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올리버 11

난 아주 단순한 글을 쓰고 싶어

난 아주 단순한 글을 쓰고 싶어 메리 올리버 난 아주 단순한 글을 쓰고 싶어, 사랑에 대해 고통에 대해 당신이 읽으면서 가슴으로 느낄 수 있도록, 글을 읽는 내내 가슴으로 느낄 수 있도록, 내 글은 나만의 유일한 것이지만 당신의 마음으로 들어갈 테고 그리하여 결국 당신은 생각하겠지, 아니, 깨닫게 되겠지, 그동안 내내 당신 자신이 그 단어들을 배열하고 있었음을, 그동안 내내 당신 자신이 당신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이야기하고 있었음을.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 2009

메리 올리버 2024.02.03

여름밤

여름밤   메리 올리버     밤은 너무도 길고, 그 페이지들은 너무도   천천히 넘어간다.   누가 그걸 읽을 수 있겠는가?   누가 그 마지막 챕터를, 후기를   짐작할 수 있겠는가?    달빛은 별개의 이야기, 대개 연인들의 이야기다.   별빛도 별개의 이야기, 우리가 안개 낀 하늘에 바라는   하늘의 이야기다.    그리고, 가끔, 작은 음악도 있다,   흉내지빠귀도 잠들지 못하는 듯.    밖으로 나가면   풀이나 비 냄새를 맡는다.   아니면 꿀주머니 냄새, 또 하나의 깨어 있는—    파란 붓꽃, 너무도 곧고, 너무도 달콤한 입술을 지닌.   어둠 속에 홀로 부드럽게 피어 있는.     ― 『완벽한 날들』 마음산책, 2013. (민승남 옮김)

메리 올리버 2017.12.18

아침 산책

아침 산책   메리 올리버     감사를 뜻하는 말들은 많다.   그저 속삭일 수밖에 없는 말들.   아니면 노래할 수밖에 없는 말들.   딱새는 울음으로 감사를 전한다.   뱀은 뱅글뱅글 돌고   비버는 연못 위에서   꼬리를 친다.   솔숲의 사슴은 발을 구른다.   황금방울새는 눈부시게 빛나며 날아오른다.   사람은, 가끔, 말러의 곡을 흥얼거린다.   아니면 떡갈나무 고목을 끌어안는다.   아니면 예쁜 연필과 노트를 꺼내   감동의 말들, 키스의 말들을 적는다.     ― 『완벽한 날들』  마음산책, 2013. (민승남 옮김)

메리 올리버 2017.12.18

달력이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달력이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메리 올리버     나는 학교에서 나온다 재빨리   그리고 정원들을 지나 숲으로 간다,   그리고 그동안 배운 걸 잊는데 여름을 다 보낸다    2 곱하기 2, 근면 등등,   겸손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법,   성공하는 법 등등,   기계와 기름과 플라스틱과 돈 등등.    가을쯤 되면 어느 정도 회복되지만, 다시 불려간다   분필 가루 날리는 교실과 책상으로,   거기 앉아서 추억한다    강물이 조약돌을 굴리던 광경을,   야생 굴뚝새들이 통장에 돈 한 푼 없으면서도   노래하던 소리를,   꽃들이 빛으로만 된 옷을 입고 있던 모습을.     ―『완벽한 날들』 마음산책, 2013. (민승남 옮김)

메리 올리버 2017.12.17

언젠가

언젠가   메리 올리버     자서전이란 것이, 풍성하나 완성이 불가능한 이야기—강렬하고 조심스러우며 표출적이고 자기 본위적인 하나의 실패가 아니고 무엇일까? 그러니 나의 이야기와 여기 존재함과 나라는 사람 전체에 그림자나 빛을 던질 진실한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린 사슴이 철조망 고리에 앞발이 걸려 울타리에 매달려 있고, 사나운 농장 개들이 그리로 달려갈 때, 나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았어. 눈을 가리거나 달리는 것. 그래서 나는 달렸지.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빨리 달렸어. 사슴에게 몸을 던져 둘이 함께 철조망 울타리에 매달렸고, 개들은 이리저리 날뛰었어. 하지만 사슴은 내 마음을 모르고, 아니면 알긴 해도 내가 붙어 있는 걸 견딜 수 없었던 건지 염소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앞발을 ..

메리 올리버 2017.12.17

폭설

폭설   메리 올리버     지금 새하얀 과수원에서 나의 작은 개가   뛰놀고 있어, 거친 네 발로   새로 쌓인 눈을 파헤치며.   이리 달리고 저리 달리고, 잔뜩 신이 나서   멈출 수가 없어, 껑충거리고 빙글빙글 돌며   흰 눈밭에 크고 생기 넘치는 글씨로   육신의 기쁨을 표현하는   긴 문장을 쓰고 있어.    오, 나라도   그보다 잘 표현할 순 없었을 거야.     ― 『휘파람 부는 사람』 마음산책, 2015. (민승남 옮김)

메리 올리버 2017.12.17

이끼

이끼   메리 올리버     어쩌면 세상이 평평하다는 생각은 부족적 기억이나 원형적 기억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여우의 기억, 벌레의 기억, 이끼의 기억인지도 몰라.    모든 평평한 것을 가로질러 도약하거나 기거나 잔뿌리 하나하나를 움츠려 나아가던 기억.    지구가 둥글다는 걸 깨닫는 데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현상—직립—이 필요했지.    이 얼마나 야만적인 종족인가! 여우와 기린, 혹멧돼지는 물론이고. 이것들, 작은 끈 같은 몸들, 풀잎 같고 꽃 같은 몸들! 코드 그래스(해안습지에서 자라는 볏과 식물), 크리스마스 펀(밀집된 단단한 잎을 가진 상록 양치식물), 병정이끼(원래 명칭은 British Soldiers로 빨간 모자를 썼던 영국군과 닮아 이름 붙음)! 그리고 여기 작은 흙더미 위..

메리 올리버 2017.12.16

백조

백조   메리 올리버     넓은 물 가로질러   무언가 떠   오네— 가냘프고   섬세한    배, 흰 꽃들   가득한—   불가사의한 근육들로   움직이네    마치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런 선물들을   메마른 기슭에 가져다주는 것이   감당하기 벅찬    행복인 것처럼.   이제 검은 눈을 돌리고,   구름 같은 날개를   가다듬고,    암회색   정교한 물갈퀴발을   끌며 오네.   곧 여기 닿겠지.    오, 나 어떻게 할까?   저 양귀비 빛깔 부리   내 손에 닿으면,   시인 블레이크의 부인이 말했지    남편과 함께 있고 싶어요—   그이는 너무 자주   천국에 있어요.   물론! 천국으로 가는 길은   평평한 땅에 있지 않아.   상상력 속에 있지   네가 이 세상을 ..

메리 올리버 2017.12.16

생이 끝났을 때

생이 끝났을 때   메리 올리버(1935~ )     죽음이 찾아올 때   가을의 배고픈 곰처럼   죽음이 찾아와 지갑에서 반짝이는 동전들을 꺼내   나를 사고, 그 지갑을 닫을 때    나는 호기심과 경이로움에 차서   그 문으로 들어가리라.   그곳은 어떤 곳일까, 그 어둠의 오두막은.    그리고 주위 모든 것을 형제자매처럼 바라보리라.   각각의 생명을 하나의 꽃처럼   들에 핀 야생화처럼 모두 같으면서 서로 다른.    생이 끝났을 때 나는 말하고 싶다.   내 생애 동안 나는 경이로움과 결혼한 신부였다고.   세상을 두 팔에 안은 신랑이었다고.    단지 이 세상을 방문한 것으로    생을 마치지는 않으리라.     When death comes   Mary Oliver     When dea..

메리 올리버 2017.12.15

휘파람 부는 사람

휘파람 부는 사람   메리 올리버     갑자기 그녀가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어. 내가 갑자기라고 말하는 건 그녀가 30년 넘게 휘파람을 불지 않았기 때문이지. 짜릿한 일이었어. 난 처음엔, 집에 모르는 사람이 들어왔나 했어. 난 위층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그녀는 아래층에 있었지. 잡힌 게 아니라 스스로 날아든 새, 야생의 생기 넘치는 그 새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지저귀고 미끄러지고 되돌아오고 희롱하고 솟구치는 소리였어.     이윽고 내가 말했어. 당신이야? 당신이 휘파람 부는 거야? 응, 그녀가 대답했어. 나 아주 옛날에는 휘파람을 불었지. 지금 보니 아직 불 수 있었어. 그녀는 휘파람의 리듬에 맞추어 집 안을 돌아다녔어.     나는 그녀를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했어. 팔꿈치며..

메리 올리버 2017.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