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일기

포도

공산(空山) 2019. 6. 29. 11:07

포도에 대해서라면 할 이야기가 참 많다. 계단식 논에 벼농사를 지으시던 부모님이 그 논에 포도나무(캠벨어리)를 심으신 건 1980년대 초반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60대로 접어드는 연세였고 나는 20대 후반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휴일이 오면 나와 아내는 부모님을 도왔고, 포도나무에 농약을 치거나 수확한 포도를 공판장에 싣고 가는 건 내가 도맡은 일이었다.

 

20여년 짓던 포도농사를 그만두게 된 것은 2000년대 초반이었다. 자급자족에 그치던 벼농사에 비하여 포도는 돈을 만지게 해 주었으나 세월이 지나도 포도값은 제자리걸음이었고, 게다가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무역협정인 한-칠레 FTA가 체결되어 포도값이 폭락할 우려가 생기자 정부에서 약간의 보조금을 주어 포도 농가의 폐업을 독려했던 것이다. 중장비를 동원하여 모든 포도나무를 뽑아 버리고 경지정리를 했지만, 부모님은 이미 연로하셨고, 나의 직장생활은 끝나지 않았으며 농사에 대한 의욕도 잃었었다. 문전옥답이 묵혀져 황폐화했던 것이다.

 

포도에 얽힌 애환이야 많았지만 이제 와서 그것을 다 이야기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가 오늘 자판 앞에 앉은 것은 '지금 여기' 푸른 포도알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한 그루의 젊은 포도나무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퇴직을 하던 해인 2015년 가을이었다. 시지(時至)에서 동료들과 회식을 하고 나오다가 식당 주인한테서 꺾꽂이용으로 잘라놓은 포도 가지를 하나 얻었는데, 품종은 거봉이라고 했다. 그것을 산가 마당에 심고 쇠말목을 세워 좌우로 길고 높게 가지를 뻗쳐 키웠다. 지난해엔 꽃만 몇송이 피었다가 그냥 다 져 버렸고, 올해는 많은 꽃이 피어  첫 결실도 하게 된 것이다.

 

거봉에 대하여 검색해 보니 키우기가 여간 까다로은 품종이 아니었다. 거름과 토양, 기후가 맞지 않으면 화관이 열리지 않아 결실을 못하는 '꽃떨이'가 심하고, 결실한 후에는 알솎기와 송이다듬기를 철저히 해야 하며, 흑자색으로 잘 익게 하기 위해선 햇가지 두 개마다 한 송이씩만 달아야 하고, 잎의 갯수도 한 가지에 25장은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씨 없는 포도로 만들기 위해선 꽃이 피었을 때 약품처리를 해야 한다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과연 꽃떨이가 심하여 포도알이 드문드문 달렸다. 축 늘어진 성긴 포도 송이가 처음엔 볼품없었는데 알이 굵어지니 점점 어울려 간다. 한 송이에 3,40개밖에 달리지 않아서(70개가 적당) 알솎기는 필요없게 되었다. 포도알은 갯수가 적은 만큼 굵기는 커질 것이고 어쩌면 이 여름을 지나는 동안 꿩알만큼이나 커질지도 모를 일이다. 하루가 다르게 굵어지는 포도알이 궁금하고 보고 싶어 요즘엔 산가에 더 자주 오곤 한다.

 

 

 

8.11. 포도가 익기 시작하여 새가 와 따먹자 아내가 포도송이에 양파망을 씌웠다.
2020. 6. 29. 거봉 포도에 봉지를 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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