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시

잉어가죽구두 (외 2편) - 김경후

공산(空山) 2019. 1. 17. 18:59

[2016 61회 현대문학상 수상작]

 

   잉어가죽구두 (2)

   김경후

 

 

   너덜대는 붉은 가슴지느러미

   수억 년 동안 끝나지 않는

   오늘이란 비늘

   떨어뜨리는

   노을

   아래

   기우뚱

   여자는 한쪽 발을 벗은 채

   깨진 보도블록 틈에 박힌 구두굽을 잡고 쪼그려 있다

 

 

 

   먹감나무 옷장

 

 

   거대한 벼루 같은 밤

   먼 옛날을 닫는다

   곧 돌아올 오늘마다 열었다 닫는다

   감나무 단 냄새를 연다

   먹 냄새를 닫는다

   삐거덕거리던 새벽 여섯 시들을 연다

   늙은 좀벌레들이 하얗게 죽은 밤 열한 시들을 닫는다

   곰팡이 핀 북쪽 벽을

   비어 있는 나프탈렌 주머니를

   닫는다 열고 닫는다

   먹감나무 가지에 걸렸던 바람의 묵음들

   구멍 난 바지들

   닫고 닫는다

   땔감이 되고 잿가루가 될 때까지

   연다 닫는다 삐그덕거린다

   집을 떠받들 뿌리 내릴 때까지 닫아버리기 위해

   연다

   빈 옷걸이 텅 빈 고요 속

   거꾸로 매달려 몸을 떠는 집유령거미

   검은 집 다락 속 먼 이야기에 닿는다

 

 

   해바라기

 

 

   세상 모든 정오들로 만든 암캐가 왔다, 나는 그 암캐를 알지 못하지만, 그 정오부터 알 수 없는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흑점의 온도로 울부짖는 암캐, 그 울부짖음 집어삼키는, 암캐의 뱃속에, 박히는 칼, 나는 요리는 모르지만, 뱃속보다 깊은 어둠을 찾을 수 있게 됐다, 칼끝에서 첫 핏방울이 떨어질 때부터, 시퍼렇게 목줄기가 찢어질 때부터, 그 목줄기 울음 따라 핏줄이 터질 때부터, 나는 마음에 없는 말과, 말없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됐다, 내 목줄기를 향해 달려오는 톱니바퀴, 돌고 도는 톱니바퀴의 울음도 울 줄 알았다, 암캐처럼, 암캐가 없어도, 땡볕에, 나는 그 암캐와 함께 끌려갈 줄 알았다, 암캐처럼, 동네 냇가에 아주 오랫동안 끌려가지 않기 위해, 나는 내가 알 수 없는 글을 쓸 수 있게 됐다, 나는 그 암캐를 알지 못하지만, 그날부터, 세상 모든 정오들로 만든 암캐가 됐다, 그날 저녁, 부엌 구석에서 나는 쩝쩝거리며 고기를 먹었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뱃가죽이 찢어지는 소리로 울 수 있었다

 

 

   * 수상작은 이 외에 뱀의 허물로 만든 달」「검은 바람까마귀」「수렵시대등 모두 6.

 

   ▲ 김경후 / 1971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독문과 졸업, 명지대 대학원 문창과 박사과정 수료. 1998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았다』『열두 겹의 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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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김경후는 자신의 시 쓰기의 기원을 세상 모든 정오들로 만든 암캐의 처절한 죽음, 그리고 그 고기를 먹은 저녁부터 시작된 뱃가죽이 찢어지는 소리로 울기라고 쓰고 있다.(해바라기). 그런가 하면 한쪽 발을 벗은 채/ 깨진 보도블록 틈에 박힌 구두굽을 잡고 쪼그려 있는 이미지를 빌려 여성됨의 수억 년 동안 끝나지 않는치욕과 슬픔을 말하고 있다(잉어가죽구두). 나아가 그러한 치욕과 울음의 처소는 또 다른 시에서 가슴뼈들로 노 저어 간 곳” “홀로라는 곳, 그리하여 사라지지아귀와 함께 지옥에도 떨어지지 못하는천형 같은 곳으로 드러난다(검은바람까마귀).

 

그런데 이 격하게 곤두선 자기인식이, 다소 뜻밖에도 정산적 범위의 한국어 어휘와 어순들에 의해 버텨지고 있는 것이다. 발상이나 표현의 과장과 해체가 마치 앞선 시 쓰기의 표지인 양 통용되는 시절에! 현란한 신식들 틈에서 잘 눈에 띄지도 않는 그 낮고 수수한 외양 안쪽에 그는 피가 배일 듯 생생하고 뜨거운 것을 가누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은 매우 감동적인데, 심지어 그 수수함이야말로 오히려 최선의 미적 장치로 여겨질 지경이다(얼마간은 실제 그러하다).

 

말이 지닌 오랜 결을 신중하게 견뎌주는 이 구심적 감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는, 실은 전복과 위반의 모험들이 긴장과 깊이를 얻기 어렵다. 진정한 의미의 형태 파괴란 견딜 만큼 견딘 끝에 불가피하게 도래하는 파괴일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다다나 슈르의 형태 파괴와 설득력이 천만 명의 살육이란 1차 대전의 참혹이 결과한 절규였다는 것, 그 불가피함에 의해 받쳐진 힘이라는 것을 기억할 만하다.

 

김경후의 미덕은 그것뿐 아니다. 시적 언술에 임하는 그의 감각은 드문 방식으로 깊고 조심스럽다. 그의 발성들은 느낌이나 생각의 뱉어내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참고 견디기를 통해 더 이루어지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그 속에서 마음과 말의 어우러짐이 높은 경도를 얻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김사인

 

 

2000년대에 들면서 일군의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바뀌기 시작한 시의 낯설면서도 새로운 어법과 시작 방법은 우리 시의 흐름을 바꾸는 강력한 동력이 되어 시단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 시단에 진입하는 신인들에게는 이들의 새로운 언어가 모델이 되어 긍정적인 면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요소까지 답습하여, 눈에 띄기 위해 일부러 어렵게 쓰려는 폐해를 낳은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김경후의 잉어가죽구두5편의 시들은 겉으로 볼 때는 목소리도 낮고 밋밋해 보여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그 장점을 놓치기 쉽다. 그러나 낮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있음과 없음의 경계와 신축성이 풍부한 시공간을 관통하는 자유롭고 활달한 이미지들의 운동을 만날 수 있다. 예를 들면 먹감나무 옷장에는 연다닫는다의 반복 리듬 속에서 옷들이 품고 있는 기억들, 낡음과 새로움, 빛과 어둠, 뿌리와 잿더미 들이 살아났다가 사라지는 이야기들이 펼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세계가 있다. 이 기억은 먼저 간 사람들이 겪었던 일이 개인의 몸에서 되풀이되는 사건이며, 여러 문화가 교차하면서 축적된 기억이기도 하다. 이런 사건들은 일상과 몸에 구체적으로 뿌리를 두고 있어 하나의 사물이나 장면들을 활동하는 유기체로 만들 뿐 아니라 풍부한 정서적 감염력을 지니게 한다. 그의 시는 애잔한 감정과 정서를 순환시키고 운동시켜서 이상하게 활달한 즐거움을 준다. 그의 시의 새로움은 낡은 것에 반발하고 저항하고 버린 대가로 찾은 새로움이 아니라 낡은 것 속에 풍부하게 내장되어 있으나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을 재발견하고 그것의 진정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찾아내어 생동감 있게 느끼게 해주는 새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의 어법은 생략과 비약, 있음과 없음의 경계, 물렁물렁한 시공간, 주체의 전도 등을 자유롭게 가로지르는 젊은 시의 문법도 지니고 있다.  --김기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