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여행 - 이진명

공산(空山) 2019. 9. 29. 16:07

   여행

   이진명 (1955~ )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하는가

   보라, 여행은 안 돌아오는 것이다

   첫 여자도 첫 키스도 첫 슬픔도 모두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들은 안 돌아오는 여행을 간 것이다

   얼마나 눈부신가

   안 돌아오는 것들

   다시는 안 돌아오는 한 번 똑딱 한 그날의 부엉이 눈 속의 시계점처럼

   돌아오지 않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다

 

   그때는 몰랐다

   안 돌아오는 햇빛, 첫서리 뿌린 날의 새벽 새떼

   그래서 슬픔과 분노의  흔들림이 뭉친 군단이 유리창을 터뜨리고

   벗은 산등성을 휘돌며 눈발을 흩뿌리던 그것이

   흔들리는 자의 빛줄기인 줄은

   없었다 그 이후로

   책상도 의자도 걸어논 외투도

   계단도 계단 구석에 세워둔 우산도

   저녁 불빛을 단 차창도 여행을 가서 안 돌아오고

   없었다, 없었다 흔들림이

 

   흔들리지 못하던 많은 날짜들을 스쳐서

   그 날짜들의 어두운 경험과

   홀로 여닫기던 말의 문마다 못을 치고

   이제 여행을 떠나려 한다

   흔들리지 못하던 나날들의 가슴에 금을 그으면

   놀라워라, 그대도 한곳이 찢어지며

   시계점처럼 탱 탱 탱 피가 흐른다

 

   보고 싶은 만큼, 부르고 싶은 만큼

   걷고 걷고 또 걷고 싶은 만큼

   흔들림의 큰 소리 넓은 땅

   그곳으로 여행 가려는 나는

   때로 가슴이 모자라 충돌의 어지러움과

   대가지 못한 시간에 시달릴지라도

   멍텅구리 빈 소리의 시계추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틀린 말을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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