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시

장석남「밤길」- 신형철

공산(空山) 2020. 9. 23. 10:37

   밤길

   장석남(1965)

 

   

   밤길을 걷는다
   걸음은 어둠이나 다 가져라
   걸음 없이 가고 싶은 데가 있으니
   어둠 속 풀잎이나
   바람결이나 다 가져라
   걸어서 닿을 수 없는 데에 가고 싶으니
   유실수들 풋열매 떨어뜨리는 소리
   이승의 끝자락을 적신다
   그러하다가
   새벽달이 뜨면 올올이
   풀리는 빛에 걸음을 걸려라
   걸려 넘어져라
   넘어져 무릎에 철철 피가 넘치고
   핏속에 파란 별빛들과 여러 날 시각을 달리해서 뜨던 날
   셋방과 가난한 식탁,
   옹색한 여관 잠과 마주치는 눈길들의
   망초꽃 같은 세미나
   꼬부라져 사라졌던 또 다른 길들 피어날 것이다
   환하고 축축하게 웃으면서 이곳이군
   내가 닿은 곳은 이곳이군
   조금은 쓰라리겠지
   내가 밤길을 걸어서
   새벽이 밝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새 날이 와서 침침하게 앉아
   밤길을 걸었던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나는 벙어리가 되어야 하겠지
   그것이 다 우리들의 연애였으니

 

 

   비밀이 없는 시는 단 한 번 읽히고 버려진다. 투명한 것은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제고 장석남의 시를 생각하노라면 이 시인이 비밀을 다루는 데 얼마나 능숙한가, 또 그의 좋은 시들은 얼마나 매력적인 비밀을 조촐하게 품어두고 있는가, 새삼 감탄하게 된다.
   "밤길을 걷는다/ 걸음은 어둠이나 다 가져라/ 걸음 없이 가고 싶은 데가 있으니/ 어둠 속 풀잎이나/ 바람결이나 다 가져라"라는 매력적인 방기(放棄)로 시작되는 이 시가 "새 날이 와서 침침하게 앉아/ 밤길을 걸었던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나는 벙어리가 되어야 하겠지/ 그것이 다 우리들의 연애였으니"라는 어여쁜 발뺌으로 끝날 때, 이 결말에서 "벙어리"가 되어버리기를 택하는 시인은, 참으로 능란하게, 비밀을 절반만 풀어놓고는 멈춰버리지 않았는가.

 

   신형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