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폭설 - 류 근

공산(空山) 2020. 3. 5. 17:05

   폭설

   류 근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
   이제는 기억조차 먼 빛으로 발이 묶인다
   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
   결별의 예감 한 잎
   살아서 바라보지 못할 푸른 눈시울
   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
   내 이름 위에
   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
   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상처적 체질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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