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물 속의 사막 - 기형도

공산(空山) 2015. 11. 18. 21:55

   물 속의 사막
   기형도
 
 
   밤 세시,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나는 천천히 발음해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흰 개는
   그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 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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