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일기

겨울이면 떠오르는 추억 하나

공산(空山) 2019. 12. 12. 12:51

12월도 중순으로 접어들어 날씨가 겨울다워졌다. 텃밭에 나갈 때나 걷기 운동을 할 때 지금까지는 맥고모자처럼 생긴 챙이 넓은 여름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이제 날씨가 추워지고 보니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등산복 가게에 들러 방한모자를 하나 샀다. 귀덮개를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고 가볍고 포근한 촉감의 소재로 만들어진 멋진 모자다. 겨울 모자까지 쓰고 보니 떠오르는 추억이 또 하나 있다. 부모님께 걱정을 많이 끼쳐 드린 아픈 사건이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그것은 따스하고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국민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나 보다. 두 살 위인 사촌형과 함께 동네 앞의 얼어붙은 논바닥에서 썰매를 타고 놀다가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바짓가랑이를 적셨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돌아서서 불을 쬐며 말리던 바짓가랑이에 그만 불이 붙었다. 손으로 불을 끄려고 털었지만 불은 꺼지지 않았다. 사촌형이 바지를 빨리 벗으라고 외쳤고, 바지를 벗고 나서야 겨우 불을 끌 수 있었다. 타다 만 바지를 돌돌 말아서 옆구리에 끼고 썰매는 어깨에 메고 내복 바람으로 집에 갔다. 엄마는 불 냄새가 확 나는 내 고리뗑(코르덴) 바지를 펴 보고는 깜짝 놀라서 내복을 벗기셨다. 왼쪽 다리의 무명 내복 가랑이가 조금 노릇하게 눌었을 뿐인데, 벌써 장딴지와 허벅지 뒤쪽에 물집이 생기기 시작했다. 엄마는 어린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만도 천만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셨을 것이다.

 

첩첩산중이라 먼 도시에 있는 병원이나 약국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한 엄마는 민간요법에 따라 개울의 물이끼를 걷어와 다리의 물집 위에 바르고 김치의 배추 이파리를 씻어서 붙이기를 반복하셨다. 예니레가 지나도 덴 자리가 낫기는커녕 덧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처가 감염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던 것 같다. 점점 깊게 곪아가는 상처가 뒤늦게 낳은 하나뿐인 자식을 잘못되게 할까 봐 부모님은 안절부절못하셨을 것이다.

 

나는 거적데기와 이불에 싸인 채 아버지가 운전(?)하시는 리어카에 실려 새벽에 병원으로 갔다. 병원은 내리막길로 시오리쯤 떨어진 마을의 허름한 주택의 문간방이었는데, 그 집 담장 위엔 공산가축병원이라고 페인트로 쓰인 간판이 걸려 있었다. 아재(아저씨)뻘 되는 먼 친척이 운영하는 동물병원이었다. 병원엔 간호원이나 보조원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별다른 시설이나 장치 같은 것도 없었다. 크고 작은 몇 개의 주사기와 거즈와 반창고와 핀셋이 담긴 쟁반, 주사기를 끓이는 냄비가 전부였던 것 같다. 병원에선 부모님의 다급한 얘기를 듣고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나를 싣고 오라고 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나는 그 집 온돌방에 보름 동안 입원하여 치료받았다. 다행히 곪았던 부위에 새살이 돋아났고 큰 흉터를 남기며 상처는 아물었다. 그동안 페니실린 주사를 얼마나 많이 맞았던지 퇴원했을 땐 양쪽 볼기가 주사 바늘 자국으로 빈 곳이 없었다.

 

아마도 그 수의사 아재는 큰 개나 송아지에게 쓰는 분량의 주사약을 내게도 썼을 것이다. 가축병원에 입원했던 사람이 세상에 나 말고 또 있는지 모르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치료하는 데엔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부모님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때는 소도 사람이나 크게 다를 바 없는 한 식구였으니까. 그래서 부모님은 날마다 조석으로 가마솥에 쇠죽을 끓여 소에게 따뜻하게 먹이셨고, 외양간엔 늘 포근한 짚이나 건초를 깔아 주셨으며, ‘개는 주둥이가 뜨시면(따뜻하면) 자고 소는 등이 뜨세야 잘 잔다며 겨울이면 소 등에 두툼한 삼정(덕석)을 덮어 주곤 하셨으니까. 그리고 아버지의 말을 잘 알아들으며 논을 갈고 짐을 나르고 새끼를 잘 낳아 주는 소가 우리집 상일꾼이자 복덩이였고, 방금 쥐를 잡아먹은 고양이가 내 이불 속으로 들어와 함께 자던 그런 시절이기도 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해볼 때도 있다. 내가 지금 우리집 강아지를 형제라고 여길 만큼 동물을 유난히 좋아하는 것도 둘째가 수의사가 된 것도 그때 가축병원에 입원한 업보 때문이 아닐까. 

 

(이참에 나의 가장 오래된 사진을 몇 장 올려 둔다. 맨 아래 사진은 막내 이모와 함께 찍은 것이다.)

 

1962년 정월 초사흘(양력 2월 7일), 마을 앞에서
엄마 옆으로 큰엄마(伯母)와 사촌형님(仲父의 아들)
이 사진을 찍기 전 마을 아이들의 단체 촬영이 있었는데 거기에 합류하지 못한 나는 잔뜩 삐진 상태였다는 엄마의 말씀이 생각난다.
1960년경 막내 이모와 함께 사진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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