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1926~2006)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는 이제껏
언제가 제일 행복했어?
열네 살의 어느 날
나는 문득 물었다
할머니가 참말로 쓸쓸해 보이던 날
지나온 세월을 이리저리 더듬으며
천천히 생각하실 줄 알았는데
할머니는 의외로 단번에 대답하셨다
“아이들을 화로에 둘러앉혀놓고
떡을 구워줬을 때“
눈보라치는 저녁
눈의 마녀가 나타날 것 같던 밤
어스름한 램프 밑에 대여섯 명
화로 앞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 우리 엄마도 있었으리라
아주 오랫동안 준비해온 것처럼
물어봐주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너무도 구체적이고
빠른 대답에 놀랐다
그날 이후 오십 년
사람들은 모두
감쪽같이 사라지고
내 맘 속에서만
때때로 종알대는
소박한 단란
꿈같은 대보름 축제
그 시절 할머니 나이를 훌쩍 넘긴
지금에서야 절절히 음미한다
그 말 한마디 안에 담겨 있던
구운 떡처럼 은근하게 짭조름한 맛을
―『처음 가는 마을』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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