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2019.1.9
우리에게 가능한 시 : 2019 신춘문예 시 리뷰
신용목
신춘문예라고 해서 꼭 ‘다름’이나 ‘새로움’ 같은 말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그것이야말로 기왕을 기준으로 하여 그 나머지를 승인하려는 전유의 욕망일 수도 있으니. 내가 신춘문예 당선작을 읽으며 느낀 답답함은 그렇게 거창한 데 있는 게 아니다. 쓰는 이도 읽는 이도 자신이 ‘아는 것’ 속에 시를 가둬놓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 그게 사건이든 풍경이든 아니면 삶 자체든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붙들려 우리는 시를 쓰고 또 읽는 것 아닌가. 그러니 시의 매혹에 대해서라면 의미로 치환되는 명징한 논거보다는 ‘그저 드러날 뿐이며 그로써 신비를 갖는다’(비트겐슈타인)는 말이 좀더 유효할 것이다. 어떤 순간의 감정이나 예감이 끝내 말해질 수 없는 채로 드러나는 것. 다행히 몇몇 시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어 기뻤다.
1
생각건대, 최근의 어떤 시들이 일상적인 언어를 구사하면서 애써 줄이거나 감추려 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일상어가 이미 감춰진 상태 또는 줄여진 상태에서 발화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현대인들이 맺는 관계의 양상 때문일 텐데, 「엄마는 저렇게 걸어오지 않는다」(노혜진, 한국일보)가 그렇다. 부분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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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은 어때요?” 하면 엄마가 떠오릅니다 저의 벗입니다 같은 원 안의 피자를 먹고 다른 날 같은 구두를 신습니다 즐거운 시간은 떼어 두었다가 서로에게 선물합니다 기억이 풍성해지면 쪼그라드는 현재들 진짜 벗들은 기억의 원 안에 있어요
항공사가 부도 직전이라는 소문이 돕니다 엄마는 키위를 반으로 자릅니다 포도를 씻고 귤을 깝니다 키위의 씨만큼 늘어나는 의혹들 과일 열한 통을 들고 출근합니다 회사일까 집단일까 궁금합니다 급여가 들어오지 않았으니 과일은 엄마에게 달아 두는 외상입니다
조금만 당돌해집시다 구호가 필요합니다 동료는 잘난 척을 하다 동료들에게 혼쭐이 났습니다 저도 잘난 척의 기질이 있습니다 그러니 많이는 말고 조금만요
늙어도 우리는 무섭습니다 엄마는 겁보입니다 매일 밤이 오다니 엄마는 차를 몰고 저를 데리러 옵니다 보조석의 방석은 꽃무늬입니다 여성이 되기 위해 꽃을 사들이고 무늬를 사들입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우아합니다 스무 살에 꾸었던 꿈의 일부를 이룬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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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불규칙한 나열과 낭비되는 듯한 구절들이 많아 언어의 쓰임이 경제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또 이 시에서 ‘부도 직전에 놓인 항공사 직원의 투쟁과 그 일상의 이면’을 읽어낸다고 해도 틀렸다고 말할 이유는 없다. 비록 적대와 모순의 실체를 확인하거나 저항의 동력을 확보할 수는 없지만, 그에 내던져진 개인의 내면을 아프게 되짚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 시는 그렇게 해석되기 이전의 무언가 때문에 쓰였을 것이다. 담담하게 기술되는 사건과 관계들, 이를테면 녹록치 않은 사회생활 중 (인용되지 않은 부분에 드러나듯이) 틈틈이 글을 쓰는 화자의 일상적 풍경이 지속적으로 ‘엄마’와 연결될 때, 우리는 나지막한 이야기의 배후에 고여 있는 서글픔 또는 절박함에 감염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어 중 어느 하나가 그 일을 한 것이 아니다. 시어로 표현되지 않은 정념이 읽는 이의 마음에 전해졌던 것.
그렇다면 이 시의 시어들이 한 일은 무엇인가. 그런 독법으로 이 시에서 무엇을 건졌는가. 글쎄, 시어들은 그것을 읽는 시간을 흘러가게 만들었을 뿐이고, 나는 이 시를 읽는 ‘시간’을 가졌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때로 그 순간의 감응만으로도 우리는 충만해질 수 있다. 그 순간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세계의 가능성이라고 말하면 지나치게 느껴지려나.
고백체의 담담한 발화 방식은 최근 시들의 공통 감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시어가 가진 전언의 깊이보다는 시어가 펼쳐놓은 순간의 파동에 집중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시들이 그 반대에 골몰한다. 「당신의 당신」(문혜연, 조선일보)은 “새들의 울음은 그들의 이름이 됩니다/우리는, 어떤 이름을 갖게 될까요”로 시작된다. 그리고 첫 구절이 생산하는 짐작 가능한 의미망을 벗어나지 않는다. 새와 사람, 그리고 이름 속에 얽혀 있는 관계에 관한 감각도 그렇거니와 자신의 인식이 시의 의미를 가두고 마는 것이다. 이 시가 아름답다면 “그림자도 생기지 않을 물에는/새의 밑면만 지나갑니다/깊이 가라앉은 바닥, 그곳에서 우리는/떠오를 수 없는 낮은 음, 낮은 울음”과 같은 구절이 거느리는 (의미가 아니라) 문득 서성이게 만드는 ‘이미지’ 덕분일 것이다.
2
각기 다른 층위의 이야기들이 겹쳐져 있는 시가 있다. 화자가 응시하는 대상물이 있고 화자가 영위하는 일상이 있다. 거기에 신화나 설화 또는 상상된 무언가가 개입된다. 이 두세개의 층위가 논리적인 필연성으로 묶여 있는 시가 있고 아무런 필연성도 느낄 수 없는 시가 있다. 대개 각각의 층위들이 논리적으로 튼튼하게 연결된 시들일수록 시인의 의도가 깊게 관여하여 언어적 질감을 해치곤 한다. 아무런 필연성도 찾을 수 없다면 당연히 좋은 시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어떤 필연성도 찾을 수 없지만 각각의 층위가 알 수 없는 연관 속에 배치되고 있다고 느껴지는 시가 있다. 경험의 실감보다는 감각적 배치를 통해 세계를 구축하는 것. 이런 방법론은 최근에 비교적 흔하게 쓰이는데, 다음은 「물고기의 잠」(설하한, 한국경제)의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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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그치지 않는다 딸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오빠를 땅에 묻고 죽는다 죽은 반역자와 왕좌에 앉은 사람은 하나의 트랙을 번갈아 달리는 열차들 비가 무덤의 흙을 다진다 나는 슬프지 않으면 두려워진다 우리가 신의 손등 위에 있는 공깃돌이라면 어쩌지? 끝도 없이 떨어지는 꿈을 꾼다
나는 하루에 세 번 약을 먹듯 떠올린다
죽은 늙은이의 볼에 비늘처럼 일어난 피부, 그것을 적셔주는 빗물 같은 것, 가축의 숨통, 물고기의
깊은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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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하지 않은 부분까지 포함하여) 이 시에 등장하는 물고기와 오이디푸스와 자신은 ‘사건’의 필연성 속에 놓여 있지 않다. ‘두려움’을 둘러싼 ‘비의’의 필연성이라면 어떨까. “우리가 신의 손등 위에 있는 공깃돌이라면 어쩌지?”라고 말하는, 운명에 대한 두려움. 그 두려움은 “나는 슬프지 않으면 두려워진다”는 진술에서 더 선명해진다. 다시 슬퍼지는 것. 추락의 순간에 대한 공포. 그러나 화자는 이미 슬픔 속에 놓여 있지 않은가. 반복되는 추락의 꿈 때문에 이 공포에는 한겹이 더 만져진다.
슬픔이 끝날 것 같지 않은 두려움과 슬픔이 끝날 것 같은 두려움이 그것이다. 왜 슬픔이 끝날 것 같아 두려운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슬픔 다음에 기쁨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이다. 슬픔조차 용납되지 않는 운명의 가혹한 상태라고 할까. 차라리 익숙한 고통에 머물고 싶은, 그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을 나는 조금 알 것 같다. 그것이 “하루에 세 번 약을 먹듯” 감지되는 무기력의 이유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 이 시를 닫는 마지막 3행은 단정적인 진술이 아니라 ‘노인의 피부와 빗물과 가축의 숨과 물고기의 잠’으로 이어진 이미지, 곧 예비된 감정의 대리물들로 남겨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이미지’들을 다른 이미지로 대체하며 독자들은 자신만의 두려움과 대면하게 된다.
전통적이라고 할 만큼 단정한 언어를 쓰지만, 「마지막 할머니와 아무르 강가에서」(조온윤, 문화일보) 역시 개연성 없는 층위를 자연스럽게 겹쳐놓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방법론을 가졌다. 할머니와 물고기와 호랑이가 하나의 시선으로 통일되는데 그러한 교차와 중복은 급기야 ‘세계의 공감각’에까지 이른다. 이 ‘세계의 공감각’은 마치 여러개의 광선을 쏘아 만드는 4차원의 홀로그램처럼, 시간과 공간, 인간과 짐승을 넘나들며 이 세계의 알 수 없는 심연들을 무리 없이 비춘다. 하지만 비출 뿐, 해부하려 들지 않는다.
한편, 트렌디한 언어를 구사한다고 생각되는 시에서 느껴지는 피로감도 없지 않았다. 일상적 사물을 응시하며 존재론에 닿고자 한 「랜덤 박스」(류휘석, 서울신문)는 “반성이 시작된 집은 무덤 냄새가 나는 요람 같아요”처럼 시간의 전후를 성찰의 순간으로 결합시키는 재능을 보여주었지만, 전반적으로 굳어버린 반죽을 주무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캉캉」(최인호, 동아일보) 역시 경쾌한 리듬감 속에 일상과 섭리를 겹쳐놓는 솜씨가 돋보였지만, 어조에 의존하려는 의도가 쉽게 드러나고 여성적 징후들을 소재로 대상화하는 데 대한 점검이 더 필요해 보였다.
3
「너무 작은 숫자」(성다영, 경향신문)는 앞서 말한 특징들이 미묘하게 결합된 사례이다. 그것을 ‘감각의 필연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길지만 전문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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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에 커다란 돌 하나가 있다 이 풍경은 낯설다 도로에 돌무더기가 있다 이 풍경은 이해된다
그린벨트로 묶인 산속을 걷는다
끝으로 도달하며 계속해서 갈라지는 나뭇가지
모든 것에는 규칙이 있다 예외가 있다면 더 많은 표본이 필요할 뿐이다 그렇게 말하고 공학자가 계산기를 두드린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렇기에 더 중요합니다 너무 작은 숫자에 더 작은 숫자를 더한다
사라져가는 모든 것은 비유다
망할 것이다
한여름 껴안고 걸어가는 연인을 본다 정말 사랑하나봐 네가 말했고 나는 그들이 불행해 보인다는 말 대신 정말 덥겠다 이제 그만 더웠으면 좋겠어 여기까지 말하면 너는 웃지
그런 예측은 쉽다
다영 씨가 웃는다
역사는 뇌사상태에 빠진 몸과 닮았다
나무 컵 받침이 컵에 달라붙고 중력이 컵 받침을 떼어낸다
물이 끈적인다 컵의 겉면을 따라 물방울이 아래로 모이는 동안 사람과 사물은 조금씩 낡아간다
조용한 공간에 금이 생긴다
되돌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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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하는 언어의 질감도 그렇거니와 그 언어가 지시하는 내용도 제각각이다. 묘사가 성한가 싶으면 일반론을 들이대고 전언과 독백, 정적이고 동적인 이미지가 뒤섞여 있다. 정작 이상한 것은, 이 시를 따라 읽다 보면 그런 낙차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는 바, 이제 세계는 단일한 과정으로 파악되지 않고 각자의 체험 속에 감각될 뿐이다. 그러므로, 시에서 세계는 행간 사이에 힌트만 남겨놓은 채 뒤로 물러나 있다. 언어가 가진 의미는 행간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데, 세계는 바로 그 의미가 떠난 자리에 남아 있는 언어의 순수한 힘에 의해 추적된다. 이 시가 문장마다 각기 다른 언어적 질감을 가졌음에도 부대낌 없이 우리를 이끄는 것은 바로 그 힘 때문이다. 문제는 그 힘이 말해지지 않고 드러날 뿐이라는 데 있다. ‘예측’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예감’ 같은 것이니까.
시는 ‘돌 하나’와 ‘돌무더기’를 통해 파멸의 전경과 그것을 수용하는 역설적인 세계인식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그리고 도심 한쪽에 남아 있을 ‘그린벨트’와 더 작게 ‘갈라지는 나뭇가지’, ‘예외’를 ‘규칙’으로 바꾸며 소실점을 향해가는 ‘숫자’들, 궁극에는 물컵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사람과의 관계까지, 사라짐의 정조 속에 배치한다. 그 모든 순간을 ‘뇌사 상태의 몸’을 가진 ‘마음의 역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실 나는 실연이 만드는 풍경과 마음의 굴절을 읽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이 시가 거느린 예감의 특별함에 비하면 말이다. 어떤 것은 다른 것으로 치환되지 않기에 절대적인데, 예감도 마찬가지다. 예감은 결과에 종사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 순간으로 남아 있는 것. (심사평에도 썼지만) 이 시를 통해 사라짐의 의미를 깨달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시를 읽으며 우리는 상실의 필연적 과정을 함께 겪는다. 그 ‘순간’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것이 ‘연대’가 아닐 리 없다.
심사평을 따라 읽으며 느낀 점은 시의 의미를 언어의 논리로 완성하는 유비적인 방법론과 그로부터 최대한 멀어진 자리에서 시의 의미를 언어의 감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방법론 사이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심사평은 없었지만) 세계가 명확한 대상으로 포착되지 않는 상황에서 세계 전복의 노력이나 의미 주체를 뒤흔들 만한 언어 실험이 약화되었다고 한탄하는 것이 타당한지 생각해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이런 심사평은 많았는데) 하물며 여전히 내가 아는 곳에 세계가 있다고 믿으며 단일하게 그것을 포착하려는 시선에 대해서는 안타까울 뿐이다. 그것이 「스테이플러 씨」(이규정, 국제신문), 「거미」(권영하, 부산일보) 등등의 당선작이 사람과 사물을 향한 건강한 직정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독후감을 남기지 못하는 이유이다.
신용목 / 시인
2019.1.9. ⓒ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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