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새 날이 와서 침침하게 앉아
밤길을 걸었던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나는 벙어리가 되어야 하겠지
그것이 다 우리들의 연애였으니
비밀이 없는 시는 단 한 번 읽히고 버려진다. 투명한 것은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제고 장석남의 시를 생각하노라면 이 시인이 비밀을 다루는 데 얼마나 능숙한가, 또 그의 좋은 시들은 얼마나 매력적인 비밀을 조촐하게 품어두고 있는가, 새삼 감탄하게 된다.
"밤길을 걷는다/ 걸음은 어둠이나 다 가져라/ 걸음 없이 가고 싶은 데가 있으니/ 어둠 속 풀잎이나/ 바람결이나 다 가져라"라는 매력적인 방기(放棄)로 시작되는 이 시가 "새 날이 와서 침침하게 앉아/ 밤길을 걸었던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나는 벙어리가 되어야 하겠지/ 그것이 다 우리들의 연애였으니"라는 어여쁜 발뺌으로 끝날 때, 이 결말에서 "벙어리"가 되어버리기를 택하는 시인은, 참으로 능란하게, 비밀을 절반만 풀어놓고는 멈춰버리지 않았는가.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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