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문학] 한여름에 읽는 독일 서정시의 황홀경
위대한 시인, 자유를 독백하다
김재혁 시인·고려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시의 근본에는 시인의 고백이 깔려 있다. 괴테도 고백했고 횔덜린도 고백했으며 첼란도 고백했다. 괴테는 자신을 고백하여 천상에 이르고자 했고, 횔덜린은 시인의 사명을 설파했으며, 첼란은 존재의 어둠 속에서 침묵의 심연에 이르렀다. 한여름에 읽는 독일 서정시의 세계에는 거듭 읽어도 줄지 않는 언어의 기쁨이 있다. 그 향연에서 우리는 날카로운 쾌락과 정신의 상승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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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시를 앞에 두고 독자로서 우리는 고민을 하게 된다. 이 시는 무엇을 뜻할까? 시인은 이 시로써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 그런데 이런 고민이 과연 필요할까? 화가 렘브란트는 말한다. “내 그림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지 말라. 그림물감은 몸에 해로우니까.” 굳이 예술작품을 속속들이 뜯어볼 필요가 있을까? 오스트리아의 시인 후고폰 호프만스탈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시의 뒤쪽에 무엇이 있을까, 본래적인 어떤 뜻이 있을까 하여 그것을 찾으려 한다. 이것은 마치 원숭이가 손에 들고 있는 거울 뒤에서 자기 모습을 손으로 더듬어 찾으려는 것과 같다.”
시는 무엇의 대용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다. 특히 언어로 만들어진, 그러나 평상시에 우리가 쓰는 언어와 좀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진 예술적 존재다. 시에서 지나치게 무언가를 찾으려 하면 실망만 남는다. 서정시에는 일상의 소통을 넘어서는 심미적인 설득력을 지닌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만 레이는 어떤 예술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로 다음 두 가지를 들고 있다.
너무 쉽게 이해 될 때,
전혀 이해가 안 될 때.
사진에서 빛의 조형에 의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를 추구하면서도 그는 예술의 외딴 마을에만 머무르지 않고 바깥세계로 나가는 다리를 생각한 것이다. 너무 쉬워서 생각할 거리가 없을 때도 예술작품은 식상하고, 너무나 난해하여 접근 자체가 전혀 불가능할 때도 예술작품은 호소력을 잃는다. 이 말을 서정시에 적용해 보면 너무 쉽게 이해되는 시는 진부하고, 아무리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면 보던 시를 옆으로 치우게 된다. 이 말을 뒤집으면, 이해 가능하기도 하고 이해 불가능하기도 한 것, 그것이 매력 있는 시다. 자폐(自閉)의 마을에서 바깥세계로 나가는 다리가, 그것이 비록 징검다리라 해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폐를 통한 예술의 독재에 머물지 않고 어렵더라도 매력적인 소통을 지향해야 한다.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편차(偏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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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는 본디 주문(呪文)처럼 일정하게 형식적으로 틀이 갖추어진 언어를 사용한다. 일정한 시적 효과를 내기 위해 서정시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반복이며, 그것의 단조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사용되는 요소가 변주(變奏)다. 시의 가장 작은 단위인 운(韻)은 한 편의 시를 묶어주는 역할을 하며, 이 묶여진 언어에서 우리는 시적인 것을 느낀다. 운의 반복뿐만 아니라 동일한 어휘의 반복도 같은 음악적 효과를 낸다. 현대의 서정시에서도 겉으로 보이는 것들 속에서 일정하게 작용하는 섬세한 규칙성을 감지할 수 있다. 울림이 좋은 어떤 서정시의 어순을 바꾸어보자. 그럴 경우 어떻게 들리겠는가? 시에서 느꼈던 애당초의 감동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운과 리듬이 살아서 숨을 쉬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그 시는 죽은 시가 되고 만다.
미적 쾌감은 기존의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편차(偏差)에서 온다. 당연하게 기대했던 것을 깨버리는 긴장감이 이런 미적 쾌감의 뿌리다. 정상성과 비정상성 사이의 가파른 기울기에서 오는 긴장감이 미적 쾌감을 산출하므로 시인은 이를 자신의 시에 전략적으로 이용한다. 즉 시에서는 독자가 미리 알고 있는 것을 뒤집는 언어의 운용이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대상을 직접적으로 지칭하지 않고 돌려 말하거나 암시하는 은유를 쓴다. 시에서 넌지시 암시한 뜻을 찾아가는 길이 독자에게는 미적 체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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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 체험은 현대 서정시에서는 의미의 은유적 전이에서 출발한다. 은유를 통해 시적 의미는 본래의 언어가 갖는 것보다 훨씬 확산된다. 사용하는 언어의 종류에 따라서는 신화적 차원까지도 상승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서정시의 표현 가능성은 더욱 확대되는 것이다. 이때의 미적 체험은 논리적이지 않고 직관적이며, 독자는 낯선 것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게 된다. 독자가 시를 읽으면서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이 미적 체험의 실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전대, 즉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절의 시인들이 쓰던 방식대로의, 일의적으로 확연하게 해결되는 우의적 시 쓰기와 근현대의 시 쓰기가 갈리는 지점이다.
시 속에 깊은 우물보다 더 깊은 깊이가 있을 때 거기서 우리는 심오한 울림을 듣는다. 우리의 의식의 돌을 던져놓고서 잠시 후 들려오는 그 소리에 우리의 영혼은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괴테는 이런 정도의 경지에 오른 시에 대해 다음같이 말한다.
시장에서 교회 안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은 어둡고 침침할 뿐이지.
속인의 눈에는 바로 그렇게 보여.
그 사람은 심통이나 부리겠지,
평생토록 심통이나 부리겠지.
하지만 한번만이라도 안으로 들어가 보게!
신성한 예배당을 맞이해 보게나,
모든 게 갑자기 형형색색 훤해 오지,
이야기와 장식이 순식간에 빛나겠지,
한 줄기 고귀한 빛살이 눈에 띄지.
이것이 너희 하느님의 자식들에겐 쓸모 있는 것,
이것이 너희를 교화하고 너희 눈을 즐겁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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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쓰인 한 편의 시는 수정처럼 맑으면서도 자체 내에 통일된 다양성을 품고 있다. 이런 다양성은 시의 깊이에서 나온다. 괴테는 “시는 채색 유리창”이라고 말한다. 시는 겉에서 보면 그냥 밍밍하다. 시란 바로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창과 같다. 오래된 성당의 유리창들을 건물 밖에서 보면 단조롭고, 크게 눈에 띄지도 않는다. 그러나 안에 들어가서 햇빛에 반사돼 색색하게 펼쳐지는 풍경을 보면 황홀경에 빠진다. 자기 발로 걸어서 건물 안에 들어가 직접 느껴봐야 그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 안내하는 사람이 밖에서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을 하고 자세한 설명을 해도 아무 소용없다. 오히려 섣불리 설명하려 덤비는 사람은 아름다움을 망칠 뿐이다. 이는 음식을 맛보는 것과 같다. 누가 맛을 말로 설명할 텐가. 서정시의 심미적 설득력은 직접 맛을 봐야 안다. 자신의 영혼의 빛으로 비추어 가면서.
뒤엉킨 미로를 새의 눈으로 바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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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인간의 삶에는 형이상학적 불행이 깃들이기 마련이다. 시인에게는 그것의 극복 과정이 시가 가는 길이다. 시인은 지난(至難)한 고통의 길을 남보다 앞서서 간다. 괴테는 1784년에 쓴 ‘헌시’에서 말한다. “나 이 길을 왜 이리 간절히 찾아 헤맸던가,/ 만일 형제들에게 보여줄 게 아니라면?” 남들에 앞서 본보기처럼 가는 시인의 길, 그 길은 고통을 담고 있다. 남의 아픔까지 대신하는 대속(代贖)의 그릇 속 거기엔 시적 진실이 담긴다.
그렇다면 괴테가 말하는 진정한 시란 무엇인가?
“진정한 시는, 세속적인 복음으로서, 내적인 기쁨을 통해, 외적인 유쾌함을 통해 우리에게 지워져 있는 이승의 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열기구처럼 그것은 우리를 묶어놓고 있는 바닥의 짐과 함께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들어 올려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지상의 뒤엉킨 미로를 새의 눈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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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가 자서전 <시와 진실>에서 한 말이다. 진정한 시는 삶의 고통에 찌든 일상을 벗어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해준다. 괴테의 가치는 그가 공허함으로 빠지지 않고 지상에 자신의 뿌리를 굳건히 박고 있었다는 데 있다. 진정한 시는 진정한 체험에서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열기구를 타고 한 시적 여행도 순전한 상상적 모험에만 머물지 않았다. 현실의 유기적 뼈대가 없으면 정신적 고양이나 상승 같은 말은 공허한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다.
괴테는 시에 관해 어떤 이론적인 글을 쓴 적도 없고 그런 글에 대해 관심도 갖지 않았다. 당시 세기말의 젊은 시인들의 시 쓰기와 관련하여 1797년 7월 실러에게 쓴 편지에서 괴테는 말한다. “이론이란 것은 없어요. 적어도 어떤 일반적으로 이해할 만한 이론이나 모든 장르를 대변할 만한 결정적인 모범은 없습니다. 결국 각자 애정을 가지고 자신의 관심 분야에 대한 훈련의 양을 늘려가는 수밖에 없어요.” 괴테에겐 느낌과 체험의 공간이 모든 것이었다. 그에겐 삶과 언어가 처음부터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체험이 곧바로 시로 변용됐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서는 체험이 하나의 시적 상징과 엮이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만년의 작품 중 ‘1828년 9월, 도른부르크에서’라는 시를 보자.
안개의 베일을 훌훌 벗고,
절실한 기다림에 응하여
꽃받침들이 색색으로 차오르면,
창공은 구름을 나르며
맑은 한낮과 다투고,
동풍은 구름을 몰아대며
태양의 푸른 길을 마련하면,
그대가 그 광경을 보고 즐기면서
숭고한 자연의 순수한 가슴에 감사하면,
태양은 새빨간 모습으로 떠나면서
지평선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리라.
괴테는 이 시절 높은 곳에 위치한 도른부르크 성에서 고양된 기분으로 잘레탈 계곡에 피어나던 아침 안개를 관찰하곤 했다. 시의 첫 부분에는 새벽의 풍경이, 후반부에는 다가올 저녁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새벽은 시적 화자에게 새로운 기운을 넣어주고, 대낮을 지나 다가올 저녁은 또 다른 세계를 열어준다. 이 시는 외면상으로 보이는 대로 자연을 다룬 시로만 볼 수는 없다. 외적으로 드러난 자연의 모티프와 점차 고양되어 가는 영혼의 모티프가 긴밀하게 결합돼 있기 때문이다. 괴테에게서 상징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런 상징성은 그의 ‘색채론’에서 확인된다. 괴테에 따르면 아무런 색깔이 없는 순수한 빛은 창조력으로서 불투명한 매질과 마주치면서 이 매질로부터 색채를 만들어낸다. 무채색의 ‘빛’은 매질에 따라 다양하게 파랑에서 빨강을 비롯한 여러 색깔로 바뀐다. 자연의 빛이 다른 것, 위 시에서는 ‘안개’와 엮이면서 색채를 만들어내는 것에서 괴테는 무한한 창조력의 놀라움을 묘사하고 있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앞에 안개가 걷히고 꽃들이 피어나고, 동풍이 구름을 몰아내면서 해 돋는 아침이 열린다. 그러는 사이에 시인의 가슴에 기대감이 슬며시 부풀어 오른다. 태양이 떠오르면서 ‘빛’은 찾아온다. 빛은 와서 만물에 색깔을 해 입힌다. 그러다 안개를 거치고 구름을 거친 빛살이 저녁이 되면 황금빛으로 붉게 타오를 것임을 시인은 예견한다. 시인은 ‘빛’을 보고 느끼면서 스스로 강해지는 것을 감지하기 때문에 ‘숭고한’ 자연의 ‘순수한 가슴’을 향해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빛’은 창조의 근원이며 시인에게 역시 모든 것을 가능케 해주는 뿌리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지상을 사랑하고 거기서 펼쳐지는 모든 것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괴테는 이 시를 통해 자연이 갖는 영원한 창조력을 노래하면서 자연의 빛에서 시인 자신의 무한한 창조력과 변용 능력을 보는 것이다. ‘빛’은 창조력이고 나아가 신의 입김이다. ‘빛’은 시인 자신의 잠재된 힘을 표현하는 상징이 된다.
자연이 갖는 영원한 창조력을 노래한 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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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에서의 미학의 깊이는 언어가 좌우한다. 시인은 남들이 쓰고 버린 쓰레기 더미를 뒤져 다시 너절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 닳지 않은 것을 창조해야 한다. 하인리히 하이네 같은 시인이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그의 앞에 남아 있던 것은 낭만주의의 유산이었다. 낭만주의의 유산은 그 자체로 보수의 냄새를 풍겨 하이네의 자유주의적 사고에 맞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비꼬는 아이러니 방식의 새로운 언어를 개발하여 시적 새로움을 창출해냈다.
이것은 하이네 이전에 젊은 괴테가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로코코풍의 달콤한 어법이 득세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괴테는 이런 로코코풍의 관습적 의상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체험에 바탕을 둔 새로운 어법으로 시의 새로움을 꾀했다. 사랑할 때만 연애시를 썼다는 그의 고백이 그것을 말해준다. 하이네는 대상을 고르는 시적 사고도 탁월했지만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까지 시에 도입하는 과단성을 보였다. 정해진 시적 표현 방식과 관습에서 벗어나려는 정신이 새로운 시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현실 정치 상황을 시에 도입했고,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시적 어법으로 독자의 감동을 자아냈다.
시적 근대성의 혁명을 이루어낸 프랑스의 보들레르 이후 현대에 들어서는 젊은 시인들이 과거에는 서정시에서 철저하게 배제됐던 속어나 은어를 사용함으로써 표현의 가능성을 확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젊은 시인이 쓰는 키치류의 시에서 진정한 감동을 찾기는 힘들다. 이런 종류의 시에는 시적 아우라와 마법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이면서도 새로운 시적 언어를 찾아내지 못하는 한, 단지 종래의 전통을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시적 성취에 이를 수 없다. 독자의 기대치에 부응할 만한 감동의 구조를 심미적으로 마련하지 못하는 한 서정시는 자체의 존재의 향방을 가늠하기 힘들다.
한두 번 읽고 나면 그것으로 끝인 시는 서정시로서 태생적인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릴케는 시적인 새로움을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한 시인이다. 괴테의 시적 업적도 그렇지만 릴케의 공적은 새로운 어법을 숱하게 시도했다는 데 있다. 친구들과 동료 시인, 지인들을 위해 남긴 수백 편의 ‘헌시(獻詩)’는 그가 얼마나 언어 연마에 노력을 기울였는지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물이다. 독일에서 시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시화집>에서 빠져서는 안 될 시를 한 편 들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의 독자가 꼽는 시가 릴케의 ‘표범’이다. 그만큼 시인의 시적 연마와 거기서 비롯하는 감동이 독자들을 설득하기 때문이다.
이젠 아무것도 붙잡을 수가 없다.
그에겐 마치 수천의 창살만이 있고
그 뒤엔 아무런 세계도 없는 듯하다.
아주 조그만 원을 만들며 움직이는,
사뿐한 듯 힘찬 발걸음의 부드러운 행보는
커다란 의지가 마비되어 서 있는
중심을 따라 도는 힘의 무도(舞蹈)와 같다.
가끔씩 눈동자의 장막(帳幕)이 소리 없이
걷히면 형상 하나 그리로 들어가,
사지(四肢)의 긴장된 고요를 뚫고 들어가
심장에 가서는 존재하기를 그친다.
철창으로 된 동물원 우리 안에서 표범이 어쩔 수 없이 빙빙 도는 모습을 시인은 정확하고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독일어로 낭송하는 것을 들으면 언어 자체에서 우리 안을 빙빙 도는 표범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이 시는 시인이 종래까지 유지해 오던 서정시의 감정적 차원을 버리고 시가 지향할 수 있는 하나의 방향을 새롭게 찾아낸, 실체가 있는 작품이다. 시인 개인의 실존적 관점에서 보면 감정의 허비를 막고 안정된 존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사물시’ 같은 탄탄한 발판이 필요했다. 동물원 우리에서 관찰한 표범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시인은 시어 하나하나, 시의 리듬, 흐름상의 휴지(休止)까지 세세하게 고려하고 있다. 신중한 고려를 거쳐 모든 것이 조화를 이뤄 한 편의 시 작품 속으로 투입되고 있다.
새로운 시의 숲속 빈터를 개척한 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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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묘미는 시인이 우리 안에 갇힌 표범의 특징을 마치 붓으로 하듯 몇 가지 요소로 환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 갇힌 표범은 단조롭게 빙빙 돌며 자신의 야생의 힘을 안으로 감추고 있다. 릴케는 이 점에 착안하여 시를 전개하고 있다. 이를 위해 아무것도 붙잡지 못하는 눈, 사뿐한 발걸음, 단조로운 원, 사지의 긴장된 고요, 마비된 심장 등의 시어가 동원되고 있다. 릴케가 스물일곱 살에 이 시를 썼을 때 그것은 독일 시문학사에서 누구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새로운 시의 숲속 빈터를 개척한 것이었다. 그것은 시적 언어의 개성 있는 업그레이드였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좋은 시의 조건을 몇 가지로 정리해보자. 여기서 말하는 좋은 시는 현대적 의미의 서정시를 말한다. 현대에서 우리가 대하는 것은 공동체적 민요가 아니라 독창성을 표출하는 개인의 노래다.
첫째, 시는 새로움을 향한 도전이어야 한다. 그것은 언어를 가지고 하는 모험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벼운 말장난이나 식상한 언어로 하는 하나마나 한 말의 나열은 좋은 시가 될 수 없다. 자극적인 말로 일상적 도발을 꾀하려 한다면, 특히 그것이 이미 다른 사람들이 써먹은 말이라면 절대 의도하는 효과에 이르지 못하고 천하고 지저분한 느낌만 줄 뿐이다. 성공한 시는 거듭 읽어도 줄지 않는 언어의 기쁨을 제공한다. 릴케가 이별을 꽃에 비유한 시가 있다.
우리를 향해 끝없이 꽃가루를 뿌리고
우리는 그 꽃가루를 마시며 산다.
가장 먼저 불어오는 바람결에서도
이별을 호흡하는 우리.
둘째, 이른바 독자를 가르치려 드는 시는 좋은 시가 아니다. 이는 계몽주의 시대의 문학이 작품 끝에 가서 글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에 대해 설교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시인은 ‘열린’ 사고로 ‘열린’ 아름다움을 지향해야 한다.
현대의 서정시는 생각하는 독자를 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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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독자를 놀라게 하고 새로운 연상을 자극할 언어 이미지를 제공해야 한다. 언어를 고도로 응축하여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면 그 시는 한 편의 시로서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파울 첼란의 시 ‘실타래태양’이 그 같은 경우다.
나무만큼
큰 생각 하나가
빛의 소리를 움켜쥔다.
부를 노래들 아직 있다
인간들 저편에.
각각의 이미지가 독자의 뇌리에 번지면서 독특한 의미의 향연을 벌이도록 전개되고 있다. 현실의 이미지와 언어 이미지가 높은 수준에서 직조돼 있다. ‘잿빛 황무지’와 ‘큰 생각’ ‘빛의 소리’ ‘부를 노래’ ‘아직 있다’ ‘인간들 저편에’ 등의 시어는 나치의 만행을 겪은 첼란의 체험 속에서 녹아 많은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어떻게 보면 시인은 독자에게 해독할 문자와 이미지만을 주는 것이다. 원문의 어둠을 밝히는 것은 독자의 불빛이다. 과거와 달리 현대시는 리듬과 멜로디가 아닌 낱말들이 각각 모여 이미지를 구성하여 그것으로 시를 끌어간다. 현대의 서정시는 듣는 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독자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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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현실의 사건을 그대로 기록하거나 보여주지만 말고 현실에 대한 전망을 제시해주는 것이 좋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후손들에게’는 이에 대한 좋은 예다.
우뚝 솟아오를 너희는 말이다,
생각해다오,
너희가 우리의 나약함을 말할 때면
너희가 피해간
이 캄캄했던 시절을 생각해다오.
그래도 우리는 걸었다, 신발보다 나라를
더 자주 바꾸어가며,
계급들끼리의 전쟁터를 누볐다, 불의만
있고 분노가 없을 땐 절망하면서도 말이다.
그래도 우리는 깨달은 게 있다,
천박함에 대한 증오도
표정을 일그러뜨린다는 것을.
불의에 대한 분노도
목소리를 쉬게 만든다는 것을. 아, 우리는 말이다,
우리는 우애의 터전을 만들고 싶었지만,
정작 우리 스스로는 우애롭지 못했다.
그래도 너희는 말이다, 언젠가
인간이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때가 되면
제발 생각해다오, 우리를 말이다,
관대한 마음으로.
다섯째, 서정시로서 그 자체의 형식적 틀을 갖추면서도 내용상으로 하나의 스토리텔링의 구조를 갖는다면 더 좋다. 시로서 세심한 음률을 구비하면서도 전체 구도에서 하나의 스토리를 갖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하인리히 하이네의 ‘로렐라이’를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라인강이 발밑으로 흐르는 언덕 위에서 저녁 햇살을 맞으며 금발을 빗어 내리는 로렐라이에게 반한 뱃사공은 결국 난파하여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
예술은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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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수많은 전래된 전통 속에서 자신의 고유함을 찾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알려진 신화적 소재나 성경의 모티프를 가지고 변주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도 있다. 릴케는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통해 예술과 삶과 죽음에 대해 시적으로 사유하고 있다.
우리가 시에서 처음 만나는 것은 아름답게 건축된 언어의 궁전이지만 끝에 가서 마주치게 되는 것은 고뇌의 흔적이다. 시의 근본에는 시인의 고백이 깔려 있다. 괴테도 고백했고, 횔덜린도 고백했으며, 첼란도 고백했다. 괴테는 인생의 밝음 속에서 자신을 고백하여 천상에 이르고자 했고, 횔덜린은 시인의 사명을 설파하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고, 첼란은 존재의 어둠 속에서 자신을 고백하여 침묵의 심연에 이르렀다.
철학자 칸트는 미학적 체험은 취향의 문제로 사뭇 ‘주관적’이라고 말한다. 감성적 인식의 대상으로서 예술에 어떤 확정된 평가의 잣대가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시대의 요구에 따라 미적 평가의 잣대는 변하기 마련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시는 각각 나름의 잣대를 갖는다. 시를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은 시의 고유성에 따른 평가의 잣대를 갖고 있어야 보편성에 다가가는 작품을 만들고 또 그에 대한 이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예술은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 직접적으로 모든 것을 다 털어놓듯 말하는 순간, 그곳은 예술의 무덤이 된다. 여백을 통한 감동의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감동의 공간은 해석의 공간이며 잠재적인 인식의 공간이다. 예술작품은 구체적으로는 감각과 정신이 교류하는 장이다. 그러나 우선되는 것은 감각이다. 훌륭한 예술작품은 감각에 도전장을 내밀고, 좋은 시는 독자를 향해 끊임없이 도발한다. 감각이 정신을 낳고 정신의 해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감각은 과일의 꽃과 같은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 과일의 꽃과 같은 향기로운 그 무언가를 품은 진정한 시는 자유를 꿈꾼다. 시적 자유는 끝없는 새로움을 요구한다.
김재혁- 고려대 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시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릴케와 한국의 시인들> 등의 저서와 <딴생각> <아버지의 도장>등의 시집을 냈다. <딴생각>을 ‘Gedankenspiele’라는 제목으로 직접 번역하여 독일에서 출판했고, 오규원의 시집 <사랑의 감옥>을 독일어로 옮겼다.
―「월간중앙」2017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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