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인

풍경의 깊이

공산(空山) 2017. 6. 10. 21:16

   풍경의 깊이

   김사인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이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 「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00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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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이 파랗게 돋아나고 있습니다. 키 낮은 풀들이 파르르 떨고 있습니다. 그 가녀린 것들의 외로운 떨림으로 우주의 저녁 한 때가 비로소 저물어 간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풀들의 떨림 사이에 묻어 있는 고요속에서, 고요한 봄볕속에서 곤히 잠들고 싶어 합니다. 나비나 벌이나 벌레의 몸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에서 그대의 눈빛을 발견해 내는 섬세한 마음이 풍경을 깊이 있게 바라보게 합니다. 낮아지고 고요해져서 바라보아야 풍경을 깊이 있게 볼 수 있습니다.  — 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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