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시인론

행동하는 지식인 단재 신채호 - 신충우 단재사관 연구소장

공산(空山) 2017. 1. 1. 17:16

행동하는 지식인 단재 신채호

- 신충우 단재사관연구소장

 

1, 고드미장꾼

 

충청도 산골에 '고드미장꾼'이란 말이 있다. 내가 40여전 고향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 할아버지(신진구(申振求))·할머니(김이분(金二分))를 따라 장에 다니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로 지금도 회자(膾炙)된다. 고드미장꾼이란 5일에 한 번씩 서는 장에 와 남의 술자리에 끼어 안주나 축을 내는 가난한 장꾼을 일컫는 말이다. 충북 청원의 미원과 낭성지역에서는 지금도 이 말이 통용된다. 친구나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할 때 술은 안마시고 안주만 축내는 사람을 보면 '고드미장꾼'이라고 놀려댄다. 고드미라는 마을은 충북 청원군 미원(쌀안)장터에서 서북쪽으로 4.2정도 떨어진 하늘만 빼곰히 보이는 오지 중 오지다. 미원에서 청주방향으로 1.7정도 떨어진 낭성면 관정리 활미에서 왕복 2차선 도로를 따라 산 속으로 2.5정도 들어가다 보면 마지막으로 닿은 마을이 바로 이곳이다. 미원에서 청주로 향하는 25번국도는 단재로(丹齋路)라고 부른다. 서울에도 강남역에서 역삼동 방향으로 첫 번째 골목이 단재길로 지정돼 있다.

 

- 주석서 안주만 축내는 가난의 상징 고드미 장꾼

이 마을은 민족사학의 태두이자 투철한 항일 독립운동가이며 저명한 언론인이었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의 고향이나 일반인에게는 이 마을보다는 이 동네가 속해 있는 귀래리가 더 알려져 있다. 고드미는 1980년 중반 접시꽃당신이란 시집을 내 유명했던 시인 도종환이 2000고두미마을에서라는 시집을 통해 소개한 적이 있으며, 노산 이은상도 195312월에 쓴 시 <곡 단재선생묘>에서 이곳을 귀래리로 언급한 바 있다.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이 내린다.

오동나무함에 들려 국경선을 넘어오던

한 줌의 유골 같은 푸스스한 눈발이

동력골을 넘어 이곳에 내려온다.

(후략).

 

다음은 이은상의 <곡 단재선생묘>에서이다.

 

청주시에서 자동차로 60, 낭성면에 이르러 다시 도보로 10리 빠듯한 귀래리 산촌을 찾으니, 거기가 바로 단재 신채호 선생의 고향이자 또 뒷날 유해를 반장해 모신 곳이다. 나는 혁명선배의 무덤 앞에 엎드려 절하고 한 걸음 물려 앉아 조국에 바친 선생의 슬픈 일생을 생각하며 노래를 바쳤다.(후략)

 

고드미에는 단재가 가족들과 함께 살던 집터(귀래리 전 299번지), 그 옆 산 밑에 그의 묘소(3-5번지, 조부 서당터)와 사당, 그리고 기념이 있다. 사당과 묘소는 1993년 충북도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돼 있다. 마을로 들어가는 남쪽을 빼놓고는 동서와 북쪽이 삼태기처럼 산으로 둘러싸인 이 마을은 농사지을 땅이 적은데다 토질마저 척박하다. 이에 따라 이 마을 사람들의 생활상은 대부분 끼니를 해결하기 어려울 정도로 궁핍, 장에 가도 돈주고 술 한번 마음놓고 마시지 못하고 남의 술자리에 끼어 앉아 안주만 축을 내 '고드미장꾼'이란 가슴아픈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이는 100여 년전 단재가 이곳에 살 때의 생활상이 얼마나 궁핍했는가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이곳은 생활권이 미원으로 예부터 5일에 한 번씩 서는 쌀안장(4·9)을 이용해 농산물이나 나무와 가축 등을 가지고 나와 물물교환하거나 돈을 마련, 생필품을 구입했다. 나의 증조부(신성모(申聖模), 18831961)에 의하면 단재도 어린시절 모친이나 형과 함께 장을 보러 십리길을 걸어 이곳에 오곤했다고 한다. 쌀안은 미원(米院)의 옛 지명으로 순수한 우리말이며 매년 8월에는 이를 살려 쌀안축제가 열린다. 현재도 고드미 주민들은 미원장을 보고 있으며 자녀들도 미원에 있는 중·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리미(현재 대전시 중구 어남동)에서 1880128(음력 117, 고종 17) 태어난 단재가 고드미로 옮겨온 것은 8살 때인 1887. 외가(안동 권())에 살던 부친 신광식(申光植)이 죽자 소년 단재는 조부모, 모친(밀양 박()), 8살 연상인 형 재호(在浩)와 함께 일가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본향 산동(충북 청원의 미원·낭성·가덕 지역을 일컫는 말)으로 옮겨 왔다. 단재 부친은 영민했으나 병약해 38세로 사망, 고향 낭성면 추정리 가래울에 묻혔다(단재 조부는 고드미 고사리골에 묘소가 있다).

 

- 대전 도리미 진외가서 태어나 충북 본향 고드미서 성장

단재가 진외가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것은 조부가 가솔을 데리고 처가에 기거했기 때문이다. 조부 신성우(申星雨, 18291890년대 후반)는 신명휴(申命休)의 여섯 아들중 둘째로 과거에 급제, 사간원 정6품 정언을 지냈으나 몰락한 선비가로 생활이 궁핍했다. 증조부도 다섯·여섯째 두 아들을 다른 집으로 입양시킨 것으로 보아 살림살이가 좋은 편은 아니였던 것으로 보인다. 단재 조부는 충북 청원으로 낙향해 어렵게 지내다 승지로 있던 처조카 심재 권승(權昇)이 대덕 도리미로 낙향하자 함께 지낼 요량으로 처가의 동의를 얻어 이곳으로 옮겨왔다. 당시 처 증조부 권상염(權尙廉)의 손자들이 모여 공부를 하던 재실(齋室, 초가삼간)이 비어있어 이곳에 머물게 됐으나 후견인 심재가 일찍 세상을 떠나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안동권씨 참의공파 파보 갑권에는 단재의 조부가 석남 권찬(權璨)의 둘째 사위로, 아들 광식과 함께 올라있어 그 당시 상황을 엿 볼 수 있게 한다. 이로 인해 단재는 진외가에서 형 재호와 함께 태어났다. 단재의 생거지는 1991년 대전시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돼 있다.

 

단재가의 몰락에는 충청도에서 일명 '신천영의 난'이라고 하는 영조 때 이인좌(李麟佐)의 난과 관련돼 있다. 이 난의 주모자로 고령신씨중에서 신천영(申天永)이 참여했는데 그가 단재의 직계는 아니나 낭성출신으로 신숙주의 11세손이자 신식(申湜)6세손이다. 신천영은 17283월 이인좌와 모의해, 개혁주의자 소현세자(16121645, 34살에 의문사)의 증손인 밀풍군 탄(密豊君 坦)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실패했다. 민란군은 청주성을 함락하고 서울로 북상하다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 격파됐다. 이 사건으로 정여립(鄭汝立)의 일파로 탄핵을 받아 유배됐다 풀려난 신식의 가문은 거의 몰락했다. 그리고 이 여파가 낭성 일대에 미쳐, 단재의 5대조 신두모(申斗模) 등도 이 사건에 연루돼 급속하게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고령신씨 세보에 의하면 단재가는 이 때부터 증직되는 벼슬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몰락했다. 단지 대원군의 집정기간동안 조부 신성우가 문과에 합격해 사간원의 정 6품 정언의 벼슬을 지냈을 뿐이다. 신천영의 난 때 민란군이 최후까지 남아 항거하던 산당산성은 단재의 집에서 지척의 거리에 있다. 이 난은 봉건정부에 저항하는 구향과 하층민중이 난의 주도세력인 신향을 지지하며 가세, 봉기한 대표적인 민란이다.

 

단재 식구들은 고향으로 옮겨와 조부가 한문서당을 열였으나 몰락한 선비가로 여전히 생활이 궁핍, 보리죽이나 콩죽으로 끼니를 이어가야만 했다. 이 당시 단재가가 소유했던 땅이라고는 3필지로 집터를 포함한 밭 800, 또 다른 밭 150평과 50평이 전부였으나 토질이 척박한 산비탈땅으로 생계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던 같다. 유명인사든 이름이 없는 필부든 간에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고나 성격은 그가 유·소년기를 보냈던 고향의 지리·생태·삶의 터전 등과 깊은 관련을 갖게 마련이다. 단재가 유년기를 보낸 도리미와 소년기를 보낸 고드미는 공통적인 점이 발견된다. 큰길에서 2.5떨어진 하늘만이 바라보이는 두메산골로 집 앞에 바로 정삼각형에 가까운 산이 있고 두 지역에서 모두 궁핍하게 생활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도리미에는 현재 주민이 10여호, 고드미에는 약 20호가 살고 있으며 단재로 인해 이들 마을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我誤聞時君誤言, 欲將正誤誤誰眞.

人生落地元來誤, 善誤終當作聖人.

나는 그릇 듣고 그대는 그릇 말하고

그릇된 것 고치자 한들 어느 누가 진짜인지

인생이 태어난 게 본시부터 그릇된 것

그릇된 것 잘 쓰면 그게 성인이 되네 그려

 

단재가 지은 <영오(詠誤)>란 한시로 그의 품성을 읽게 한다.

 

- 고향의 지형지세와 가난이 불굴의 의지 심어

그러나 단재는 이에 굴하지 않고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엄격한 조부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균관(19)에 입학하기 전까지 민족 지도자의 꿈을 키웠다. 고드미의 옛 집터에는 서당을 다니던 단재가 9살 때 책걸이 기념으로 심은 모과나무가 있다. 수령이 올해(2005)117. 특히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듣던 단재는 열 여섯이 되던 해 풍양 조()씨와 결혼했으나 가난한 집안임에도 살림에는 도통 관심이 없이 책읽기에만 몰두했다. 단재는 독서광으로 인근 마을의 책을 빌려다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섭렵했다.

 

단재와 같이 걸출한 인물이 어떻게 이런 곳에서 나왔을까. 나는 상기 두 지역의 지형지세와 가난이 그 당시는 견디기 어려웠을지 몰라도 오히려 유·소년의 단재를 흐트려짐 없이 강하게 만들었고 산으로 들러싸인 지형지세는 그에게 타협할 수 없는 불굴의 의지를 심어주고 하늘로 솟고 싶은 이상을 불어 넣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단재의 묘소를 참배하거나 별초를 할 땐 이런 생각을 갖곤 한다. 그가 호의호식하며 유복한 유·소년기를 보냈더라면 적어도 후일의 선구자 단재는 태어나지 못했으리라. 그때 그때 형편에 따라 괴롭지 않게 처신하는 학자로, 문필가로 한껏 재미있게 가족과 그 한 몸만을 위하는 '작은 나(小我)'로 주저앉아 만족했을 것이다. 단재의 '큰 나(大我)'는 전적으로 고향의 지형지세와 궁핍한 생활환경 및 국권을 상실한 민족과 민중을 큰 스승으로 삼아 이루어졌다고 본다.

 

 

2, 단재의 절대정신

 

()하도다. 국민의 혼이여.

()하도다. 국민의 혼이여.

중략

국민의 혼이 어찌 중()치 아니하며 어찌 강()치 아니하리오.

 

단재가 1909112<대한매일신보>에 발표한 <중하도다 국민의 혼이여>이다. 이마와 콧날이 반듯하고 눈빛이 형형한 단재의 사진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그가 이 땅의 우리, 단군의 자손, 한겨레 한핏줄에게 전하고자 했던 애끓는 절규가 느껴진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언론인, 계몽사상가, 항일독립운동가, 문학가, 민족사학자 등으로 불려지지만 이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민족사학자다. 그는 역사를 아()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 보고 역사의 주체를 민족과 민중에게서 찾으려 했다.

 

-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사관 정립

그가 1923·24년에 쓴 조선혁명선언조선상고사총론이 이를 잘 말해준다.

 

강도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중략)이상의 이유에 의하여 외교·준비 등의 미몽을 버리고 민중 직접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후략).

 

미온적인 독립운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단재는 19231월 일명 '의열단 선언'이라고 불리는 조선혁명선언을 통해 민중 직접혁명을 주장하고 나선다. 조선혁명선언은 항일투쟁에 있어 하나뿐인 무기가 민중혁명에 있음을 주장하고 민중이 직접 실천에 나가야 한다는 행동지침까지 제시했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의 아()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발전하며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심적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라, 세계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니라.(후략)

 

이 내용은 1924년을 전후해 단재가 조선상고사총론에서 밝힌 역사에 대한 정의로 민족사관의 초석이 되었다.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됐던 글로 1948년 종로서원에 의해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연대가 상고사 부분에서 끝나 조선상고사라고 한다. 민족사관을 정립한 그가 성균관에 입학하기 전까지 10여 년간 살며 미래의 꿈을 키운 곳은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드미다. 이곳의 단재 기념관에는 이들의 책자를 비롯해 단재의 출생에서 순국까지의 각종 자료가 사진으로 비치돼 있다.

 

- 위화도 회군에 항거한 신덕린 후예

그의 비분강개한 불굴의 의지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선 우선 고두미라는 마을부터 알아보아야 한다. 고드미가 속한 낭성면을 중심으로 남쪽의 가덕면과 동쪽의 미원면은 고령(高靈)신씨 집성촌이다. 세종 때 한글창제에 크게 기여한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의 넷째((고천군다섯째((소안공일곱째((영성군) 등 세 아들의 자손들이 연산군 때 이곳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았으며 단재는 고천군의 18세손이다. 고천군은 보한재의 아들 8형제 중에서 가장 뚸어났으며 성종 때 좌리공신(佐理功臣)를 지냈다. 특히 그의 고조부는 고려 말 포은 정몽주(鄭夢周목은 이색(李穡) 등과 활동한 6은 중 한사람인 순은(醇隱) 신덕린(申德隣)이다. 예의판서(禮義判書)를 지낸 순은은 이성계의 군사반란(위화도회군)에 반대,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며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단재와 동무이자 근친인 나의 증조부(신성모)에 의하면 단재 조부 신성우는 손자에게 어린시절 선대 할아버지들의 학식 및 덕망과 함께 충의와 절개를 가르쳐 선비로서의 자부심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여기에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단재가 후에 민족주체의식을 일깨우며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맞섰던 최영을, 을지문덕·이순신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장군으로 꼽았으며, 그의 이름과 동격인 호 단재(丹齋)21대조부 순은의 동지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에서 따왔다는 점이다.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싈 줄이 이시랴." <단심가> 종장에서 포은은 고려에 대한 굳은 결의를 끝까지 지키려는 유학자의 자세와 두 왕조를 섬기지 않으려는 일관된 신념을 잘 나타내고 있다.

 

- 대쪽같이 곧다는 고향 고드미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리미(현재 대전시 중구 어남동)에서 1880년 태어난 단재는 8살 때인 1887년 본향 고드미로 옮겨와 성균관에 입학하기 전까지 일생 중 가장 중요한 성장기 10여 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10세에 사서삼경과 통감을 해독하고 한시를 지어 신동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先父遣孤吾兩人, 崎卄載閱甘辛.

歸來洞裡三間屋, 郁里河邊一樹春.

風雨 床同話舊, 詩書滿架不憂貧.

誰知今夜燕南客, 獨坐天涯淚滿巾.

아버님 끼친 아들 우리 형제 두 사람

기구한 이십 년에 달고 쓴 맛 다 겪었네

귀래동 마을에는 우리 자란 삼칸 집

옥리하 냇가에 봄이 오면 꽃피고

비바람 불면 상에 누워 옛이야기 같이 하고

서가에는 책이 쌓여 가난 걱정 없었는데

뉘 알았으니 오늘 밤 이역 만리 길손 되어

하늘가에 홀로 앉아 눈물만 흘릴 줄을

 

단재가 지은 <형님 기일에(家兄忌日)>라는 한시로 노산이 역한 것이다.

 

단재가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그리워했던 이곳은 외부에 고두미로 알려져 있으나 진짜 이름은 고드미로 '대쪽 같이 곧다'는 말에서 유래됐다. 이곳의 이름은 단재의 별명 만큼이나 다양하게 불려진다. 곧으미·고드미·고디미·고두미가 그것으로 외부에선 한자적인 고두미, 지역주민들은 향토적인 고디미로 부르다 최근에는 고드미로 통용됐다. 고드미는 곧으미에서 부르기 쉽게 변형된 것이다. 곧으미는 조선시대 하은 신용(申涌)의 곧은 성품에서 유래됐다. 광해군에게 곧은 상소를 올렸다 역신으로 몰려 귀양살이를 한 후, 이곳에 와 은거생활을 했는데 반정을 통해 왕위를 계승한 인조가 여러 차례 불러도 나가지 않은 지조를 보였다. 특히 하은은 이인좌의 난 주모자 신천영의 5대조부 신식과 형제간이다. 단재에게 향토적으로 영향을 미친 하은은 영성군의 5세손으로 1591(선조 2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檢閱)이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1596년 저작(著作수찬(修撰)을 거쳐 승지·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관찰사에 이르렀다 역신으로 몰려 파직됐다. 저서로는 의례고람(儀禮考覽), 상례통재(喪禮通載), 오복통고(五服通考)등이 있다.

 

일제시대 '강도일본'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다고 얼굴을 들고 세수를 하던 단재의 곧은 절개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인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보국충절의 정기를 받아 단재와 같은 불세출의 인물이 이곳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 민족을 신적 이념으로 승화

고드미가 속한 낭성면과 동으로 접한 미원면은 금강의 지류인 청원군의 나머지 1·11개면과 달리 남한강 상류로 노령산맥과 이어지는 산악지대이다. 낭성면은 서쪽으로 가덕면, 남쪽으로 보은군 내북면, 북쪽으로 북일면과 접해 있다. 인근 문의면으로 금강이 흐르고 있지만 큰 산(피반령)이 가로놓여 이곳에서 물을 버리면 속리산에서 북류해 오는 속리천과 합류, 동류하다가 북류, 서울로 향한다. 이 물줄기를 따라가면 소설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洪命熹)의 고향, 괴산도 만나게 된다. 1929년 투옥중인 단재를 대신해 그의 저서조선사연구초발간을 주선해 준 사람이 바로 벽초이다. 임꺽정<조선일보>10여 년에 걸쳐 연재된 당대 최대의 장편 역사소설이었다. 조선 명종 때의 도적 임꺽정의 이야기를 허구화한 이 소설은 천민계층의 반봉건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생활양식을 다룬 데 그 특징이 있다. 단재와 벽초는 양반계층의 세계관, 즉 주자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진보주의 사상을 가진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로 각기 자신을 다듬고 도슬러 나갔다. 민족사관을 갖게 된 단재나 양반의 사상을 신랄하게 비판한 벽초는 양반계층이 걸어간 보편적인 길을 걷지 않고 사대부 계층의 윤리의식과 문화의식을 바탕에 두고 새로운 이념과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했다. 괴산에서 더 나가면 충주의 중원고구려비(국보 제205)도 만나게 된다.

 

이 지역 사람들은 같은 충청인이지만 금강지류의 사람들보다 말씨가 빠르고 불의에 저항하는 반골기질을 가지고 있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중 청암 권병덕(權秉悳, 미원면 종암리)과 은재 신석구(申錫九, 미원면 금관리)도 이곳 출신이다.

 

이같은 성장배경은 나라를 잃은 단재 신채호에게 민족과 자기를 동일시하며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절대정신을 불어 넣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재의 절대정신은 민족을 신적 이념으로 상승시킨 상징이면서 실체였다. 단재에게는 주체적인 소아(小我)의 내면이 없어져 국가와 민족이라는 대아(大我)만이 존재했다. 단재는 '대아와 소아'에서 개인은 민족의 가치를 위해 헌신해야하며 이는 필멸의 존재인 소아가 불멸의 존재인 대아가 되는 과정이라 주장했다. 개인이 상위의 가치인 민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결코 부정적인 일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예컨대 이순신이라는 개인이 자신의 일생을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구하는 것에 바친 댓가로 대아적 가치를 지닌 '불멸의 이순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3, 행동하는 지식인

 

"이는 곧 우리 가문이 대대로 지켜 전해 내려오는 법도이니라. 너희들은 각각 한통씩을 써서 출입할 때마다 눈여겨 보아 항상 이에 마음을 두고 생각하라. 중략남들로부터 근칙한 선비()라는 말을 들어서 선조께 부끄러움을 끼쳐드리지 아니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가문은 선대로부터 선비사상을 숭상하며 이를 이어왔다. 그의 18대 조부 보한재 신숙주(14171475)가 지은 가훈은 상기와 같이 고령(高靈)신씨 세보에 명시돼 후손들에게 대대손손 전해 내려오고 있다. 보한재는 세종 때 한글창제에 기여하고 성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이에 따라 고령신씨 문중에서는 근·현대에 민족을 대표하는 선비들이 많이 배출됐다. 단재를 비롯해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申圭植), 3·1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인 신홍식(申洪植), 독립운동가 신석우(申錫雨), 한국의 슈바이처 신정식(申汀植) 등이 바로 그들이다.

 

조선시대는 양인으로 당시 국학인 성리학을 공부해 그 이념을 실천하는 학인(學人)을 선비()라고 했다. 이에 따라 선비는 철학에 해당하는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을 비롯한 수신교과로 소학(小學), 성리학서로 근사록(近思錄)과 심경(心經), 기본교과로 사서삼경(四書三經) 등을 공부했다. 선비가 지향한 가치는 무엇보다도 학문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학행일치(學行一致)로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길 때 비로소 그 배움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강한 자는 억누르고 악한 자를 부추기며 사적인 일보다는 공적인 일을 우선으로 생각했다.

 

- 가훈 선비사상에서 지행합일관 찾아

선비를 중시하는 가문에서 자란 단재는 한문서당을 하던 조부(문과 급제) 밑에서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성균관에 입학, 본격적으로 유학(儒學)을 공부했다. 그의 앎()과 함()1974년 백범사상연구소(소장 백기완)가 단재의()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서의 역사(조선상고사총론)조선혁명선언을 묶어 앎과 함이란 문고판을 내 군사정권시절 세인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단재가 선비사상에 입각해 행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은 중국 명대 중기의 유학자 왕양명(王陽明)이 주장한 지행합일과는 다르다. 주자(朱子)나 육상산(陸象山) 등이 주장한 '선지후행(先知後行)'설에 대한 반대 개념에서 나온 이 명제는 이() 또는 양지(良知)는 처음부터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외계로부터 지식의 획득은 필요치 않고, 행위는 양지를 실현시키는 존재로만 본 철학적 논리이다. 그러나 나는 단재와 관련, 지행합일을 왕양명과 달리 '알면 반드시 행하고 지행을 합일시켜야 한다'는 당위적인 측면에서 실천강조의 명제로 보고자 한다.

 

한말 중국의 자강운동에 영향을 받은 단재는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그의 일념은 오직 항일독립운동에 있었다. 역사연구를 비롯한 언론활동, 계몽운동, 문예창작 등이 모두 그에 대한 수단과 방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같은 사상은 그가 역사에 대한 인식을 정립하면서부터 비롯됐다. 단재는 "역사는 그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추진하고 창조하는 주체가 있으며, 역사의 주체로서 주관적인 위치에 선 자인 아()와 비아(非我)가 투쟁하는 데에서 전개 발전한다."고 인식했다. 민족주의를 진보적 사상으로 이해한 그는 1908년 발표한 독사신론에서 종래의 사대적인 역사 인식 체계를 거부하고 단군에서 부여·고구려로 계승되는 민족주체적인 고대사 인식 체계를 제시하고 1924년 발표한 조선상고사총론에서'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정립했다. 그의 민족주의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민족 자주독립사상과 민족국가 자결주의라고 정리할 수 있다.

 

단재는 성균관에서 박사(오늘날의 교수)까지 되었지만 혁신선비답게 과감하게 유학을 보수적이고 사대적인 사상이라고 비판하며 반주자학적인 입장에서 민족주체사관을 제시했다. 즉 성균관에서 배운 것 중 독립운동에 필요한 사상만을 취사선택, 새로운 가치관을 확립한 것이다.

 

- 민족사관 정립 후, 김부식 사대사상이라 비판

이러한 입장에서 묘청(妙淸)과 정여립(鄭汝立)을 재평가하는 반면 유림의 거두인 최치원(崔致遠이황(李滉) 등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특히 김부식(金富軾)을 대표적인 유가(儒家)로 규정, 철저하게 비판했다. 그는 묘청의 난을 일러 민족자주적인 낭가(郎家)와 사대주의 적인 유가로의 대결로서 '조선 역사상 일천래의 일대 사건'이라고 표현하고 이 전쟁에서 김부식이 승리함으써 한국사는 진취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사대적·보수적인 유교사상에 의해 정복되었다고 단언했다. 여기에는 그가 고대사를 연구하며 터득한 낭가사상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선교 가운데 선교가 한국의 전통사상이라고 파악하고, 그것을 낭가사상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성균관입장에 보면 애써 가르쳐 놓았더니 모교에 대해 반한 행동을 하는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로인해 유림에선 지금도 단재를 곱게 보지 않는다.

 

단재는 양반 계층 출신이면서도 주자학적 이데올로기를 뛰어 넘어 반제·반봉건적 민족주의를 견지한 것이다. 항일 독립운동을 하면서 쓴 창작소설 꿈하늘용과 용의 대격전, 독립선언서 대한독립선언조선혁명선언등을 통해 그는 이같은 사상을 여실히 드러낸다. 꿈하늘37살인 1916년에 쓴 대표적인 창작소설. 단재는 이 소설에서 자신의 필명인 '한놈'을 이란 주인공을 통해 자신의 전투적인 인생항로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소설은 민족자강과 항일 독립의식을 환상적으로 형상화한 독립운동의 교재요, 민족혁명의 독본이었다. 이같은 사상으로 무장한 단재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18년 만주에서 행해진 대한독립선언에 가담한다. 이 독립선언서는 "우리 대한 동족남매와 온세계 우방동포여,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 독립과 우리들의 평등 복리를 우리 자손 여민에게 대대로 전하게 하기 위하여 여기 이 민족 전제의 학대와 압박을 벗어나서 대한민족의 자립을 선포하노라."로 서두를 시작, "아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 자매여! 국민된 본령을 자각한 독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요.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 평등을 실시하기 위해서의 자립인 것을 명심하도록 황천의 명명을 받들고 일체의 사악으로부터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인하여 육탄 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지어다."라고 끝을 맺고 있다.

 

이 선언서는 평화운동을 선언한 3·1독립선언서에 비해 매우 투쟁적이다. 미온적인 독립운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단재는 19231월 일명 '의열단 선언'이라고 불리는 조선혁명선언을 통해 드디어 민중 직접 혁명을 주장하고 나선다. 이 선언서는 항일투쟁에 있어 하나뿐인 무기가 민중혁명에 있음을 주장하고 민중이 직접 실천해 나가야 한다는 행동지침까지 제시했다. 단재는 이 선언서를 통해 첫째, 근대적인 혁명정신이 집약적으로 체계화된 그 사상의 궁극적인 도달점을 보여주었다. 둘째로는 그의 독립투쟁 방법을 구체적으로 밝혀 볼 수 있는 동시에 국내에서의 식민지를 부정하는 가장 가능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명시했다. 그것은 현실의 파괴로 단재는 '파괴는 곧 건설'이라고 생각했다.

 

- 공작금 마련하다 감옥서 순국, 지행합일 실천

독립운동의 공개문서에서 가장 격렬한 용어인 '강도일본'이란 말로 시작되는 이 선언서는 "우리 2천만 민중은 일치단결하여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 지니라."로 결론을 맺고 있다. 용과 용의 대격전1928년 투옥되기 전에 쓴 민중혁명의 꿈과 이념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우화적인 혁명소설. 단재는 이 작품에서도 꿈하늘과 같이 자신의 민중 혁명적인 전사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고 있다. 이들 작품 속에서 단재는 민족이 사는 길은 혁명 밖에 없는데 이 민족혁명은 역사의 주역인 민중이 해낸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그는 미온적인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에 대해 그들과의 교류를 단절할 정도로 매우 비판적이었다.

 

우리 이천만 형제자매에게 이승만, 정한경 등이 미국에 대하여 위임통치를 청원하고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는 청원을 제출한 사실을 폭로하여 그 죄를 성토하노라. 이승만의 이와같은 청원제출은 곧 19193월 우리나라 독립운동이 일어남과 때를 같이하여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평화회의가 열리고, 민족자결의 소리가 높이 일어남과 같은 시기를 타서 행하여 진 것이다.

 

단재가 192142세에 김창숙, 이극로 등 동지와 함께 위임통치청원을 한 이승만을 규탄한 성토문이다. 단재의 사회사상은 생애 세단계에 걸쳐 변한다. 첫째 시기는 시민적 민족주의(18981922)이고, 둘째 시기는 혁명적 민족주의(192324)이고, 셋째 시기는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19251936)이다. 둘째 시기부터는 본격적으로 행동하는 지식으로 전환, 변혁을 시도하는 혁명가의 모습을 보였다. 첫째 시기에는 1910년까지 선비사상에 계몽사상과 영웅사관을 갖춘 영향력있는 애국계몽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그 후부터 1922년까지는 열렬한 전투적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으로 그의 민족주의 사상과 운동을 전개했다.

 

충청도 샌님인 단재가 사회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898. 독립협회에 가입, 이 협회가 이해 종로에서 주최한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부터이다. 이 협회가 해산 당할 땐 일시 투옥, 시작부터 쓴 맛을 보기도 했다. 성균관을 수료하고는 1904년 귀향, 한글보급교육을 하며 애국계몽운동을 했다. 위암 장지연의 주선으로 논설기자가 된 1905년부터 5년간은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에서 신문을 통해 민중에게 자립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1907년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 활동했다. 특히 영국인 배설(裵說, 베셀: Ernest Thomas Bethell)이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는 이 당시 국내에서 최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고 일제의 검열을 받는 다른 국내 신문과 달리 할 말은 하는 신문으로 단재를 가장 영향있는 언론인으로 등국시켰다. 이 시기가 첫 단계의 전반기이다.

 

19104월 해외로 망명한 단재는 첫 단계의 후반기에 1914년 백두산·광개토대왕릉 등 한민족의 고대 활동무대 탐사, 1915년 상해서 신한청년회 조직, 1918년 만주서 <대한독립선언>의 민족대표로 참가. 1921년 독립운동을 소개하는 한문체 <천고>지 발행 등의 활동을 했다. ·셋째 단계에서는 1923<조선혁명선언>을 통해 민중의 폭력혁명으로 독립쟁취 주장, 1924<조선상고사> 집필, 1927년 무정부주의 동방동맹(東方同盟)에 가입, 1928년 무정부주의 잡지 <탈환(奪還)> 발간·혁명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 집필 등을 통해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단재는 특히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도 참가, 의정원 의원·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지만 외교론자인 이승만과 노선이 맞지 않아 공직을 사퇴하고 주간지 <신대한(新大韓)>을 창간,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과 맞서기도 했다.

 

이같이 앎과 함을 몸으로 실천해온 단재는 1928년 공작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만 기륭항에 상륙하다 일경에 체포돼 감옥에서 1936년 생의 최후를 맞아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을 당당하게 보여주었다.

 

沒有自由眞痛苦, 出恭也被人制裁.

開籠之前腸不痛, 腸痛之時籠不開.

자유가 없는 것 참으로 고통스럽네

변소 가는 일조차 제재 받다니.

배 아프기 전에는 감방 문 열리더니

배 아플 때 감방 문 열리지 않네.

 

단재가 감옥 속에서 자유를 빼앗긴 고통을 노래한 <구속 받는 일(限制)>이란 시로 옥중일기에 나타낸 그의 감정은 오히려 차분하며 어조가 매우 담담하다. 50대 초반의 나이가 시속에 배어 나온다. 이에 단재 신채호는 근세가 낳은 가장 '위대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고 확언한다. 언행일치도 어려운데 생각과 행동을 같이 한다는 것은 더 어려운 것이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 말로만 민족을 외치면서 실은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챙기는 사람은 결코 그런 행동을 할 수 없다. 지극히 단재 다운 행동이며 단재 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이것이 대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식인으로 꼽는 신채호의 위대함이리라.

 

 

4. 마지막 고구려인

 

주몽은 오이, 마리, 협부 등 세 벗과 도망하여 강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리가 없어 강을 건널 수 없었고 추격병이 곧 뒤따라 오고 있었다. 주몽이 강물에 고하여,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외손이다. 이제 도망하여 여기까지 왔으나 추격병이 쫓아오고 있다. 어찌하면 좋겠는가."고 외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이어주니 강을 건널 수 있었다.……주몽이 모둔곡에 이르러 세사람을 만나, 그들과 더불어 졸본천으로 갔다. 그곳 땅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또한 산천이 험하였다. 마침내 이곳에 도읍하기로 하였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고()를 그의 성씨로 삼았다. 그 때 주몽(朱蒙)의 나이 22세이었다.

 

삼국사기고구려 본기, 시조 동명성왕편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우리 민족의 상고사는 단군의 고조선(古朝鮮)에서 시작된다. 고조선이란 용어는삼국유사(부산유형문화재 31)에서 나왔다. 고려 충렬왕 때 이를 엮은 보각국사 일연(一然)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朝鮮)과 위만조선(衛滿朝鮮)을 구분하기위해 처음 사용했던 명칭이다. 고조선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기원전(BC) 2333년 건국됐으나 역사서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BC 7세기 초이다. 이 무렵에 저술된 <관자(管子)>발조선(發朝鮮)’이 제()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발해만(渤海灣) 북쪽에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삼국유사는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와 쌍벽을 이루는 역사서.

 

고조선은 지금의 한반도 북부와 요동요서지방을 다스렸으며 BC108년 한 무제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다. 고조선이 쇠퇴할 무렵인 BC1세기경 한민족의 한 갈래인 부여(夫餘 )가 등장, 고조선의 북쪽, 즉 지금의 만주지방을 다스렸다. 그러나 고조선이 멸망하자 광활한 영토를 구축하고 있던 부여 또한 이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자랑스런 고구려가 이 혼란한 격변기를 전후로 해 역사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낸다. 부여에서 한 갈래를 이끌고 남하한 주몽(동명성왕)이 고조선과 부여의 유민과 압록강 유역의 토착민을 모아 BC37년 건국한 나라가 바로 고구려이다. 고구려는 깊은 계곡과 험한 산이 있는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유역의 졸본 지방에 최초로 형성됐다.

 

人生四十太支離, 貧病相隨暫不移.

最恨水窮山盡處, 任情歌曲亦難爲.

인생 사십 년 지리(支離)도 하다

병과 가난 잠시도 안 떨어지네

한스럽다 산도 물도 다한 곳에서

내 뜻대로 노래 통곡 그도 어렵네

 

단재가 1914년 고구려 유적지를 돌아보고 백두산에 올라 지은 <백두산 도중(白頭山途中)>이라는 시의 첫 수이다. 어둠의 시대를 사는 독립운동가의 '일모도원(日暮途遠)'한 심경이 절실하게 담겨 있다.

 

고구려인은 고구려 와당의 귀신상과 사신도(四神圖)의 벽화에 잘 나타나 있듯이 힘과 정열이 넘쳐 무()를 숭상하고 말 타기와 활 쏘기에 능해 광활한 영토를 지배할 수 있었다. 고구려는 15대 미천왕(300331) 때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 한반도에서 한사군을 완전히 몰아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고 17대 소수림왕(371384) 때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정치적 안정기반을 구축했다. 고구려의 최대 전성기는 광개토대왕에서 아들(장수왕)손자(문자명왕)에 이르는 3. 19대 광개토대왕(391413)은 남으로 백제의 한성을 침공, 임진강과 한강까지 진출하고, 북으로는 후연(後燕)을 쳐서 요동(遼東)을 차지하고 숙신(肅愼)을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했다.

 

20대 장수왕(413491)은 부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제도의 정비와 대외정책의 확대 등으로 최대 전성기를 맞이했다. 427년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수도를 고조선의 문화 유산지인 평양으로 천도, 집권적 정치기구를 정비하고 국력을 신장시켰다. 장수왕의 남하정책의 목표는 한강 유역이며, 그 요충지는 충주 지방였다. 475년 결국 그는 백제의 한성을 침공, 아산만까지 진출해 한강 유역을 지배했다. 그리고 21대 문자명왕(492519)494년 부여를 완전히 복속시켜 고조선의 요동요서와 부여의 만주를 되찾고 한반도의 충주지역까지 진출, 우리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중국과 자웅을 겨루었다. 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충주의 중원고구려비가 당시의 광대한 판도를 엿 볼 수 있게 한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인물은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수나라의 30만대군 무찌른 을지문덕. 그는 수나라의 대군을 맞아 교묘한 유도와 심리작전으로 국내 깊숙이 끌어들여 결정적인 공격을 함으로써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의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이른바 살수대첩이다. 그러나 668(보장왕 27) ·당 연합군과의 싸움에 패함으로써 주몽 이래 700여 년을 이어온 고구려는 막을 내렸다. 이때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고 설인귀로 하여금 통치하게 하고, 고구려의 영토를 9도독부(都督府) 42()로 나눠 지배하는 한편, 28,200호를 당나라로 강제 이주시켰다. 멸망 전 고구려의 총 호수는 697,000이고, 성곽 수는 176에 달했다.

 

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펄펄 나는 꾀꼬리는

암수가 서로 정다운데

외로운 이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2대 유리왕(BC 19AD18)이 한()나라로 간 계실 치희를 그리워하며 지은 황조가(黃鳥歌)가 고구려의 멸망을 더욱 애달프게 한다.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어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던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우리 역사상 가장 통탄할 비극적인 사건이다. 같은 피를 이어 받고 같은 말을 쓰는 단군의 자손이라는 민족애를 저버리고 한반도 남쪽에 손바닥만한 땅을 차지하고 있던 신라의 안녕만을 위해 취한 사대주의적 발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외세를 끌어 들어 무엇을 얻었는가. 결국 전리품으로 고구려 땅만 당나라에 넘겨주었다. 이같이 참담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민족정기를 살려 고구려의 잃어버린 옛 영토를 찾기 위해 역사상 선각자들이 수차례 나섰는데, 다음의 그는 누구인가?

 

민족사관을 확립한 그는 고구려의 활동 무대였던 만주를 우리 민족 구성요소 안에 포함시킨 국토관을 갖고 발해를 재발견하는 역사관을 제시한다.

 

발해는 대조영이 698년 고구려유민을 규합해 만주 동부지방 길림성 돈화현 부근의 동모산 기슭에 건국해 230년간 존재했다. 현재 남아 있는 오동산성과 성산자산성이 바로 그 유적지이다. 20058월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발해 성터에서 발굴된 고구려식 발해 쌍 구들 온돌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 역사임을 재확인해 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그는 우리 역사에 주족(主族)의 개념을 설정, 단군 부여 고구려를 아()로 보고 신라보다는 고구려를 중시, 발해를 우리 민족사에 편입하고 단군-부여-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국가로 중시했다. 그가 살던 고향(청원)도 고구려시대에는 낭비성이었다.

 

190850회에 걸쳐 대한매일신보에 발표한 독사신론에서 그는 고대사의 정통을 단군에서 기자(箕子) 위만(衛滿)으로, 혹은 기자 삼한(三韓)으로 계승시키던 종래의 역사 인식 체계를 거부하고 단군에서 부여 고구려로 계승 체계를 전환, 부여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인식 체계를 제시했다.

 

1924년을 전후해 완성한 조선상고사총론에서 아()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역사관을 정립한 그는 언어, 인종(혈연공동체), 국토(토지) 등을 민족을 구성하는 가장 주요한 요소로 보았다.

 

이에 따라 그는 부여족이 단군족을 계승하면서 뒷날 고구려로 이어지는 것으로 이해했다. 종래 사학계에서는 단군을 정통으로 단군 기자 위만(삼한은 부속) 사군이부 삼국 통일신라로 계승하거나 혹은 단군 기자 삼한(혹은 마한) 삼국 통일신라로 계승된다는 두 계통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두 흐름을 모두 거부하고 단군의 정통이 부여, 고구려로 계승된다는 새로운 역사 체계를 제시했다. 따라서 삼국사기이래 신라 중심으로 짜여 있던 한국사의 체계가 그에게서 부정되었고 거기에 따른 파장으로 발해사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었다.

 

그는 또 고려시대 묘청의 칭제북벌론을 삼국 통일 이후 처음으로 중국에 대해 근본적인 반기를 들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높이 평가한다.

 

1925년 동아일보에 게재한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는 글에서 그는 묘청이 일으킨 서경 천도 운동의 이면에는 낭(郎 佛 儒) 3가의 쟁투가 감추어져 있었다고 보았다. 이 싸움은 곧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다툼이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낭불 양가는 패퇴하고, 유가가 집권해 민족의 진취적인 기상이 소멸되었다고 보았으며, 김부식 등이 편찬한 삼국사기를 그 산물이라고 보았다.

 

그는 신라의 국선(國仙)이 고구려의 선인(先人 仙人)과 통한다고 생각하고, 화랑은 본래 상고 시대 소도 제단(蘇塗祭壇)의 무사로서 당시에 선비라고 일컬어지던 자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을 도교의 선()으로 오인해서는 안 되며, 우리의 전통적인 선 사상을 낭가 사상(郎家思想)이라 함이 옳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낭가 사상은 고려 시기까지 면면히 이어지다가 윤언이와 묘청, 정지상 등이 주장한 칭제북벌론의 사상적 기반이 됐다. 하지만, 묘청이 중국의 사상에 휩쓸린 김부식 무리에 의해 타도되니,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위치를 잃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낭가의 독립 사상이 설 자리를 잃고 사대주의가 판을 치게 되었으니, 이 사건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할 만하다고 그는 평가했다.

 

그는 특히 고구려의 읽어버린 우리의 옛땅 만주를 회복하려했던 고려 최영을, 살수대첩의 고구려 을지문덕, 왜군을 격퇴한 근세조선 이순신과 함께 우리의 민족의식을 높인 3대 영웅으로 꼽고 민족혼을 일깨운다. 그의 호도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에서 회군, 정권을 찬탈 한 후 그의 아들 이방원(李芳遠조선 태종)이 뜻을 떠보려고 읊은 <하여가(何如歌)>에 대해 답한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에서 따왔다.

 

이런들 엇더며 져런들 엇더료,

만수산 드렁츩이 얼거진들 엇더리,

우리도 이치 얼거져 백년지 누리리라. (하여가)

 

이 몸이 주거주거 일백번 고쳐 주거,

백골이 진토되여 넉시라도 잇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싈 줄이 이시랴. (단심가)

 

최영은 고려 말 공민왕과 우왕 때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을 수차례 물리치고, 1388년 요동 정벌을 계획했다가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좌절된 후 1388(우왕 14) 참형됐다.

 

위화도회군은 우왕 때 요동정벌에 나선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군사를 회군한 사건으로 13883월 명나라가 쌍성총관부 관하지역을 영유하기 위해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자, 최영이 중심이 돼 명의 대()고려 전진기지인 요동정벌론을 제기하면서 비롯됐다. 이에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아 평양에 나아가 독전하게 하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요동정벌론에 반대한 이성계가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소국은 대국을 섬기는 것이 나라를 보호하는 길이라는 등의 이유를 내세워 회군해 권력을 잡아 조선창업의 기반을 구축했다.

 

위와 같이 1세기 전 그가 역사 속에서 찾으려 했던 잃어버린 고구려의 옛땅과 고구려인의 높은 기상이 최근 중국의 동북연구공정에 의한 고구려사 왜곡으로 다시 빼앗길 위기에 처해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그가 바로 투철한 민족주의 사가이자, 불굴의 독립운동가요, 한국근대사에 고봉을 이루는 언론인이었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이다. 단재가 이같은 사실을 무덤 속에서 안다면 뭐라고 분노할까? 단군-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우리 고대사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고 지켜야겠다. 고구려의 구토를 찾기 위해서는 단재와 같은 제2, 3의 고구려인이 계속해서 나와야 한다.

 

 

5, 단재가 세운 민족주의

 

축구만큼 민족애를 불러일으키는 경기는 없다. 국가간의 축구경기는 전쟁이라도 하듯 각 편의 국민을 하나로 묶어준다. 경기 내내 자기편 선수들과 희노애락을 함께 한다. 우리도 지난 월드컵 때 4강에 오르며 짜릿한 감동을 수차 맛보았다. 수백만명이 거리로 나와 하나가 되기도 했다.

 

민족주의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국민의 인권과 자유를 존중하면서 국민국가를 형성하고 발전시키려는 국민주의는 긍정적인 민족주의다. 그러나 부국강병을 표방하며 국가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국가주의적 민족주의는 많은 폐해를 낳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자국의 팽창과 강대화를 위해 타민족을 침략하고 억압한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다. 이에 저항해 자국의 독립과 국가형성을 주장한 사상이나 운동은 저항적 민족주의라고 불린다.

 

저항적 민족주의는 식민지 민족주의로 자본주의가 무르익어 제국주의의 단계로 접어든 시기에, 제국주의의 압제하에 신음하던 식민지에서 일어난 민족주의이므로, ()제국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지닌다. 고전적 민족주의는 자본주의가 봉건세력의 억압에 항거해 성장하는 과정에서 탄생된 민족주의였으므로, 한결같이 반()봉건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에따라 식민지 민족주의는 고전적 민족주의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다.

 

제국주의(帝國主義, Imperialism)1국의 정치적경제적 지배권을 다른 민족국가의 영토로 확대시키려는 국가의 충동이나 정책이라고 요약된다. 제국주의란 말이 사회적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1877년 러시아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려 했을 때 영국의 총리 B.디즈레일리가 무력행사에 의한 강경정책을 취해 이른바 징고이즘(Jingoism)이 생겨난 이후부터이다. 이 때부터 제국주의는 종종 열광적인 주전론(主戰論)과 같은 뜻으로 쓰이게 됐다.

 

식민지 중에도 제국주의와 결탁한 토착의 봉건세력이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돼 민족주의의 신장을 억제하는 경우에는 반봉건적 성격을 띠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 경우에도 민족주의의 주요한 적은 토착의 봉건세력이기보다는 그 배후조종자인 제국주의자였다. 그러므로 반제국주의야말로 식민지 민족주의와 고전적 민족주의를 구분하는 기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일제(日帝)의 압제하에서 일어났던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이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식민지 민족주의의 성격을 잘 말해 준다.

 

민족주의 (民族主義, Nationalism)는 민족에 기반을 둔 국가의 형성을 지상목표로 하고, 이것을 창건(創建) 유지 확대하려고 하는 민족의 정신상태나 정책원리 또는 그 활동이라고 요약된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본래 매우 비합리주의적이고 다의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이것에 일률적인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식민지 민족주의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동부아시아에서 태동해 서남아시아,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등 식민지·반식민지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역사의 추진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나는 네 사랑

너는 내 사랑

두 사랑 사이 칼로 써 베면

고우나 고운 핏덩이가

줄줄줄 흘러내려 오리니

한 죽먹 덥썩 그 피를 쥐어

한 나라 땅에 고루 뿌리리

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피어서

봄맞이 하리

 

1913년 단재가 상해에서 쓴 <한나라 생각>이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민족사학자, 항일 독립운동가. 언론인, 계몽사상가, 문학가 등으로 불려지지만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항일과 독립을 위한 나라사랑으로 귀결된다. 단재의 나라사랑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단재가 남긴 글을 통해 그 해답을 찾아 보자.

 

열강이 모두 열성으로 이 제국주의를 숭배하며 서로 다투어 이 제국주의에 굴복하여 세계 무대가 활발한 제국주의를 이루었도다. 그러한즉 이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갈오대 민족주의(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아니하는 주의)를 분발할 뿐 아니라 이 민족주의는 실로 민족을 보존하는 방법이라 이 민족주의가 강건하면 나파륜(나폴레옹) 같은 큰 영웅으로도무삼 연고인가. 곧 한국 사람이 민족주의가 어둔 까닭이라. 바라노니 한국 동포들은 민족주의를 크게 분발하여 우리 민족의 나라는 우리가 주장한다 하는 말을 뇌수에 새기며 우리 민족이 아니면 우리는 반드시 해롭게 한다는 귀결로 몸을 호위하는 부작을 심어 민족을 보조할지어다.

 

1909528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단재의 글이다.

 

신채호의 초기 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 중의 하나는 '국민''민족'을 구분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민족'은 근대 이전에는 사용하지 않던 생소한 말이다 'nation'이라는 말이 알려지면서 이와 연관, 사용돼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두 낱말은 전적으로 서구 근대와의 접촉의 산물이다. 그러나 '국민'이나 '민족'을 단순히 영어의 'nation'의 번역어라고 간주하는 것은 대단히 단순한 생각이다. 물론 이 용어가 일정한 영향을 미쳤음은 사실이나 식민지를 경험하고 있는 한반도에서는 'nation'이라는 용어가 삶의 현실을 제대로 담아내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제국주의의 침탈과 이로 인한 식민지화의 과정으로 인해 민족문제가 중요한 것으로 대두되고 이것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삶의 현실을 직시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이인직이 '국민''민족'을 구분하기 않고 오로지 '국민'만을 사용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신채호는 '국민''민족'을 구분해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신채호가 처음부터 이 두 용어를 구분해 엄격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초기의 글을 보면 이 두 용어가 부분적으로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는 경우도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이 사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단재도 'nation'의 영향을 받아 이러한 용어를 사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구체적으로 이 두 용어의 세밀한 차이를 감지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두 용어를 구분하기 시작하는데 특히 민족이란 용어는 식민지와 관련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국주의와 이로 인해 빚어진 식민지 상황과 연관해서는 '민족'이란 말을 사용하게 됐다. 그리해 점차 '국민''민족'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식민지적 상황과 무관하게 근대 국가의 주권재민의 맥락에서 사용하고자 할 때는 '국민'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식민지적 상황과 연관될 때에는 '민족'이란 말을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사태를 잘 보여주는 것이 1909<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이다.

 

단재의 글이라 여겨지는 이 논설은 제국주의의 침탈로 인해 야기된 식민지적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이를 태개할 수 있는 실천으로서 민족주의를 이야기한 대표적인 글이다. 다음 일절은 그가 민족과 민족주의를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고 있는가를 아주 잘 보여주는 경우이다.

 

제국주의로 저항하는 방법은 하()인가. 왈 민족주의<타민족의 간섭을 불수(不受)하는 주의>를 분휘(奮揮)함이 시()이니라. 차 민족주의는 실로 민족 보전의 불이(不二)적 법문(法門)이라.

 

단재는 '국민'이란 어휘를 사용하지 않고 '민족'이란 어휘만을 반복적으로 이 글에서 사용하고 있다.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노력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국민'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민족'이란 말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단재는 식민주의와 관련해 사용할 때에는 이처럼 '민족'만을 사용했다.

 

이 점은 '국민'을 사용한 경우와 대비해 보면 한층 뚜렷하게 드러난다. 다음 일절은 <20세기 신국민>의 한 대목이다.

 

모 학자가 망국의 이유를 설명하여 왈 1, 국토가 협()하고 국민이 소()한 국은 필망하고 2, 국민적 국가가 아닌 국(입헌국이 아니오 일 이 인이 전제하는 국)과 세계 대세를 역하는 국은 필망한다 한지라. 금차(今此) 한국은 삼천리 산하가 유()하니 기 국토가 대()하며, 이천만 민족이 유하니 기 국민이 중()한지라, 연즉(然則) 국민 동포가 단지 20세기 신국민의 이상기력을 분흥(奮興)하여 국민적 국가의 기초를 공고하여 실력을 장하며, 세계대세의 풍조를 선응(善應)하여 문명을 확()하면 가히 동아 일방에 흘립(屹立)하여 강국의 기()를 과()할지며 가히 세계무대에 약등(躍登)하여 문명의 기를 양()할지니 오호라 동포여, 어찌 분려(奮勵)치 아니하리오.

 

국민적 국가를 한 두 사람이 전제하는 나라가 아니라고 하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은 것처럼 국민이란 것은 일반 백성이 국가의 주권을 쥐고 있는 경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왕이 모든 것을 쥐고 있고 백성은 단지 신민의 위치를 점하는 이전과는 달리 백성이 스스로 주권을 쥐고 있는 상태의 국가를 '국민적 국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단재가 '국민'이란 어휘를 사용할 때에는 이는 분명 '신민'과의 대조 속에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권재민의 차원에서 '국민'을 이해하고,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민족'을 파악하는 단재의 이러한 인식은 서구의 근대와 비서구 주변부의 근대의 상이한 길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식민지와 반식민지의 형태로 근대에 편입되는 비서구 주변부의 자기 인식이 있기에 '국민''민족'을 갈라보는 이러한 인식이 가능했던 것이다. 만약 이러한 분화된 인식이 없었다면 이인직의 경우처럼 오로지 '국민'의 틀에서만 모든 것을 무차별하게 보았을 것이며 이럴 경우 식민지의 문제는 안전에서 사라지고 식민주의에 함몰하고 마는 것이다. 식민지에 대한 단재의 이러한 인식은 그가 민족주의에서 떠나 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단재가 민족주의에만 머물 수 없었던 데에는 제국주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싹트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제국주의란 것이 단순한 양육강식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근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한 것이다. 역사상에서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배하는 그런 종류의 것 이상의 다른 무엇이 이 제국주의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그것을 자본주의라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 대한 극복 없이 제국주의에 대한 극복은 불가능하다고 보았기에 한반도가 단순히 자본주의적 근대를 추수해 부국강병에 이르는 것은 근본적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 그는 민족주의가 결코 근본적 대안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여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모색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현상에 주목하면서 조선의 무산자계급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단재는 민족 내부의 계급적 차이에 대해 주목하게 됐다. 이 시기 그의 글에서 무산계급에 대한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당시 일부의 사회주의자들의 인식처럼 계급이 민족을 대신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대 의견을 내놓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근대라 하더라도 식민지와 제국주의 국가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무시하고 그냥 균등하게 볼 경우 조선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신종 식민주의에 함몰될 수 있음을 경계하고 있다. 식민지의 자본주의의 경우 서구 근대의 나라와는 달리 계급과 민족을 통일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단재의 이러한 태도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192512<동아일보>에 발표한 <낭객의 신년만필>이다. 단재는 국제주의의 이름을 내걸고 조선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의 연대를 이야기하는 일부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하고 있다.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적 현실에 대해서는 둔감하면서 오로지 자본주의 자체에만 추상적으로 집착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조선인 중에도 유산자는 세력 있는 일본인과 같고 일본인 중에도 무산자는 가련한 조선인과 한가지"라고 하면서 민족 문제는 제외하고 오로지 무산과 유산의 대립 속에서만 현실을 볼 것을 촉구했다. 이에 대해 단재는 단호하게 비판하는데 다음 일절은 그의 사상을 아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유산계급의 조선인이 일본인과 같다 함은 우리도 승인하는 바이거니와 무산계급의 일본인을 조선인으로 본다함은 몰상식한 언론인가 하니, 일본인이 아무리 무산자일지라도 그래도 그 뒤에 일본제국이 있어 위험이 있을까 보호하며, 재해에 걸리면 보조하며, 자녀가 나면 교육으로 지식을 주도록 하며, 조선의 유산자보다 호강한 생활을 누릴뿐더러 하물며 조선에 이식한 자는 조선인의 생활을 위혁하는 식민의 선봉이니 무산자의 일인을 환영함이 곧 식민의 선봉을 환영함이 아니냐.

 

단재는 이전 민족주의자 시절과는 달리 자본주의의 근대와 이에 따른 계급적 불평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기에 무산계급의 역할을 중요하게 보고 있다. 그런데 식민지 조선의 무산계급과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의 무산계급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기에 민족문제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이 발표될 시점을 전후해 <동아일보>에 자주 보도됐던 것이 나무리벌 소작쟁의였다. 동양척식회사가 일본인 이주민을 정착시키기 위해 기존의 조선인 소작인들에게 발포하고 나아가 중국 동북지방으로 축출한 이 사건이 <동아일보>에 지속적으로 보도됐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최고의 곡창지대였던 재령 평야의 나무리벌에서 일어났던 이 사건을 단재가 알고 있었는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당시 식민지의 무산계급과 제국주의 본국인 일본의 무산계급 사이에는 이러한 차이가 있었고 이러한 것이 줄곧 문제가 되는 현실이 번연히 존재했다는 점이다. "조선에 이식한 자는 조선인의 생활을 위혁하는 식민의 선봉'이라고 했던 것도 이러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국제주의란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하는 점을 단재는 통절하게 인식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발언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단재의 이러한 인식은 1928년 집필한 혁명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지상의 민중을 두 개의 부류 즉 '강국의 민중''식민지의 민중'으로 나누면서 각각의 특징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무산계급이나 민중을 인식할 때 그것을 단순한 계급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식민지의 상항과 관련지어 민족문제의 차원에서 통일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을 통해서 볼 때 민족과 계급의 문제를 통일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단재의 이러한 인식은 당시 일부의 사회주의자들의 견해와 전면 배치되는 것으로 민족주의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단재가 민족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나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단재는 민족주의자 시절은 물론이고 거기에서 빠져 나온 이후에도 줄곧 민족문제에 대한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민족주의자 시절과 그 이후의 사이에는 민족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비서구 주변부의 근대가 지닌 특징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주의자 시절에는 국민주의의 길이 아닌 민족주의자의 입장에 서서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민족의식을 강조했고, 거기에서 벗어난 이후에는 계급의 문제와 민족의 문제를 통일적으로 인식하는 사유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단재는 계몽기 이후 줄곧 자신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식민주의적 사고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행했다고 할 수 있다. <낭객의 신년만필>에 나오는 다음 일절은 이러한 그의 민족의식이 사상적 변모에고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이어져 나온 것이며 또한 그것은 당시의 식민주의자들과의 치열한 이론적 투쟁 속에서 산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늘에 와서 주의를 부르고 강권을 반대하지만 기실은 정부가 민중으로 변할 뿐이며 집정대신이 일본 무직자로 변할 뿐이며, 통감 이등박문(伊藤博文), 군사령관 장곡천(長谷川)이 편산잠(片山潛) 계리언(堺利彦)으로 변할 뿐이니 변하는 자는 그 명사(名詞) 뿐이요, 정신은 의구(依舊)하다.

 

이 글은 국민주의가 횡행하던 1905년을 전후한 시절과 국제주의 이름으로 사회주의가 명성을 떨치던 1920년대 전반기 시절을 중첩시키면서 세월의 변화와 사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속되는 식민주의적 정신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대목이다. 1905년을 전후한 무렵에는 근대 국민주의의 기치 아래 이토 히로부미를 불러들였던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고, 1920년대 전반기에는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가타야마 센을 무비판적으로 끌어들이는 것에 대한 질타이다. 가타야마 센이나 사카이 도시히코와 같은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이 당시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영향으로 말미암아 많은 젊은이들이 급진적으로 사회주의에 경도되면서 민족문제를 몰각했다. 민족을 이야기하면 곧바로 민주의자로 몰아 붙이고 낡은 것으로 치부하는 사상적 경향이 널리 퍼졌다. 이러한 시대적 동향에 대해 단재는 심히 우려했기 때문에 이러한 글을 썼던 것이다. 자본주의적 근대의 모순과 계급의 문제에 눈을 떴던 단재이지만 사회주의를 이렇게 식민지적 조건과 무관하게 받아들이는 경박한 흐름에 대해서는 결코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눈에는 이런 이들이 과거 국민주의의 이름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용인했던 일진회 등의 식민주의자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재는 "변하는 자는 그 명사 뿐이요, 정신은 의구하다"라고 일갈했던 것이다. 계몽기 이후의 근대 역사에서 몸소 겪은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계몽기 이후 단재의 민족문제에 대한 자의식은 그 내적 사상의 변모에도 불구하고 지속됐음을 알 수 있다.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고 한 단재의 경고가 21세기가 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게만 여겨지는 오늘의 현실에서 단재가 갖고 있었던 민족문제에 대한 자의식을 검토하는 것은 결코 과거에 국한된 일만은 아닐 것이다.

 

단재는 민족주의 사상가이자 실천가로서, 혁명적 투쟁의 일관성은 다른 지사들에게서 찾아보기 드문 광채를 발했다. 애국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운동에 투신한 단재는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로 생을 마치지만 그가 무정부주의자가 된 것은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한 수단으로 채택한 것이지 국가나 민족을 버린 것은 아니다. 민족주의는 나라를 찾기 위한 그의 전부였다. 단재는 '대아와 소아'에서 개인은 민족의 가치를 위해 헌신해야하며 이는 필멸의 존재인 소아가 불멸의 존재인 대아가 되는 과정이라 주장했다. 개인의 이익을 넘어선 민족적 대의와, 그를 위한 개인의 헌신에 대한 보상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그의 논리에서는 신채호의 아우라(Aura)가 강하게 느껴진다.

 

나라를 빼앗긴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국의 민족주의라는 사다리를 최초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만든 애국적 목수가 바로 단재 신채호이다. 단재의 민족주의는 생애 3단계에 걸쳐 진화한다. 첫 단계에는 계몽사상이, 둘째 단계에 혁명사상이, 셋째 단계에 무정부주의 사상이 각각 가미된다. 단재의 민족주의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민족 자주독립사상과 민족국가 자결주의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일제시대 일본이 내세운 논리는 대동아공영이다. 이는 서양에 맞서 한일이 단결해 동아시아가 같이 잘 살자는 것으로 동아시아를 식민지화하기 위한 제국주의 논리이다. 일본은 결국 이같은 과욕으로 미국과 소련 등에 의해 패망했다, 이 와중에 한반도는 전승국의 전리품으로 남은 미군이, 북은 소련군이 진주해 분단화되고 말았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것도 이같은 논리로 노일전쟁의 승전에 따른 전리품의 성격이 강하게 작용했다. 이같은 제국주의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민족주의이다.

 

최근들어 국가간에 무역전쟁이 날로 가열되면서 민족주의 색채가 강화되고 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선진강국일수록 더 심하다. 국외적으로는 세계주의를 내세워 시장개방의 확대를 요구하는 반면 국내적으로는 자국의 상품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후진국이 선진국에 진출, 시장을 형성하기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기 만큼이나 어렵다.

 

과거에는 강대국들이 약소국의 영토를 강점, 세력을 확장해 나갔으나 요즘은 글로벌경제체제를 이용, 앞선 신기술이나 신상품을 내세워 경제력으로 후진국을 지배 또는 종속시키고 있다. 특히 자국의 지배체제 유지에 반대하거나 걸림돌이 되는 경우는 전쟁도 불사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주식시장의 약 30%가 외국인에 의해 점령당하고 삼성전자 등 건실한 알짜배기기업들은 주식의 50%가 외국의 손에 넘어가 경영권을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민족주의는 반공주의의 망령이 물러간 지금도 한국 사회의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이다. 일반 대중들과 매스미디어의 의식 저변에는 민족주의가 강력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최근 한중간의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는 고구려사 문제는 1400년 전의 역사가 어떻게 민족주의와 결합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해마다 반복되는 일본 고위 각료의 '과거사 망언'과 이에 격분하는 한국인들의 시위, 역사 교과서 문제, '친일파 문제'를 둘러싼 한국내의 갈등 등 한국 사회의 굵직한 이슈들 속에 민족주의는 빠짐없이 등장한다.

 

무엇보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통일'과 관련해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남과 북은 (실제로는 자기 체제의 이해에 맹목적이지만) '민족의 통일'이 두 정치 집단의 지상과제임을 숨기지 않는다.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은 민족의 번영과 평화를 방해하는 '민족정신이 결여'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민족은 하나'라는 구호는 다양한 민족주의 구호 속에서 제일 영향력이 큰 구호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의심할 수 없는 진리다.

 

한국 사회의 도처에서 민족주의 구호들과 부딪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 당연하고 지극한 명제인 '민족''민족주의'의 실체에 대해서는 학계 일각에서만 논의가 되고 있을 뿐 대중적 차원의 고민과 논의는 부재하다. 우리 시대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민족주의, 그러나 민족주의는 유령처럼 그 실체와 목적이 가지각색의 모양으로 우리 시대 한국인의 마음속에 깃들여 있다.

 

최근 한중일 3국에서 몰아치는 민족주의 바람도 동북아에서 민족주의를 넘어서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패권적 질서가 추구되고 있는 동북아에는 강력한 민족주의 수요가 존재한다. 분단, 영토, 역사 문제 등에 발목을 잡혀 아직 근대국가의 완성이 이뤄지지 않은 탓도 있다. 하지만 감정적 민족주의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동북아의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 무역과 투자, 그리고 다방면의 교류가 파국을 막는 안전장치가 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낙관하기엔 이르다. 고삐 풀린 민족주의를 통제할 지혜는 없을까.

 

철학자 탁석산은 저서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에서 민족주의는 사다리라고 정의하고 사다리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인 것처럼 민족주의도 분명히 상상의 공동체로 만들어졌지만 세계 체제 속의 진정한 시민국가로 나아가는 중요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단재는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주의자였지만 3차례에 걸쳐 사상적 진화를 거치며 국수적이거나 폐쇄적이지 않고 세계를 향한 열린 민족주의자로 생을 마쳤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차를 몰 때 백미러를 보면서 운전하는 것과 같다. 앞으로 실수 없이 바르게 나가기 위해 백미러를 통해 뒤에서 오는 차와 좌우로 지나가는 차를 보면서 운전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면 단재의 민족주의를 통해서는 무엇을 배워야 하나. 그것은 애국애족애민 정신이다. 이를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대전 도리미 단재생가, 그가 한글보급운동을 하던 충북 청원군 가덕면 단재교육원, 청주 예술의 전당, 그리고 과천 서울대공원 등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우리는 단재를 통해 한민족으로서 줏대있는 나를 지키며 세계 시민으로서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배워야겠다.

 

 

6, 민족사관이란

 

역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중국이 우리의 고대사를 왜곡,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황당무계한 역사 도둑질을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군의 자손이라면 이에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역사란 무엇이며 역사는 어떻게 인식해야 하나.

 

민족주의자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71936)와 사대주의자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의 역사관을 비교해 가며 그 해답을 모색해 보자.

 

철학자 탁석산은 20042월 웅진닷컴을 통해 간행한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라는 저서에서 민족주의를 사다리에 비유했다. 민족주의가 세계시민주의로 올라서기 위한 사다리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 비유대로 하자면 단재는 나라를 빼앗긴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국의 민족주의라는 사다리를 최초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만든 애국적 목수. 독립운동을 하던 중 독립(獨立)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爭取)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단재는 이 생각을 우리 역사에 바로 대입시켜 소위 민족주의 사학(民族主義 史學)’을 정립시킨 장본인이다. 민중과 민족을 역사에 전면에 내세운 단재는 역사는 아()와 비아(非我)와의 투쟁이라는 명제를 내세웠다.

 

단재의 사관은 1925년 발표한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는 짧은 논설에 압축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묘청(妙淸)의 서경천도운동을 조선역사상 제일대사건으로 꼽은 이 논설에는 흥미롭게도 김부식이 아주 비중있게 등장한다.

 

고려 인종 5. 인종의 신임을 받으며 왕실고문으로 있던 승려 묘청은 수도 개경의 기가 다했다고 주장하며 서경(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자신의 서경 천도론이 인종의 망설임과 다수 고려 대신들의 강려한 반대로 좌절될 상황에 이르게 되자 묘청은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로 정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바로 이것이 국사시간에 우리가 배운 묘청의 난이다. 이전 역사가들이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은 이 사건을 단재는 조선 역사상 제일대사건이라고 주장했다. 단재가 왜 이 사건에 주목했을까?

 

그 실상은 이 전역(전쟁을 의미)이 즉 낭()()양가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이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이었던 것이다. 이 전역에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겼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단재는 이어 김부식과 그가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보물 제722)를 매우 강력히 비판한다.

 

김부식이 이상적으로 생각한 것은 조선의 영토를 대동강이나 한강 이남으로 바짝 줄이고, 조선의 제도, 문물, 풍속, 습관 등을 모두 유교화하여 삼강오륜의 교육이나 받게 하며, 외국에 사신 다닐 만한 사람이나 길러 동방 군자국이라는 칭호나 유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중략) 그러던 중 천년에 한 번 얻을 서경 전역(서경천도운동)의 승리를 기회삼아 그의 사대주의를 근거로 하여 삼국사기를 지을 때, 사대주의에 맞는 사료는 길게 설명하고 추켜올리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료는 깎아 내리거나 지워 없애 버렸다.

 

그렇다면 삼국사기가 단재의 말대로 사대주의에 찌든 역사서일까. 분명 그런 점이 있다. 김부식은 송나라를 고려가 따라야 할 이상향으로 생각했고 고려가 송을 섬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도 이 나라들이 중국과 신라에 대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그간 설화나 신화에 의존하던 역사서술에서 벗어나 문헌기록을 중시하고 기록된 사료의 사실 여부를 적극 검토하는 등 실증성에 있어서 우리나라 중세사학에 결정적인 공헌을 세운 책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유학자들이 삼국사기가 너무 덜 사대적이라고 비판한 것처럼 나름대로 자주성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삼국사기의 편찬은 김부식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인종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이루어진 국책사업이었다. 묘청 사건으로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인종과 유교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던 김부식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다목적 카드가 바로 삼국사기였다. 또 김부식으로서는 본인의 사상도 사상이지만 자신이 반대했던 서경천도의 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사대주의를 역사 서술의 기본축으로 삼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일제에 대항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던 단재 입장에서 보면 이런 관점은 망국의 근원이요 폐기해야 마땅한 반동적사관이었다.

 

신채호와 김부식은 일제와 고려 인종 때의 인물로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묘청이란 매개인을 통해 대척점에 섰다. 단재는 역사를 조선독립의 사상적 원천으로 생각했다. 그의 민족사학은 당시 그 어떤 역사학보다 진보성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에 부역한 친일 사학자들과 굳이 비교하지 않더라도 단재의 사학은 우리 역사를 확장하고 민중과 민족을 중요시함으로써 근대사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는 적극적인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반면 김부식은 신라 왕실의 후예(단재는 신라의 공족)로서 묘청을 죽이고 개혁파 정지상을 탄핵한 보수 정치가였고 유교로서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고 생각한 유학자였다. 삼국사기는 그의 이런 정체성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역사서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정의 한다. 단재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나아가 우리 민족의 자강을 위해 과거와 대화했다. 을지문덕, 연개소문, 이순신 등 영웅들을 살려내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고 민족과 민중을 내세워 우리 역사를 재해석했다. 그는 역사를 조선 독립의 사상적 동력으로 삼고자 했고, 이런 맥락에서 고대사를 전면적으로 다시 정리했다. 반면 김부식은 고려 체제의 안정을 위해 과거와 대화했다. 그는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를 지키기 위해, 유교정치를 확립하기 위해 역사를 연구했다. 똑같이 과거와 대화했으되 단재는 그것으로 현재의 상황을 바꾸려고 했던 것이고 김부식은 현재를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

 

단재와 김부식는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에 대해서도 걸출한 민족영웅잔인한 독재자라는 완전히 상반된 평가를 내렸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단재와 김부식은 아주 상반된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평가도 서로 다르다. 그러나 아직도 김부식의 역사인식에 동조, 그가 살았던 시대를 감안해 그를 평가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들도 있다. 말도 안된다. 그런 논리라면 고대사는 중국의 입장에서, 일제강점사는 일본의 입장에서 그리고 현대사는 미국의 입장에서 정리해야 된다는 말인가라고 묻고 싶다. 단재와 같이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조명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 아닌가.

 

에드워드 카가 그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지적한 것 처럼 역사는 객관적일 수 없다. 결국 우리 한국사는 우리의 시각으로 과거의 우리 것을 오늘의 우리가 미래의 우리를 위해 기록하는 것이다.

 

단재는 이에 대해 1924년 발표한조선상고사총론에서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정의했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 사회의 아()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발전하며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라,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 하면 조선민족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상기와 같이 민족사관을 정립한 단재의 역사관은 그가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따라 변화를 보인다. 즉 그의 초창기 사관은 소수의 영웅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영웅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 속에서 위인의 역할을 가장 중시한 영국의 의역사가 칼라일은 저서 영웅 및 영웅숭배론에서 세계사는 근본적으로 영웅들의 역사라고 단적으로 정의한 바 있다.

 

그러나 단재는 그 후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우리 고대사 연구를 통해 영웅사관을 극복하고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후에는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혁명을 주도해야 항일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 폭력적 항일운동과 무정부주의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렇듯 단재는 독립운동가로서 국권을 회복하고자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강구한 것이다. 그가 국사 연구에 특히 가치로 두었던 것도 이것을 통해 민족의 자강과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뤄볼 때 그의 민족사관은 민족의 자강과 독립이라는 사상적 바탕위에서 성립된 것이다.

 

단재의 사관을 한눈에 조명해 볼 수 있는 논설은 현대실학사가 1995년에 낸 신채호 역사논설집에 실려 있다. 36편의 역사논설이 실려 있는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01. <단재사학의 출발> 02. 독사신론 03. 조선 상고사 총론 04. <고대사 연구> 05. 전후 삼한고 06. 평양패수고 07.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연도에 대하여 08.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09. 삼국사기 중 '동서' 양자 상환고증 10. 고사상 사독문 명사 해석법 11. <역사 논설> 12. 조선사 정리에 대한 사의 13. 조선 민족의 전성시대 14. 한국의 제1호걸대왕 15. <사회와 혁명> 16. 영웅과 세계 17. 국한문의 경중 18. 일본의 큰 충노 세사람 19. 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 20. 정신상 국가 21. 동양주의에 대한 비평 22. 20세기 신국민 23. <문학과 소설> 24. 천희당시화 25. 문예계 청년에게 참고를 구함

 

민족사관(民族史觀)은 민족주의 역사관의 약칭으로 식민사관의 대응개념이며 우리 역사를 우리가 자율주체적으로 발전시켜 민족사의 기원을 밝히는 역사관이라 할 수 있다. 한말 계몽주의가 일제 제국주의 논리 속에 함몰되는 상황에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역사학의 연구로 등장한 것이 바로 민족주의 역사이다.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는 단재 신채호와 그의 스승 백암 박은식(朴殷植)에 의해 비롯된다. 그러나 단재는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독사신론(1908)<동아일보>에 발표한조선사연구초(192425)를 통해 우리의 상고사를 민족적, 주체적으로 본 반면 박은식은 저서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통해 세계적, 평등적 근대적 관점을 내세웠다.

 

단재와 백암의 역사학은 민족주의사관과 근대적인 역사학방법론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공통되지만 양자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단재가 특히 고대사에 더 관심을 쏟았다면, 백암은 근대사에 더 관심을 쏟았다. 이는 백암이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비판하고 민족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반면, 단재는 한국민족의 강국시대였던 고대사를 웅혼한 모습으로 복원하는 데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서술을 통해 민족혼을 되살리고자 했던 점은 양자에 공통된다. 신채호의 고대사에 대한 인식은 실학자 이종휘(李種徽, 17311797)동사(東史)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며 단재는 그를 조선후기 역사가중 가장 주체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민족주의는 그동안 한국사 서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이유는 먼저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필두로 한 중화주의 역사관을 극복하기 위함이고 두 번째로는 일제치하에서 국사 연구를 하던 사학자들이 일제의 식민주의 역사관과 맞서기 위한 방편으로 국사 연구에 민족주의를 결합시킨 것이다.

 

단재의 주장은 그 후 정인보(鄭寅普)에 의해 실증적으로 입증되고, 안재홍(安在鴻)과 문일평(文一平)에 의해 이론화대중화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단재 사후인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고대사 연구에 몰두한 안재홍은 민주주의를 성취, 민족을 구성하는 여러 사회계층 상호간의 대립반목을 해소하고 타민족에 대해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는 신민족주의론(新民族主義論)을 정립, 단재의 연구를 발전시켰다.

 

 

7, 단재의 유고와 가족들

 

단재(丹齋) 신채호(申寀浩)의 유고는 어디에 있는가? 그의 유고는 현재 남·북과 중국 북경 등에 소장돼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남한에는 조선사연구초, 독사신론, 조선상고사, 상고문화사, 전후삼한고,최도통전과 친필 편지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나 일부 편지 외에는 소재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남에 있는 단재 유고는 그의 4자녀(관일(貫日수범(秀凡수정(秀晶·두범(斗凡)) 중 둘째 아들 수범이 가지고 있다가 유출했다. 단재의 자녀들은 수범만 1991년까지 생존하고 나머지는 유아 또는 소년시절 요절, 수범을 통해 단재의 혈통이 이어지고 있다.

 

생존시 수범(19211991)에 의하면 일제시대 서울에서 한성상업학교를 나온 그는 19살 때 부친의 족적을 찾기 위해 북간도로 이주, 이곳에서 마전금융단에 다니다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그는 제 때 귀국하지 못해 38선이 막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북한(평양 기림정)에 머물를 수 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평소 주민들을 괴롭히던 '세포위원'을 살해하고, 단신으로 195012월 그리던 고향을 찾아 남하했지만 그를 반기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따라 그는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으로 거제도에서 수용소생활을 하다 1953년 풀려나 고향(충북 청원)을 찾았다. 이 때 그는 근친인 경부 신백우(申伯雨, 박정희 대통령시절 문화공보부장관을 지낸 신범식(申範植)부친)로부터 그가 간직하고 있던 부친의 육필원고 조선사연구초, 독사신론, 조선상고사, 상고문화사, 전후삼한고와 편지를 받았다. 고향을 찾았으나 의지할 곳이 마땅치 않자 1954년 그는 부산으로 내려가 피난민 수용소에 몸을 다시 의탁했다. 이곳에서 돈이 궁하자 그는 부친의 유고를 수용소 동료에게 팔았다. 그러나 이것은 수범에게 평생의 한이 되었다. 이 때 일을 후회하고 뒤늦게 그가 소장자를 찾아 나서 전라도 지역에서 전후삼한고만 겨우 찾아 복사해 온 것이 유족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단재의 유고이다. 모 출판사 사장도 고서가에서 수범이 가지고 있던 단재의 편지 일부를 구입,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피난민 수용소에서 수범이 판 부친 단재 유고는 대부분 남의 어딘가에 확실히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단재가 도산 안창호에게 보냈던 육필 편지는 천안 독립기념관과 서울 도산안창호기념관(서한 등 19)에 소장돼 있다, 독립기념관에는 단재 어록비도 본관 왼쪽의 잔디공원에 세워져 있다. 고향에 있는 단재기념관에는 이같은 이유로 육필원고가 한 건도 소장돼 있지 못하다.

 

북에는 무게가 110에 달하는 단재 유고가 있다. 단재 연구, 특히 원본비평에 중요하게 기여한 중국의 연변대 교수 김병민(金柄珉)에 의하면 단재의 유고뭉치가 "광복 후 중국 주재 조선대사관을 거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전해졌"는데, 1962년경 "김책공업대의 한 교수가 국립중앙도서관 서고에 들어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큰 주머니 속에 넣어져 있는 단재 선생의 유고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현재 이 유고는 평양 인민대학습장에 소장돼 있다. 단재가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만에 갔다 체포돼 러시아령 대련감옥에 투옥되기 전 기거하던 중국 북경의 하숙집 주인이 가지고 있던 것이 이 유고이다.

 

이곳에 있는 역사서는 조선사통론, 고구려사등이 대표적이다. 소설은 그의 대표적인 꿈하늘, 용과 용의 대격전을 비롯해 건륭황제의 꿈,백세 노승의 미인담, 일목대왕의 철퇴등이 있다. 시는 <새벽의 별>. <금강산>, <너의 것>, <큰 바람>, <고려영>, <현랑사의 불상을 보고>, <나비를 보고> 등이 있다. 이밖에 기행문 등도 많은 유고가 이곳에 있다. 단재가 생의 최후에 가지고 있던 육필원고의 대부분이 이곳에 있어 단재연구를 위한 남북교류가 시급한 실정이다.

 

북에 소장돼 있는 유고 중 일부 문학작품들은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가 낸 단재신채호전집하권과 별집에, 그리고 북한에서 공부를 한 중국 연변학자 김병민이 필사해와 한길사 등 출판사를 통해 꿈하늘신채호유고집으로 남에 소개된 바 있다.

 

단재신채호전집에 실린 작품들은 19662월 북에서 간행된 단재 유고집 용과 용의 대격전에 담긴 내용으로 이 당시 평양에 갔던 일본인 학자에 의해 이 유고집이 서울에 전해져 때마침 전집발간에 착수한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가 197712단재신채호전집별집에 실은 것이다. 단재의 유자 수범이 나에게 확인해 준 사실이다.

 

특히 우리민족의 주체의식을 강조한 단재의 유고들은 남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지만 북에서는 김일성 주체사상(主體思想)의 토대로 바이블처럼 섬기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단재의 가족들도 북에 자부(權賢淑)4명의 손자·(신자(信子춘자(春子영철(永徹·진자(珍子))가 있으나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권현숙은 수범의 첫번째 부인이며 영철이 생존해 있다면 단재의 장손이다.

 

단재가 망명 후 주무대로 활동했던 중국에도 북경대 도서관에 그가 낸 <천고(天鼓)>지가 소장돼 있는 등 많은 유고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나 소재지를 찾지 못하고 있다. 천둥에 비유한 '천명(天命)의 소리'란 뜻의 이 잡지는 19211월 한문으로 1권을 시작, 모두 7집까지 발행됐으나 현재 북경대 도서관에는 1~3집만 소장돼 있다. 국내에는 이중 '1 2집이 20043월 고려대 아연출판부에 의해 단재 신채호의 천고란 이름으로 출간, 소개됐다.

 

1999년 북경대 초청으로 역사학계(사학과)에서 한국 고대사를 강의하던 중 도서관에 소장된 <천고> 1~3집을 확인, 국내에 소개했던 고려대 교수 최광식(한국사학)이 역주한 것으로 독립운동사 연구는 물론 단재의 고대사 인식의 형성과 변천과정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될 전망이다. 여기에 <천고> 3집 중 최광식이 복사한 '고고편'이 덧붙여졌다.

 

<천고> 2집의 전체 내용이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역주된 <천고> 1 2집이나 3집의 목차를 보면 독립운동과 관련된 논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고대사 논문이 하나씩 실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문으로 간행된 것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을 독자층으로 겨냥했기 때문이다.

 

편집인(단재)이 쓴 <천고창간사>는 일본이 우리만이 아닌 동양의 구적(仇敵)으로 (중국과 한국)이 입술과 이(순치 脣齒)의 관계임을 일깨워 주고 우리의 투쟁노력들을 널리 찾아 이웃나라 인민들에게 소개하며 (일제의) 역사왜곡을 바로잡고 조선총독부의 언론탄압과 왜곡에 맞서 해외에서나마 대의를 널리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잡지 창간이 가진 4가지 의의를 설명하고있다.

 

남의 단재 혈손으로는 수범의 세번째 부인(강릉)이 낳은 희제(熙濟네번째 부인(이덕남 (李德南)의 지원(智媛·상원((尙原족보에는 희상(熙尙)) 3명이 있다. 그러나 희제는 모친이 재가하며 데리고 가 김성환(金成煥)이란 이름으로 살고 있는 반면 두번째 부인 조진순(趙晋淳)이 데리고 온 아들 황경주(黃敬周)는 신희철(申熙哲)로 호적에 등재돼 있다. 이에 따라 수범이 1991년 사망한 후 혈손(상원)과 법률손(희철)'단재 친손가리기'소송이 벌어지지도 했으나 남한에 있는 단재의 사실상 핏줄 장손은 김성환이다. 단재의 장손가리기는 통일후에나 정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단재는 생존시 그렇게도 고대하던 조국이 독립되었건만 미국과 소련 등 외세에 의한 해방으로 민족이 남북으로 분단, 단재의 유고와 가족들은 아직도 이산의 아픔을 겪고 있다.

 

 

민족지성 신채호(신충우 저/ 한림원)에서 발췌

[출처] [254] 대학생이 가장 선호하는 지식인 신채호|작성자 자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