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귀(不歸)
허은실
나는 어느 묘비에서 빌려온 이름일까
빈집에서 당신의 외투를 깔고
손 베개 괴고 당신을 보네
진흙이 묻은 당신의
무거운 신발을
꿈에는 또 파랗게 질린 꽃들이 피고
흐느낌이 몸 밖으로 흘러
당신은 잠에서 깨네
날으는 새처럼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낯선 어둠을 보네
울 수 없어 노래하는 밤이었네
금 간 술잔
깨진 자리에
혀를 대어 보네 당신은
모래도시 이방의 거리에서
音처럼 태어나
音으로 사라지는
연 없음의 연으로 우리
또다시 정처 없을 것이나
빈 봄에 목련이 피면
당신은 몰래
울겠지
새를 묻은 자리에
새가 날아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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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의 죽음은 우리를 쓸쓸하게 한다. 허은실의 「불귀」는 그 조시(弔詩)의 성격을 띠고 있다. ‘시인의 말’에 허수경의 죽음이 언급되어 있어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원시에는 이 시가 조시라는 것이 밝혀져 있지 않다. 시의 곳곳에 허수경의 그림자가 서려 있어서 굳이 밝힐 필요가 없었는지 모르겠다.
빈집에서 당신의 외투를 깔고
손 베개 괴고 당신을 보네
진흙이 묻은 당신의
무거운 신발을
꿈에는 또 파랗게 질린 꽃들이 피고
흐느낌이 몸 밖으로 흘러
당신은 잠에서 깨네
‘당신’은 물론 허수경을 지시한다. 고인의 체취가 묻어 있는 사물들이 내레이터를 감싸고 있다. 내레이터인 ‘나’는 ‘당신’을 본다. 그리고 ‘꿈’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잠에서 깨는 것은 ‘당신’이다. ‘꿈’이 ‘당신’을 불러낸 것이다. 그 다음 구절의 “낯선 어둠을 보네”의 주어도 ‘당신’으로 보아야 할 것이지만, 이 구절에는 주어가 없다. “손 베개 괴고 당신을 보네”의 ‘보다’는 내레이터 ‘나’의 행위이고, “낯선 어둠을 보네”의 ‘보다’는 ‘당신’의 행위로 여겨진다. 그러나 두 번째의 ‘보다’는 앞의 ‘보다’의 영향 아래 있다. 두 번째 ‘보다’는 ‘나’이면서 ‘당신’인 자의 행위로 보아야 한다. 이 섞임의 교묘함이 이 시의 높이를 보여준다.
‘당신’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금 간 술잔”은 ‘죽음’을 나타낸다. ‘당신’의 부재는 ‘빈집’이나 ‘빈 봄’에서의 ‘빈(empty)’이라는 수식어에 의해 강조된다.
빈 봄에 목련이 피면
당신은 몰래
울겠지
새를 묻은 자리에
새가 날아오면
“낯선 어둠”을 보는 주체는 ‘나’이면서 ‘당신’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날으는 새”라는 보조관념에 의해 수식된다. 그 보조관념의 ‘새’가 마지막 연에 다시 출현한다. 마지막 연에서 ‘새’는 다시 ‘묻힌’ 새와 “새를 묻은 자리”에 ‘날아오는’ 새로 분할된다. ‘묻힌 새’는 ‘당신’인 것이 분명하지만, ‘날아오는 새’는 어떠한가. 그것은 여전히 ‘당신’이면서 ‘나’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빈 봄”에 잠시 화려하게 피었다가 지는 “목련”이 ‘당신’을 울리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당신’의 분신인 것처럼. ‘당신’은 되돌아온다. 그러나 더 이상 예전의 그 모습으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어떻게 우리는 되돌아오는 ‘당신’을 알아볼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장이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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