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시인론

시조시인 조운과 탱자의 꿈 - 정 양

공산(空山) 2017. 1. 24. 20:14

시조시인 조운과 탱자의 꿈
정 양


한겨울 얼음장 밑으로 흘러온 시냇물처럼 조운과 그의 예술을 기리고 아끼는 이들의 마음들이 면면히 이어져 마침내 지난 해 여름 그의 시조집이 복간되고 그의 시비도 세워졌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일 년 전인 1949년에 가족들과 함께 월북했던 시조시인 조운(曺雲)(본명 柱鉉, 1900년생)은 월북 이후의 행적이 아직 공식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문단에 단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그에 관한 소식들은 월북 이후, 그가 공산당 중앙위원을 비롯한 공직들을 역임했었다는 것, 두 권의 민요집을 발간했다는 것, 한국전쟁 중에 그의 셋째아들이 인민군 해군장교로 복무하다 전사했다는 것, 북한사회에서 문화계의 ‘큰별’로 추앙받고 있다는 것 등등이 고작이다. 그는 임화, 김남천, 한설야 등 상당수의 월북문인들이 겪어야 했던 정치적 수난을 거의 겪지 않은 듯하며 비교적 안정된 삶을 누리다가 1960년대 초에 병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운에 관한 연구들 중에는 그의 인간미 넘치는 다정다감한 서정이나 일상적 애환을 형상화한 그의 시세계를 근거로 그의 월북의 필연성을 의심하는 글들이 더러 있다. 정치적 사회적 입김이 유난히 거세다는 북한사회에서 그의 다정다감한 작품들이 어떻게 수용되었고 또 어떤 변화의 궤적을 남겨놓았는지 아직 정확하게 알 길이 없어 궁금하거니와, 이 글에서는 1990년 광주에서 발간된 『조운문학전집』(남풍)과 그의 탄신 백주년을 기념하여 복간된 『조운시조집』(작가) 등 그의 작품을 근거삼아서 그가 월북을 하게 된 필연성을 점검해 보고자 한다.


1. 그의 문학은 탈이념적인가

월북문인들 중에서 월북의 동기나 필연성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되어 왔던 문인들이 여럿이지만 그 중에서도 정지용, 이태준, 그리고 조운에 대해서는 특히 그 월북의 동기나 필연성에 대한 의문이 논자들에 의해서 심심찮게 제기되곤 해왔다. 최근에 어렴풋하게나마 그 행적이 알려진 정지용은 이제 논외로 치더라도 이태준과 조운의 경우는 아직 논의의 소지가 남아 있다. 그들의 월북에 대한 의문은 대개 그들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탈이념적 순수성이나 서정성을 내세워 월북 사실에 대한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그들을 보호 내지는 변명하고자 하는 온정적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 그러나 그러한 온정적 입장은 그들의 예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사실상 장애적 요소로 작용하는 일이 많다.

실제로 이태준의 경우만 해도 오늘날 그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그의 작품세계를 올바르게 조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식민지시대에 씌어진 그의 단편들이 대부분 한국적 정한에 바탕을 둔 서정성 짙은 작품이라는, 작품의 경향으로 보아 그의 월북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는 그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분명히 타당한 것이 못 된다. 월북 직전에 씌어진 그의 중편 「해방전후」를 읽어보면 그의 월북의 필연성이 명확하게 짚이기 때문이다. 「해방전후」는 당시 한반도의 화두였던 신탁통치에 대하여 그것을 찬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식인의 고심 어린 신념을 확실하게 못질해 둔 소설이다. 그 「해방전후」라는 소설에 대하여 언급하는 이들은 더러 있지만, 그 소설을 통하여 이태준의 월북의 당위를 해명하는 연구는 아직 없는 것 같다.

조운에 관한 연구들도 이태준의 그것과 비슷한 온정적 궤적을 그어가고 있다. 조운에 관한 연구들을 보면 앞서 말한 바, 다정다감하고 서정성 짙은 그의 시조들을 내세워 그의 월북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워하는 이들이 많다. 그가 선택했던 신념과 그의 작품이 서로 별개의 것인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다. 문학인의 신념과 그 작품이 서로 어긋나는 일은 더러 있다. 우리나라 현대문학사의 경우 식민지시대의 일부 친일문학 같은 것이 그런 예에 해당될 것이다(자발적 친일문학은 물론 여기서 제외된다). 그러나 주지하는 바처럼 조운은 식민지시대에 부단히 항일운동을 했던 사람이다. 그의 작품 속에는 반드시 그의 신념이 표백되어 있을 것이고, 그가 월북을 하게 된 필연성이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을 것이라는, 그리고 그런 것들을 밝혀두는 것이 조운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이 이 글의 입장이다.

한국전쟁 직전의 월북은 목숨을 건 행위였다. 노약자나 어린이들은 함께 갈 수 없는 험한 산길이었기 때문에 나이 든 부모나 어린 자식들을 남겨두고 월북한 이들도 많았다. 경비병들의 눈을 피하여 야음을 틈타 삼팔선을 넘다가 신원불명인 채로 사살당하는 것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월북을 감행할 수 없었다. 그들의 월북은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식의 안이한 행동이 결코 아니었다. 조운은 혼자서도 아니고 아내와 이십 세 전후의 세 아들과 함께 그 삼팔선을 목숨들을 걸고 건너갔던 시인이다. 조운 연구자들은 온정적 입장에서 그의 월북을 의아하게만 여길 일이 아니라 이른바 탈이념적이라고 운위되는 그의 작품들 속에서 그의 월북의 당위를 밝혀보아야 한다. 이태준의 「해방전후」처럼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 작자의 신념을 명확히 밝힌 글이 조운의 글 속에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운문학전집』 작품연보에는 1947년 3월 『문학』 3호에 발표된 「탈출」과 1947년 3월 『문학평론』 3호에 발표된 「얼굴의 바다」 두 편의 제목은 보이는데 정작 그 두 작품이 『조운문학전집』에 보이지 않는다. 혹시 그 두 작품 속에 월북의 단서가 될 만한 내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그 두 작품의 내용을 확인할 길이 없어서 아쉽다. 그러나 식민지시대에 씌어진 「선죽교」,「古梅」, 「파초」 그리고 해방공간에 씌어진 「고부 두승산」, 「금만경들」, 「석류」, 「유자」 그리고 씌어진 연대가 확실하지 않은 「구룡폭포」 같은 시조들 속에는 그의 월북행위를 해명할 만한 밑그림들이 어렴풋이 보이기도 한다. 특히 「柚子」라는 시조에서는 거의 그 윤곽이 손에 잡힐 듯 드러나 보인다. 그 밑그림과 윤곽이 드러나는 작품들을 이제부터 보다 구체적으로 접근해보자.


2. 식민지시대 조운의 역사인식

우리의 시조문화가 그 음악성을 상실하면서 생명력이 쇠잔해질 무렵에 시조의 문학성을 근거로 시조중흥의 길을 닦았던 사람이 육당과 춘원이라면, 시조문학의 중흥을 실질적으로 담당했던 인물로 흔히들 가람과 노산을 일컫는다. 분단 이후 남한 문단의 관심에서 멀어지기는 했지만 당시 조운은 선배 시조인들이 채 벗어나지 못했던 유가적(儒家的) 관념의 벽을 허물고 서민적 리얼리티를 성공적으로 시조문학에 도입함으로써 생활시(生活詩)로서의 시조의 길을 열어놓은 시인이다.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그리고 그에게 시조인의 길을 안내해주다시피 했던 가람은 실제로 당시 조운의 시조들을 앞세워 시조의 미래에 대한 논의들을 전개하곤 했었다.

조운의 시조에서는 우선 정형률이 가져오기 쉬운 부자연스런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시조를 읽고 있노라면 우리말 구어의 호흡과 시조의 묵은 율격이 한 데 녹아서 그것들이 서로 행복하게 동거하고 있는 아름다움을 만난다. 시조가 우리 고유의 예술양식이었던 필연성을 그의 시조들을 통해서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것 같은 우리의 일상적 말버릇들이 시조라는 율격과 어울리어 이루어내는 그 놀라운 활력은 그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조운 특유의 사실적 재치와 해학으로 무늬져서 「구룡폭포」, 「고매」, 「석류」, 「상치쌈」, 「선죽교」 등등 수많은 절창을 시조문학사에 남겨놓고 있다.

   사람이 몇 生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劫이나 轉化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江도 바다도 말고 玉流 水簾 眞珠潭과 萬瀑洞 다 고만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 안개 풀 끝에 이슬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連珠八潭 함께 흘러

   九龍淵 千尺絶崖에 한번 굴러 보느냐

   ― 「구룡폭포」 전문

조선조 후기에 외설(猥褻)을 앞세워 평민정서의 기수 노릇을 감당하던 우리의 사설시조는 그 외설에 가리어 활로가 막힌 듯이 여겨지던 장르였다. 그 사설시조가 조운에 이르러 이렇듯 새 길이 열린다. 이 「구룡폭포」는 조운의 시적 성취를 말하는 이마다 손꼽는 시조인데. 「구룡폭포」에 대한 언급들을 살펴보면 정작 그 폭포 이미지에 대한 당연한 접근이 외면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구룡연에 쏟아져내리는 폭포수, 그것은 ‘몇 生’ ‘몇 劫’의 묵은 그리움을 격정적으로 환기시키는 공간이다. 그것은 역사적 감격의 자리에 동참하고 싶은 꿈을 치밀어오르게 하는 공간이다. 폭포와 같은 그 감격이 조국의 광복인지 부활인지 혁명인지, 아니면 우리네 인생의 우주적 거듭남인지 명확하게 알 길은 없다. 샘물도 강물도 바닷물도 아닌, 한낱 이슬방울이 되어 그 폭포수에 합류하고 싶은 가난하고 맑은 꿈이 혀 위에 구르는 유음(流音)으로 流音으로 이어져 전편에 ‘구슬구슬’ 맺혀 있다. 폭포에 휩쓸리어 흔적조차 없어질 그 이슬은 그러나 폭포보다 더 격정적이고 아름다운 민중적 의지의 결정체다.

『조운문학전집』의 작품연보에는 이 구룡폭포에 해당되는 부분이 보이질 않는다. 쓰인 시기가 식민지시대인지 해방공간인지 알 수 있다면 폭포로 형상화된 그 역사적 감격의 내용이 좀더 구체적으로 짚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씌어진 시기와 감격의 내용과를 곧바로 이어보려는 생각은 사실 이 시조를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 같다. 폭포와 같은 격정적 감격은 조국광복이나 혁명에의 꿈이나 부활이나 우주적 거듭남에 대한 그 모든 그리움의 총화일 테니까 말이다.

   善竹橋 善竹橋러니 발남짓한 돌다리야
   실개천 여윈 물은 버들잎에 덮혔고나
   五百年 이 저 歲月이 예서 지고 새다니.

   피니 돌무늬니 물어 무엇 하자느냐
   돌이 모래되면 忠臣을 잊겠느냐
   마음에 스며든 피야 五百年만 가겠니.

   圃隱만한 義烈로서 흘린 피가 저럴진대
   나 보기 前 일이야 내 모른다 하더라도
   이마적 흘린 피들만 해도 발목지지 발목져.

   ― 「선죽교」 전문

‘오백년 이 저 세월’의 ‘이 저’는 각각 고려왕조와 조선왕조를 역순으로 가리키면서 선죽교의 어제와 오늘을 동시에 환기시키는 지시어다. 실개천 위에 놓인 발 남짓한 돌다리 선죽교를 통하여 이 시조는 기행시적 무상함을 곁들이게 하여 고려 조선 두 왕조의 천년 세월을 회고하고자 한다. 두 왕조의 천년 세월과 선죽교를 ‘오백년 이 저 세월’로 클로즈업시키는 그 조명법과 말맛이 놀랍다. ‘예서 지고 새’는 고려왕조와 조선왕조를 역순으로 가리키는 ‘이 저 세월’이 조선왕조의 멸망까지를 중의적으로 담아내려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첫째 수는 회고적 기행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자문자답하는 형식의 둘째 수에서도 구어와 정형률이 행복하게 동거하면서 회고적 정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그러나 둘째 수의 세 행이 모두 의문형으로 처리되어 있으면서도 그 내용들은 모두 역사적 확신으로 성큼 다가선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마음에 스며든 피야 오백년만 가겠”느냐는 자문자답과 그 확신은 이 시조가 평범한 기행시조가 아니겠구나 싶은 기대와 긴장을 동시에 자아내게 한다.

그 역순의 조명법과 말맛, 그 자연스러움과 역사적 확신과 기대와 긴장은 모두 셋째 수의 ‘흘린 피’로 집중된다. “포은만한 의열로서 흘린 피가 저럴진대” 의 ‘흘린 피’와 “이마적 흘린피들만 해도 발목지지 발목져”에서의 ‘흘린 피’가 그것이다. 역사상 의열(義烈)의 대명사격이던 포은(圃隱)의 선죽교에서 흘린 피가 ‘이마적 흘린 피’ 때문에 갑자기 왜소해지는 이 파격적 비교 속에는 조운의 시대감각과 역사관이 함께 무늬지어 있다.

선죽교 아래 버들잎에 덮힌 실개천은 여위어 있지만 발목이 잠기도록 흘러 넘칠 이마적 민중들의 흘린 피, “나 보기 전 일이야 내 모른다 하더라도” 내 어릴 적부터 똑똑히 보았던 민중들의 흘린 피만 해도, 겨우 무늬만 남는 포은의 피가 무색할 정도로 선죽교가 놓인 이 개천에 발목 넘치게 흐를 것이라는 셋째 수의 이 파격적 비교는 왕조 중심의 역사관과 민중적 역사관의 비중을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역순의 조명법과 말맛이 놀랍고 ‘흘린 피’들에 대한 파격적 비교와 그 사관(史觀)이 놀랍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식민지시대에 이런 시조가 씌어졌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우리를 두근거리게 한다.

   매화 늙은 등걸
   성글고 거친 가지

 

   꽃도 드문드문
   여기 하나
   저기 둘씩

   허울 다 털어버리고 남을 것만 남은 듯.

   ― 「古梅」 전문

이 시조는 문득,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 절규하던 후대의 신동엽의 시를 떠올리게 한다. 신동엽의 꿈이 격정적이고 직설적이고 간절한 것이라면 늙은 매화나무의 몇 송이 매화꽃은 조운의 간절한 꿈이 정적으로 관조되어 형상화되어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어떤 일, 그것이 항일이든 계몽이든 교육이든, 식민지시대에 조운이 몸바쳐 매달리던 일들은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조직이 무너지고 쫓겨다니던 일, 붙들려 감옥살이를 하던 일, 일제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교육도 계몽도 포기해야 했던 일 등등…… 동지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더러는 쓰라리게 배반도 하고 자기안일에 매달리어 소시민들이 되어가고 주변에 모여들던 이들이 썰물처럼 곁을 떠나기도 했을 것이다,

후세의 신동엽처럼 그가 “향그로운 흙가슴만 남고 모든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고 싶을 때, 그래도 마지막까지 뜻을 모으고 역경을 함께 견디는 이들이 남아 있을 때, 그 남아 있는 이들을 보면서 그는 “허울 다 털어버리고 남을 것만 남아 있”노라고 절망적으로 자위하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절망적 자위만은 아니었다. 남을 것만 남아 있는 것에 대한 최종적 신념은 서로 얼마나 눈물겹고 아름답고 벅차는 확인일 것인가. 식민지시대의 어느 이른 봄, 성글고 거친 늙은 매화나무에 ‘드문드문’ 몇 송이 피어 있는 매화꽃을 보면서 조운은 그것을 눈물겹고 아름답고 벅찬 신념으로 확인하고 있었을 것이다. 조운의 눈에는 눈물과 격정과 가슴 벅차는 신념이 드문드문 몇 송이 매화꽃으로 절제되어 피었던 것이다.


3. 해방공간의 역사에 대한 믿음과 좌절

앞서 얘기된 바처럼 조운의 시조에는 서민적 일상생활을 바탕으로 삼은 인간미 넘치는 서정적 내용들이 많다. 그것은 그의 월북의 필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의문의 근거로 내세우는 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민적 인간미 넘치는 서정’이 반드시 탈이념적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되물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반공을 국시로 삼던 시대에 고착된 사회적 편견일 뿐 문화적 보편성을 유지하고 있는 견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학의 구호화를 경계하던 마르크스의 입론이 아니더라도 ‘서민적 인간미 넘치는 서정’, 그것은 사실 탈이념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이념화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조운은 ‘인간미 넘치는 서정’을 밑그림삼아 「구룡폭포」나 「선죽교」나 「고매」처럼 예술적 향기가 무르익은 역사인식에 이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런 역사적 신념을 밑거름삼아 서민적 인간미 넘치는 서정의 세계를 형상화하기도 했던 것이다.
해방공간에 씌어진 몇 편 안 되는 조운의 시조, 「고부 두승산」, 「금만경들」, 「석류」, 「유자」 등은 그의 역사에 대한 믿음을 괄호 안에 묶어두고서는 온전하게 그 문맥이 짚이지 않는 작품들이다.

   斗升山이언마는 녹두집이 그 어덴고
   뒤염진 늙은이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를 배트소롬하고 묻는 나만 보누나

   솔잎 댓잎 푸릇푸릇 봄철만 여기고서
   일나서 敗했다고 설거운 노래 마라
   오늘은 백만농군이 죄다 奉準이로다.

   ― 「古阜 斗升山」 전문

이 「고부 두승산」은 1947년 3월 조선문학가동맹에서 간행한 『연간조선시집』에 실렸던 시조다. 갑오년의 농민전쟁에 대한 이러한 조운의 관심은 시대를 거슬러 오늘날의 시점에서 다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광주민주항쟁이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폭도들에 의한 사태’로 찍소리도 못한 채 구겨져 있었고 아직도 그 진상의 상당부분이 암장되어 있는 상태지만, 그보다 몇 곱절이나 더 오랜 세월을 동학 폭도들에 의한 난리, 동학란이라는 이름으로 왜곡되어 있던 갑오년의 농민전쟁은 그로부터 반백 년도 더 지나서 조운에 의하여 비로소 그 역사적 조명이 시도된 것이다.

갑오년의 농민전쟁은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 국정 국사교과서에서도 그로부터 거의 일백 년 가까이 ‘동학란’인 채로 기술되다가 최근의 국사교과서들에 이르러서야 이 땅을 휩쓸던 그 피바람을 겨우 ‘동학운동’이니 ‘동학혁명’이니 하면서 운위하고 있는 실정임을 감안할 때 조운의 역사감각이 이미 예사롭지 않았음을 실감한다.

이 「고부 두승산」은 「선죽교」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회고취미의 기행시조가 아니다. 전봉준의 생가를 묻는 나그네에게 ‘고개를 배트소롬하’면서, 물어보는 나그네를 되쳐다보며 대답을 유보하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고, 그런 미심쩍음은 최근까지도 갑오년 농민전쟁이 의미 축소되어 이어져 온 역사적 질곡이다. 지금으로부터 오십여 년 전에 조운이 이 시조에서 ‘백만 동학군’이라 하지 않고 ‘백만 농군’이라고 기술한 것은 정형시의 음수율을 위한 배려는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의미 축소를 위하여 오랜 세월 의도적으로 강조한 ‘동학란’의 ‘동학’이라는 종교적 색깔을 지움으로써 조운은 갑오년 농민전쟁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농민전쟁의 의미 축소를 위한 그 종교적 색깔을 끝까지 매달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4·19나 5·16처럼 혁명 아닌 것이 분명한 사건들에 대하여 우리 현대사가 혁명이라는 이름을 헤프게 남발해온 것처럼 갑오년의 농민전쟁을 ‘동학혁명’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그 헤픈 정도가 지나쳐 왜곡에 가깝다. 일본의 역사왜곡을 탓하기 전에 먼저 우리 국사교과서의 기술태도를 점검해보아야 되지 않나 싶어 마음이 어둡다.

“오늘은 백만농군이 죄다 奉準이”라고 다짐하던 조운의 역사에 대한 믿음은 결코 헛된 장담만은 아니었다. 1960년대 후반에 김수영의 「풀」이 민중들의 삶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한 이후 한국현대시사에 수많은 잡초들이 이 땅의 민초의 얼굴로 돋아나고 있는 것처럼, 조운의 「고부 두승산」을 기점삼아 갑오년의 농민전쟁을 중심 소재로 한 수많은 시와 소설들이 신동엽의 「금강」을 건너 오늘날 그 암장된 역사적 의미를 밝혀내고 있는 중이다.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젖힌
   이 가슴.

   ― 「石榴」 전문

이 단시조에는 조운 시조의 특성들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바느질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 자연스러움과 소박하고 진실되고 아름다운 민중적 삶의 영근 꿈들이 ‘빠개젖히’는 듯한 긴장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이 시조는 이 땅의 수많은 문인과 독자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는 조운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구룡폭포」에서 “풀 끝에 구슬구슬 맺혔”던 ‘이슬’이 여기서는 “알알이 붉은” 석류알로 익어 있다. 폭포와 같은 격정적 감격 속으로 휩쓸리고 싶던 그 이슬이 임을 향하여 ‘빠개젖히’는 ‘알알이 붉은 뜻’으로 쏟아지려 하는 것이다. “‘임아 보소라’의 그 임이 누구인 줄을 모르고 어찌 조운 시조를 읽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해서 우리는 그를 민족시인이라 부름에 있어 조금도 인색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조운문학전집』의 책머리에 그의 고향 후배인 李乙浩의 소담한 글이 얹혀 있거니와, 식민지시대였다면 그 가슴이 이처럼 ‘빠개젖혀’지지 않았으리라. 오랜 세월 조국의 광복을 기다려온 순정과 마침내 광복을 맞이한 그 감격이 시조 전편에 ‘알알이’ 넘치고 있다. 광복을 맞이한 민족 앞에 거침없이 ‘빠개젖히’던 그 열정이 투박하면 투박할수록, 그 순정이 두툴하면 두툴할수록 읽는 이들의 가슴을 더 두근거리게 한다.

   들이 바다도곤 넓어
   눈이 모자라 못보겠다

   이게 우리거지!
   꿈 같은 일이로다

   東津水 九百 구비쳐
   흰젖처럼 흐르고
   황혼은 밀려오잖아
   땅에서 솟나부다

   온 들에 저녁연기
   연기속에 들불 일다

   南洋서 北支에서들
   다들 돌아왔는지

   ― 「金萬頃 들」 전문

6연으로 짜인 이 글은 얼핏 보면 자유시 같고 형식상으로는 두 수의 연시조로 구분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내용으로 보면 첫째 수와 둘째 수를 구분할 의미단락이 나뉘어지지 않는다. 첫째 수의 종장 “동진수 구백 구비쳐 흰 젖처럼 흐르고”와 둘째 수의 초장 “황혼은 밀려오잖아 땅에서 솟나보다”가 한 의미단락으로 연결되어 있다. 시조의 기본틀에 대한 변화를 부단히 모색했던 조운은 이 작품에서도 시조의 또 다른 파격을 시도해본 것 같다. 지평선과 수평선이 잘 구분되지 않는 드넓은 금만평야를 첫째수와 둘째수가 구분되지 않는 이런 식의 파격을 통하여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금만경 들은 전라북도에 있는 김제와 만경의 넓은 평야지대를 일컫는다. 흔히 금만평야라고도 한다. 지평선과 수평선이 사이좋게 가물거리는 곳이다. 바다보다 넓어 보이는 금만평야의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화자는 빼앗겼던 땅을 되찾게 된 기쁨을 넉넉하게 음미하고 있다. “눈이 모자라 못 보겠다”는 구어투는 “이게 다 우리 거”라는 새삼스러운 확인을 곁들여,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운 조국광복의 기쁨을 만끽하는 화자의 충만감을 솜씨 있게 요약한다. “눈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기쁨과 충만감을 표현할 말이 모자랄 지경인 것이다.

하늘에서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 같은 지평선의 황혼, 바라볼수록 가슴 뿌듯한 그 드넓은 벌판을 동진강이 젖줄처럼 흘러 골고루 적시고 자욱하게 깔리는 저녁연기 속에 여기저기 들불이 일고 있다. 남양(南洋)으로 북지(北支)로 끌려갔던 이들이 어서 돌아와 이곳에서 다시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화자는 그들의 안위(安危)가 다소 걱정스럽다.

그러나 그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급변하는 한반도의 사정이었다. 「석류」나 「고부 두승산」이나 「금만경 들」에 보이는 광복의 감격과 역사에 대한 믿음과 그 기쁨이 온전히 음미되기도 전에 찬탁 반탁으로 국론이 나뉘고 38선으로 국토가 잘리고 조국분단의 고착화 조짐이 가시화되고 있었다.

   柚子는 향기롭다 祖國처럼 향기롭다
   이울줄 모르는 잎에 안게 자랐노니
   가시城 六百里두리 漢拏山을 지킨다

   물을 건너오면 탱자된다 하거니와
   물을 건너가면 탱자도 柚子 된지
   밤마다 漢拏山봉우리 별이 불른다노나

   ― 「柚子」 전문

이 작품은 『조운시조집』(1947년 조선사)에도 없고 『조운문학전집』(남풍)의 작품연보에도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 복간된 『조운시조집』(2000년, 작가)의 맨 마지막 자리에 ‘1948년 6월 17일’이라는 날짜표시와 함께 실려 있다. 기록대로라면 조운의 월북 이전의 작품들 중 마지막 작품이 되는 셈이다. 어디에 발표되었던 작품인지 아직은 알 길이 없다. 위 인용시조의 표기 중 ‘안게’, ‘두리’, ‘된지’, ‘불른다누나’ 등 오철(誤綴)로 여겨지는 부분들을 이 글에서는 각각 ‘안겨’, ‘둘러’, ‘될지’, ‘부른다누나’로 고쳐 읽어보았다.

이 시조는 조운의 다른 수작(秀作)들에 비하여 시적 형상화가 깔끔하지 못한 편이다. 얼핏 보기에 ‘향기’로 연결된 ‘류자(柚子)’와 ‘조국(祖國)’과의 관계가 우선 관념적이다. 그 유자들이 ‘가시성을 두르고 한라산을 지킨다’는 표면상의 문맥만으로는 그 상황이 얼른 납득되지 않는다. 사계절 푸른 잎을 매달고 있는 유자나무의 리얼리티와, 제주도 주민들의 변함없는 지지와 사랑을 중의적으로 표현해내고자 하는 “이울 줄 모르는 잎에 안겨 자라노니”라는 구절도 그 의도를 만족시킬 만한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그 안이한 관념화와 얼른 납득되지 않는 상황설정과 어색해진 리얼리티의 문제점들은 읽기에 따라서 월북 직전에 조운이 겪은 상황과 갈등을 어느 정도 해명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을 건너가면 탱자도 유자 될지’라는 기대와 불안이 우선 예사롭지 않다. 이 작품이 씌어졌다는 1948년 6월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이 가결되고 찬탁 반탁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김구 여운형 등이 암살되고 삼팔선이 막히고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고 「석류」나 「고부 두승산」이나 「금만경 들」에서 보이던 광복의 감격과 역사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지하화되던 무렵이었다. 신탁통치 반대의 기치를 내걸고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어 이승만 단독정부수립이 가시화되어 있던 무렵, 감격과 믿음과 기대가 갑자기 시들어 지하로 잠적하던 그 무렵에 제주도에서는 4·3 항쟁이 시작되어 십만을 헤아리는 제주도민들이 무참히 학살당하고 있었고 뭍에서는 그 진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소문만 무성했다.

이 작품이 쓰인 1948년 6월은 4·3 항쟁과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중간쯤 되는 시기다. 글의 내용으로 보아 4·3 항쟁의 진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무성한 소문들을 통해서 화자는 제주도의 항쟁이 계속되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4·3 항쟁 희생자들의 한은 이후에 여순항쟁으로 한국전쟁으로 이어져 왔었거니와, 이러한 정치 사회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이 시조를 읽는다면 관념적인 유자향기나 어색한 리얼리티나 상황설정이 어렵지 않게 이해될 것이다.

이 시조의 표면상의 문맥대로라면 유자가 그리운 話者는 스스로를 탱자로 여기고 있다. 「구룡폭포」에서 그는 ‘풀잎에 구슬구슬 맺혀’ 있다가 언젠가 만날 폭포와 같은 감격 속으로 휩쓸리고 싶던 이슬이었다. 「석류」에서는 또 가슴을 빠개젖히고 민족 앞에 무르익은 순정을 열정적으로 열어보이던 빛나던 석류알이기도 했었다. 이제는 ‘물을 건너오면’ 유자도 탱자가 되는 불행한 땅, 감격과 믿음과 기대가 지하로 잠적한 땅 위에 그는 놓여 있다. ‘물을 건너가면’ 탱자도 유자가 될지 모른다는 절망적 안간힘으로 화자(話者)는 멀리서 한라산을 그리워한다. 한라산 봉우리가 뭍에서 보일 리가 없다. 한라산 봉우리가 아닌, 한라산 봉우리에 내리는 별빛을 바라보면서 한라산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물을 건너가는 것, 건너가서 “이울 줄 모르는 잎에 안겨” 사는 유자가 되어 가시 성(城)을 두르고 한라산을 지키며 조국을 그 향기로 채우고 싶은 화자는 밤마다 한라산 봉우리의 별을 바라보면서 “물을 건너가면 탱자도 유자될지” 반신 반의(半信半疑)하면서 가능성이 희박한 그 희망을 간절하게 곱씹고 있다.

「고부 두승산」이 우리 문학사에서 갑오년 농민전쟁을 처음으로 조명한 작품인 것처럼 이 「유자」라는 시조도 제주도 4·3 항쟁과 관련된 최초의 문학작품일 것이다. “이울 줄 모르는 잎에 안겨 자라”는 유자처럼 제주도 주민들의 변함 없는 지지와 옹호를 받으면서 가시 城을 두르고 한라산을 지키는 항쟁의 주역들(유자)에게 물을 건너가고 싶은 탱자의 꿈으로 멀리서나마 격려를 보내고 그 희생자들의 뜻을 기리고 싶었던 것이 이 시조의 기본바탕을 이루고 있다.

1980년 광주항쟁 때는 야음을 틈타 계엄을 뚫고 광주에 들어가서 시민군에 참여했던 이들이 있었다. 계엄의 외곽에서 항쟁의 현장에 뛰어들고 싶어 서성거리며 틈을 노리다가 끝내 뛰어들지 못한 이들도 많았다. 바다 건너 제주도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단절된 공간이다. 물을 건너가서 한라산을 지키는 ‘유자’들의 항쟁에 동참하고 싶었던 탱자의 꿈이 삭지 않은 채로 조운은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여순항쟁을 겪는다. 1949년의 조운의 월북은 이 시조의 물을 건너가고 싶던 탱자의 꿈과 아무래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신탁통치에 대한 지식인의 고심어린 신념이 표백되어 있는 중편 「해방전후」가 이태준이 월북하게 된 필연성을 제공해주는 단서인 것처럼, 제주도 4·3 항쟁에 대하여 최초로 관심을 보인 이 「유자」도 조운의 월북의 근거를 짐작하게 하는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탱자의 꿈은 실현되었는가

갑오농민전쟁에 대해서 시대를 앞서 처음으로 문학적으로 조명한 것, 4·3 항쟁에 대해서도 누구보다도 먼저 관심을 보인 것, 신재효의 문화사적 위상을 처음으로 밝힌 것 등등이 조운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되새겨져야 할 사항들이지만 그것들은 사실 이 글의 곁가지다. 지금까지 이 글은 월북 이전의 조운의 시조들을 근거로 그가 월북하게 된 필연성을 중점적으로 밝혀보았다.

조운이 다정다감한 해학의 시인이라는 점은 우리 문학사가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다정다감함이나 인간미 넘치는 해학들을 탈이념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그에 대한 온정적 견해들은 그의 시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장애가 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훌륭한 시인의 작품과 그 생의 궤적이 물과 기름처럼 따로따로일 리는 없다. 역사에 대한 조운의 신념과 인간미 넘치는 해학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밑그림이었음을 이 글에서 거듭 확인해두고 싶었다. 그것이 조운의 시조를 바르게 읽는 길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식민지시대의 조운은 시조 쓰는 일보다도 조국의 광복이나 지역사회문화운동에 더 열정을 기울였던 사람이다. 그의 몸에 밴 서민정신은 민족과 민중에 대한 그의 열정이 육화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 글은 「구룡폭포」를 비롯한 여러 편의 시조들을 통해서 확인해보았다. 식민지시대부터 해방공간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조 속에 이어져 있는 일관된 역사인식과 「선죽교」에서 보이는 민중중심적 사관은 훗날 「고부 두승산」을 거쳐 「유자」와 같은 작품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대한 믿음과 기대와 그에 따르는 심각한 좌절을 겪는다.

4·3 항쟁을 소재로 삼았던 「유자」의 그 좌절과 불안, 폭포에 섞이어 함께 쏟아져내리고 싶던 이슬의 꿈이 「유자」에 이르러서는 물을 건너가고 싶은 탱자의 꿈으로 바뀌어 있거니와, 그 탱자의 꿈이 월북으로 이어진 것은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월북 이후의 그의 시조에도 서민적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지, 탱자의 꿈은 과연 얼마나 실현되었는지 궁금하기 이를 데 없다. ■<계간 '유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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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양
1942년 전북 김제 출생.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7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시집 『눈 내리는 마을』,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수수깡을 씹으며』 등이 있음. 현재 우석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