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공산(空山) 2016. 9. 26. 23:48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며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 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속같이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 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눈에는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도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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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의 제목은 김명인 시인의 너와집 한 채의 한 구절이다. 나도 그 구절 앞에서 가슴이 멘 적이 있다.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살고 싶다는, 어떻게 보면 유치하고 어떻게 보면 찬란한 꿈과 다를 바 없다. 그런 꿈을 거세당한 사람들에게 시인은 이런 시를 보여주고 싶었을까.

   인생을 탕진한다는 말, 사내라면 이 아름다운 퇴폐와 무능력의 유혹을 한번쯤 꿈꿔봐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대책 없이 늙어가는 일은 시에서나 가능한 일인가?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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