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을 만큼 먹으면 사람은 아득한 옛날을 한없이 그리워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다가올 앞날에 있을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다리며 사는 것이 또한 사람인 것 같다.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탓하다가도 겨울이면 봄이 와서 어서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여름이면 가을이 빨리 와서 열매가 익고 단풍이 곱게 들기를 기다린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겨울에 접어들자 펑펑 눈이 쏟아지기를 기다리다가, 이렇게 겨울이 내내 따뜻해서 눈 구경은 글렀구나 싶으니 이젠 봄비를 기다리고 있다. 지난주엔 오랜만에 텃밭에 가서 몇 그루 안 되는 복숭아나무와 매화나무의 가지치기를 내가 하는 동안, 아내는 마늘밭에 씌워진 투명 비닐에 구멍을 뚫어 손가락 길이 만큼씩 자란 파란 마늘 싹을 비닐 밖으로 꺼내 주었다. 몇 주 전엔 아파트 부근의 공원에서 붉게 익은 마가목 씨앗과 남천 씨앗을 한 줌씩 받아 냉장고에 넣어 저온처리를 해 두었었는데, 어젠 그것을 산가 마당 한쪽에다 파종했다. 마가목 열매는 과육이 발아를 방해한다고 해서 과육을 벗겼고, 남천 씨앗은 오히려 겉껍질이 발아를 촉진한다고 해서 그냥 심었다. 그것들이 싹을 틔울지 안 틔울지, 틔운다면 언제 틔울지는 모르지만 나는 기다려 볼 것이다.
한 달쯤 전 뒷산 오솔길을 산책할 때였다. 참나무 숲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다가 쌓인 낙엽 위에 앉아 있는 낯선 새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비둘기보다는 조금 작고 개똥지빠귀보다는 컸다. 온라인에 사진을 올려 새의 이름을 물었더니 친절하게도 이름뿐만 아니라 울음소리 파일까지 답변으로 돌아왔다. 호랑지빠귀라는 새라고 했는데, 울음소리는 내가 봄마다 많이 들어서 귀에 익은 소리였다. 주로 어두운 새벽에 잎이 무성한 나무 위에서 울어 새의 모습은 한번도 볼 수 없었지만, 아마도 수컷인 듯한 새가 비교적 큰 소리로 '호이~' 울고 나면 암컷인 듯한 새가 맞은편 나무에서 들릴락 말락 아주 작은 소리로 '삐이~'하고 화답하던 것이었다. 그토록 청아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 새였다니 반가웠다. 여름철새라고 했으나 한겨울에 거기에서 나랑 마주쳤던 것이다. 사월이나 오월쯤엔 그 새를 비롯한 온갖 새들의 노래를 다시 듣게 될 것이다.
그런데, 계절이 나무의 몸에 나이테를 새기듯이 기다림에도 종류가 있어 그것이 우리의 삶에 결을 새기는 것 같다. 일상 속에서 즐거움을 주는 그런 따스한 기다림이 있는가 하면, 우리를 불안하고 초조하게 하거나 애태우게 하는 혹독한 기다림도 있는 것이다. 예컨대 큰 시험을 치른 사람이 결과 발표를 기다린다거나 항암 치료를 간신히 마친 사람이 3개월이나 6개월 후에 정기 검사의 결과를 기다리는 경우 같은 것 말이다. 내가 근년에 와서 무엇보다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꽉 찬 혼기에 이른 두 아들의 혼사다. 하루빨리 며느리를 맞이하고 손자들이 태어나 자라는 모습도 보고 싶지만, 저희들이 알아서 하겠다는 대답만 되풀이해 들으며 세월을 보내고 있어야 하니 난감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그 기다림들이 따스하건 혹독하건 훗날엔 우리의 삶에 향기로운 나이테로 무늬로 남게 될 것임을 나는 믿는다.
오늘도 산길을 걷다 보니 생강나무 꽃망울이 제법 부풀어 있었다. 옆에는 '쉬나무'라는 낯선 이름의 명찰을 단 낙엽교목도 한 그루 서 있었다. 계절을 기다리며 나는 그 나무의 잎과 꽃은 어떤 모습으로 피어나고 열매는 어떻게 익어가는지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별일 없으면 다음달쯤엔 내가 보아 둔 접이식 자전거도 한 대 주문하려고 한다. 그 자전거는 여느 접이식 자전거보다 바퀴의 지름이 크면서도 독창적인 방식으로 접게 되어 있어서 부피가 적으며, 티타늄으로 만들어진 프레임이라 가볍고도 튼튼하고 내구성이 좋아 보였다. 해외 주문을 하고 여기까지 배달이 되려면 많은 날들을 또 기다려야 하겠지만, 자동차나 열차나 배에 그것을 싣고 다니며 호젓하고도 아름다운 길들을 천천히 둘러보는 것이 나의 또 하나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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