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여행길이라

여기는 백록담

공산(空山) 2015. 4. 20. 22:10

한참동안 구름 걷히기를 기다린 끝에 눈앞에 드러난 백록담은, 그저께 밤부터 어제 아침까지 한라산에 200mm나 내린 비 덕분에 물이 많이 차 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저 아래쪽 산언저리와 바닷가엔 서너 번 다녀간 적은 있으나 여기까지 오르기는 이번이 처음이라, 뒤늦게 소원 하나는 이룬 셈이다.

 

때마침 밤새 내리던 비도 아침에 그쳐 쾌적한 날씨다. 성판악에서 7시 반에 출발하여 5시간을 걸어 올라왔다. 올라오는 동안 정지용 시인의 오래된 시 <백록담>을 생각했다.

 

"絶頂에 가까울수록 뻑국채 꽃키가 점점 消耗된다. 한 마루 오르면 허리가 스러지고 다시 한 마루 우에서 목아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골만 갸웃 내다본다. 花紋처럼 版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咸鏡道 끝과 맞서는 데서 뻑국채 키는 아조 없어지고도 八月 한철엔 흩어진 星辰처럼 爛漫하다. 山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어도 뻑국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긔서 기진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계절은 일러서 그 뻐꾹채꽃(옛날 팔공산에도 많았다)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래도 어제 제주공항에 내려 용두암 부근에서 점심으로 소주를 곁들여 먹은 자리무침회와, 동문시장에서 장을 보아 저녁에 리조트에서 아내와 함께 끓여 먹은 갈치 찌개의 맛은, 한라산의 절경과 함께 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바람이 차서 이제 내려가야겠다. 관음사쪽으로 내려가서 하룻밤 더 묵고, 내일 저녁나절엔 이 아름다운 섬을 또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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