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올리버

이끼

공산(空山) 2017. 12. 16. 23:37

   이끼

   메리 올리버

 

 

   어쩌면 세상이 평평하다는 생각은 부족적 기억이나 원형적 기억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여우의 기억, 벌레의 기억, 이끼의 기억인지도 몰라.

 

   모든 평평한 것을 가로질러 도약하거나 기거나 잔뿌리 하나하나를 움츠려 나아가던 기억.

 

   지구가 둥글다는 걸 깨닫는 데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현상직립이 필요했지.

 

   이 얼마나 야만적인 종족인가! 여우와 기린, 혹멧돼지는 물론이고. 이것들, 작은 끈 같은 몸들, 풀잎 같고 꽃 같은 몸들! 코드 그래스(해안습지에서 자라는 볏과 식물), 크리스마스 펀(밀집된 단단한 잎을 가진 상록 양치식물), 병정이끼(원래 명칭은 British Soldiers로 빨간 모자를 썼던 영국군과 닮아 이름 붙음)! 그리고 여기 작은 흙더미 위를, 발톱과 무릎과 눈으로 뛰어다니는 메뚜기도 있지.

 

   나는 가을에 장작더미에서 검은 귀뚜라미를 보면, 겁을 안 주지. 그리고 바위를 좀먹는 이끼를 보면, 다정하게 어루만져,

 

   사랑스러운 사촌.

 

 

   ―「휘파람 부는 사람마음산책, 2015. (민승남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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