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시

발해로 가는 저녁 외 4편 - 정윤천 - 2018 지리산문학상

공산(空山) 2018. 8. 18. 10:40

   <2018 지리산문학상>

 

     발해로 가는 저녁 4

                                               심사위원 | 오태환 김추인 이경림     

      정윤천    

 

   발해에서 온 비보 같았다 내가 아는 발해는 두 나라의 해안을 기억에 간직하고 있었던 미쁘장한 한 여자였다 마을에서는 유일하게 자전거를 다루어 들을 달리던 선친의 어부인이기도 하였다 학교 가는 길에 들렀다던 일본 상점의 이름들을 사관처럼 늦게까지 외고 있었다 친목계의 회계를 도맡곤 하였으나 사 공주와 육 왕자를 한 몸으로 치러 냈으나 재위 기간 태평성대라곤 비치지 않았던 비련의 왕비이기는 하였다   

 

   막내 여동생을 태우고 발해로 가는 저녁은 사방이 아직 어두워 있었다 산협들을 연거푸 벗어나자 곤궁했던 시절의 헐한 수라상 위의 김치죽 같은 새벽빛이 차창 위에 어렸다가 빠르게 엎질러지고는 하였다 변방의 마을들이 숨을 죽여 잠들어 있었다

 

   병동의 복도는 사라진 나라의 옛 해안처럼 길었고 발해는 거기 눈을 감고 있었다 발목이 물새처럼 가늘어 보여서 마침내 발해였을 것 같았다 사직을 닫은 해동성국 한 구가 아직 닿지 않은 황자나 영애들보다 서둘러 영구차에 오르자 가는 발목을 빼낸 자리는 발해의 바다 물결이 와서 메우고 갔다 발해처럼만 같았다 

                        

   ㅡ 시와 사람2018년 봄호

 

 

   새들의 무렵 같은

  

   하루치의 기차를 다 흘려보낸 역장이 역 앞의 슈퍼에서 자일리톨 껌 한 통을 권총 대신 사들고 석양의 사무실 쪽으로 장고나 튜니티처럼 돌아가는 동안과 세간의 계급장들을 하나씩 떼어 부리에 물고 새들이 해안 쪽으로 날아가는 무렵과 날아가서 그것들을 바다에 내다 버리는 소란과 이 무소불위의 전제주의와(체재에 맞추어 불을 켜기 시작하는) 카페와 술집과 소금구이 맛집들과 무얼 마실래?와 딱 한 병씩만 더 하자와 이인분 추가와 헤아려 보거나와 잊어버리자와.

 

   ㅡ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20186월호

 

 

   마루

 

   그가 이 莊園의 백년손님이었다는 사실을 전 쟁반을 들고 왔던 행랑 처자가 놓고 갔다 품이 깊었던 친구의 심성이 미더웠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마음이 시켰을지도 모르는 동작으로 신발코를 공손하게 돌려놓아 주었다 백 년 전부터 그래 왔다는 듯 검고 부드러운 윤이 슬어 있었다 마루라고 불리는 그런 일 앞에서였다.

 

   시와 사람2018년 봄호

 

 

   떨어진 감꽃을 주웠던 데

  

   주운

 

   감꽃을 기워

 

   목걸이를

 

   만들었던 데

 

   그네 집

 

   마루에

 

   놓고 올까

 

   일백한 편도 넘었던

 

   시를

 

   심쿵생쿵 주워 모아는

 

   보았던 데,

 

   ㅡ 시현실2017년 겨울호

 

 

   루마니아 동전

 

   삼킨 동전 한 개를 사이에 두고 젊은 아버지와 앳된 아들이 마당에서 보낸 하루가 있었다 동전을 기다리던 부자의 일에는 아버지의 꼬장한 성정이 도사려 있었다 오래고 먼 것들이거나 지루하고 다정했던 일들을 이해하기에 父性의 개론들은 지금도 당신의 마당처럼 깊어 보일 때가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삼킨 동전을 당신의 생일처럼 궁구하며 있었는데 먼 훗날 루마니아처럼 멀고 까마득했던 동전이 당신의 부지깽이 끝에서가 아닌 꿈속에서 주워지던 일이 못내 궁금해지곤 하였다 백수광부의 시절 속으로는 꿈에서 주워 올린 滑石의 날들이 루마니아 동전처럼 찾아 왔던 적도 있었다 깨진 활석 조각을 주웠던 손아귀를 풀면 오래전에 삼킨 문양의 동전이 되어 있고는 하였다 한낮인데도 둘러앉아서 활석을 다투었던 이들의 판에서처럼 바닥에 깔아 놓은 신문지 위에서 아들의 인분을 헤집던 당신의 막대기 끝에서 같이 끗발을 고대했던 아들의 한때가 꿈속에서 주워 올린 활석 조각의 일 같기는 하였다 루마니아도 루마니아 동전도 본 적이 없었는데 주었다가 흘린 한 닢의 낯선 문양에게로 루마니아 동전이라고 여겨 주었던 기억 너머에 해 끝이 노루귀만큼 남을 때까지 끝나지 않았던 판에서 같이 삼켜진 동전 한 닢은 좀처럼 나오지 않고 있었다 동전을 줍던 잠에서 깨어나면 손잡이에 땀이 찬 당신의 부지깽이 끝에서는 루마니아나 루마니아의 동전보다 먼 데서 피었던 애기똥풀 꽃 한 송이가 바람 속에 사뭇 살랑거려 주기도 하였다. 

 

   ㅡ 문예바다201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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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윤천 / 1960년 전남 화순 출생. 1990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1실천문학'1회 실천문학상'으로 시 등단. 시집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흰 길이 떠올랐다』『탱자 꽃에 비기어 대답하리』『구석, 시화집 십만년의 사랑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