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1
신대철
아직은 겨울과 봄 사이군요, 눈 맑아지는 수분재에 들르신 김에 잔설 부드러운 신무산에 올라 금강 발원지 뜬봉샘을 들여다보시죠, 샘물 움트는 대로 밑바닥을 휘휘 휘감아 도는 사백일킬로 긴 강줄기 한 지류에 뿌연 바람만이 모랫벌에 떠오릅니다, 정여립도 전봉준도 모르는, 아 그렇군요, 그 자신의 일조차 잘 모르는 젊은 남녀가 잠시 뜬소문처럼 머물렀던 곳입니다, 육이오 때 북에서 위생병으로, 간호원으로 끌려나와 남진하던 중 서로 사랑의 포로가 되자 대열에서 빠져나와 은신했던 곳입니다, 젊은 남녀는 뙤약볕 속에 찢어진 텐트 하나 치고 낮에는 숨어서 훗날 노모와 함께 평강고원 초록빛 구릉에 옥수수잎 넘실거리는 긴 밭고랑 풀 매는 꿈을 꾸고 저녁에는 될수록 멀디먼 동네를 돌고 돌아 구걸했습니다, 날이 지나면서 꼴베는 동네 일도 거들어 주민들 얼굴에 얼굴을 익혔습니다, 푸른 강 푸른 하늘이 짙푸르러지는 곳에서 동네 아이들과 헤엄치며 슬슬 다가오는 먹구름 떼를 시커먼 송사리떼 속으로 줄줄이 몰아붙이고 한 옥타브 높아가는 종달새 노래에 실어 송장메뚜기도 높이 날렸습니다, 그날 밤이던가요, 젊은 남녀가 아이들의 꿈결 속에서 송장메뚜기를 끝없이 날리고 있을 동안 낙동강 전투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막 돌아온 마을 청년이 어둠 속을 낮은 포복으로 기어갔습니다, 탕!, 탕!, 탕, 마지막 총성은 끝내 들리지 않았습니다.
금강은 그 총구멍 속을 유유히 흘러흘러 넓은 바다로 나갑니다, 파도가 없어도 울렁이는 황해로요.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문학과지성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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