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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의 「공터의 사랑」 감상 - 박준

공터의 사랑   허수경(1964~2018)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혼자 가는 먼 집』1992.    ---------------------------------------   태어난 지 200일 무렵부터 아이에게는 영속성이라는 감각이 발달하게 됩니다. 영속성은 대상이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해서 그것이 없어졌다고 생각하..

해설시 2024.09.10

정우신의 「메카닉」 감상 - 박소란

메카닉   정우신     삼촌은 기계를 잘 다뤘다 아픈 사람도 기계로 고쳤다   비가 오거나 스님이 시주를 오는 날이면 톱날을 교체하곤 했다   삼촌은 언제 뭉툭해졌더라   몇 번째 톱날이었더라   기계가 삼촌을 오랫동안 만지던 날   우리는 기름이 떠다니는   미숫가루를 마시며   철판을 옮겼다     ―『미분과 달리기』2024.6    ----------------------------------------   수리공, 기계공 등의 뜻을 지닌 “메카닉(mechanic)”은 속어로 살인 청부업자를 이르기도 한다고. 당연히 시인은 이 모든 의미를 두루 염두에 두고 제목을 지었을 것이다.그런 만큼 시에는 어떤 섬뜩함이 있다. “삼촌은 기계를 잘 다뤘다”로 시작해 “기계가 삼촌을 오랫동안” 만졌다에 이르는 ..

해설시 2024.09.10

조해주의 「밤 산책」 감상 - 나민애

밤 산책   조해주(1993~ )     저쪽으로 가 볼까    그는 이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얇게 포 뜬 빛이   이마에 한 점 붙어 있다    이파리를    서로의 이마에 번갈아 붙여 가며   나와 그는 나무 아래를 걸어간다     ―『가벼운 선물』     ---------------------------------   만약 이 시인이 화가라면, 이 시가 그림이라면, 나는 이 그림을 꼭 갖고 싶다. 돈을 모으고 낯선 화랑에 가서 ‘이 그림을 살게요’라고 말하고 싶다. 방에 걸어 두고 내 마음에 걸어 둔 듯 바라보고 싶다. 시인이 말하듯 그려 놓은 밤 산책을 나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과 나란히 걷는 그 시간이 나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너무 좋지 않은가. ‘얇게 포 뜬 빛..

해설시 2024.09.10

서시 - 한강

서시   한 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

내가 읽은 시 2024.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