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시인론

가능성과 한계의 시 - 변희수

공산(空山) 2016. 4. 19. 22:04

가능성과 한계의 시

변희수 시인

 

 

'시는 모든 문학의 가능성이다.' 시를 단순히 장르적으로 대하지 않는 이 멋진 말을 발견했을 때 스스로 기고만장한다. 문학과 가능성, 이 두 단어의 조합은 실로 벅차다. 초월적이고 우주적이다. 특히 시에 대해서 스스로 자폐적 인식을 키워왔던 내게 일종의 보상심리 같이 작용한다. 어찌되었든 일단 우리는 이 아름다운 말의 가능성을 끝까지 믿어보기로 하자. 미래는 믿는 자의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범위를 좀 더 넓게 잡아보자. 시는 문학의 가능성이면서도 문학을 벗어난 모든 것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특히 인공지능이라는 말이 득실거리는 21세기의 아침이라면 시는 시와 시 밖의 모든 사물들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방금 마신 커피 한 잔,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이 딱딱한 키보드, 별, 물, 공기 모두 가능성에 속한다. 시에서 가능성이 아닌 것은 없다. 가능한 한 최대한의 가능성을 이해하려고할 때 시는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 가능성을 어떻게 무엇으로 증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서 끝까지 괴롭히게 될 것이다.

 

살아가는 일도 마찬가지지만 글쓰기에 어떤 패턴이 있다면 문제는 더 용이해질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패턴이라는 말에는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 패턴이라는 말은 거의 무의미하다. 시인은 조금 다른 種에 속하고, 일정한 관습과 교육된 패턴에 따라 사물이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게 이해하는 類들이다. 시인은 패턴을 거부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개척해나가는 사람들인데 가능성이란 신기하게도 불가능에 대항하는 가능이 아니라 차별성이라는 말과 훨씬 더 가까이 내통하고 있다.

 

1. 내재율처럼

 

요즘 인기 있는 방송 '복면가왕'을 시청한다. 가수가 단 한 곡의 노래를 위해 무대 위에서 혼신의 힘을 쏟아낸다. 마지막인 것처럼, 마지막이 되지 않기 위해 전력투구한다. 가만히 보면 시인과 흡사한 점이 많다. 시인은 시라는 아름다운 가면을 쓰고 땀을 뻘뻘 흘리는 자들이다. 가면 뒤에서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다.

 

가면의 형식면에서도 시의 형식에서도 비슷한 윤리가 작동한다. 아무리 절창이라도 a가 b처럼 불렀다면 그것은 불후의 명곡이 아니라 모창이나 표절로 전락하고 만다. 이 무대에서는 a를 가장 a답게 부르는 것만이 미덕이다.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숨막히는 관객들의 정적이 흐르고 온갖 현란한 창법이 쏟아져 나온다. 진정한 프로는 무대를 두려워하기도 하지만 그 무대를 끝까지 즐길 줄도 안다고 했던가.

 

무대는 가수나 시인이 노래를 포기하지 않는 한 끝없이 싸워야 할 공간이지만 관객은 언제나 냉정하고 똑똑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시는 무대를 떠나서도 끊임없이,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재관람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들은 두렵고 이것이 우리가 어떻게 다른 창법으로 노래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민이 깊어질 때, 다시 무대로 돌아와 노래의 리듬을 따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 처음 부르는 것처럼 노래에 의지해 보자.

 

 

커튼콜처럼,

다시 무대가 열리고 있네, 검은 휘장 속에서 네가 걸어 나오고 있네

온갖으로 오고 있네, 온갖이라는 말이 폭죽처럼 쏟아져 내리네

많고 많은 온갖, 온갖은 사방팔방에서 오네, 온갖은 붉게붉게 물들면서 오네

온갖이 지문처럼 스미네, 번지네, 눈동자마다 온갖이 또록또록 새겨지고 있네

 

온갖이 나를 불러내고 있네

밤의 강보에 싸인 나를, 재촉하네, 손짓하네

어둠의 탯줄이 화들짝 떨어지네, 배냇짓 같은 꿈들이 울음을 터트리네

신생아처럼 눈을 떠 보네, 두근두근 온갖이 내게로 오네, 내가 온갖의 품에

안겨 있네, 가슴이 뛰네

 

시렁 위에 얹힌 아침을 꺼내 신어보네, 태양이 붉은 머리칼을 땋아 내리네, 금방 구운 빵처럼 내가 부풀어 오르네, 나뭇잎이 살랑거리네, 어항 속 물고기들처럼 바쁘네, 시계가 뻐꾸기처럼 우네, 냄비가 정열적으로 끓어오르네, 자작자작 내가 졸아드네, 다시 당신을 연주하고 싶어지네, 온갖의 리듬, 온갖의 박자에 맞춰 나무처럼 춤추고 싶네, 풀처럼 웃고 싶네, 새처럼 떠들고 싶네, 동쪽에서 서쪽으로 주-욱,

밑줄을 그어 보네, 그러나

 

동이 틀 때는 문득

쓸쓸한 그림자,

홀로 잠입한 짐승처럼 내가 있네, 네가 있네

온갖의 밀림 속을 혼자 걸어가네

오래된 조명처럼 햇빛이 머리 위를 비추네

앙코르처럼 내가 불려나가네, 네가 있네

우리가 있네

 

― 아침의 노래「문학세계사」2016

 

노래는 시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아주 유효하게 작용한다. 이미 내 몸속에 들어와 있는 어떤 내재율처럼 노래가 노래를 불러내며 시의 실마리가 풀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리듬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춘하추동이나 생로병사와 같은 계절이나 생의 리듬 속에 산다. 따라서 연속 되는 리듬은 생래적으로 익숙할 수밖에 없다. 시에서 리듬 즉 율은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될 수는 없지만 수단으로 내용과 의미에 기여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한 편의 시에서 지배적으로 출현하는 음운의 운율적 성격은 청각적 음성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의미론적이다.'고 한 말들은 충분히 새겨볼 필요가 있다.

 

위의 시 역시 많은 부분 운율에 의지하고 있다. 태양이 막 떠오르기 직전에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온갖 물상들의 모습과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던 끝에 노래의 형식을 빌려 쓴 시다. 노래한다고 마음먹는 순간 풀리지 않던 시가 마치 스스로에게 거는 주술처럼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흘러 나온 경우다. 아침마다 머리 위에 태양이라는 조명이 뜨겁게 내리쬐는 광대무변한 자구, 그 지구라는 무대에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 그런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 무수히 반복되는 열거와 리듬을 사용했다.

 

이렇게 계속 반복되는 리듬들은 발가벗겨져 있으면서도 편하고 친근하다. 시인은 순간을 포착해서 영원을 산다. 설레고 두렵고 조금 쓸쓸한 무대에서 누가 들어주지 않아도 노래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리를 찾아오는 느낌들을 받아 적어야 할 순간이 온다면, 노래만한 시 시만한 노래가 있을까.

 

2. 의도된 상상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더 이상 노동을 신성시 여기는 시대가 아닐지도 모른다. 분명 지금보다 더 많은 부분의 노동을 기계가 대신할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보다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이제는 일하는 것보다 노는 것, 그것도 잘 노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고 말한다. 그냥 놀면 되지, 잘 노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이때 '의미 있게'라는 단서를 붙이면 '잘'이라는 말은 쉽게 설명이 된다. 물론 무의미하게 노는 것이 목적일 수도 있지만 이때의 무의미 역시 '잘' 의도된 의미에 해당될 것이다. 이렇게 의미라는 것은 항상 의도적이며 내면적인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다행히 인간은 늘 의미를 찾으려고 할 뿐 아니라 거기에 상상에 대한 의도까지 가진 동물이다.

 

상상에 기대고 있는 한 인간은 지루할 틈이 없어 보인다. '상상력은 인간이 가진 여러 능력의 여왕이며 세계가 또한 그 힘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 보들레르의 말은 갈수록 빛나는 진리 같다. 시 역시 언제나 상상하길 원한다. 상상의 가능성과 의도성 이것이 시의 가능성이자 시를 끝없이 달리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빈곤을 느낄 때마다 상상의 포만감을 즐기자.

 

 

길은 명령한다 달리시오, 달리시오들, 곧장, 이 길로 돌아보지 말고 쭈욱 달리시오들 채찍을 휘두르며 석유를 먹은 검은 말 잔등을 후려친다 목전에 붉은 당근밭이 있다고 등 뒤에 푸른 이정표를 감추며 속삭인다

 

곧게 뻗은 길 위에서 구불구불한 사색은 금물, 브레이크가 많은 당신의 산책도, 떠도는 구름의 방랑도 금물 여기 길이 있다고 달려도 달려도 계속 달려 나온다 돌아가시오, 라고 말 할 때조차 길은 철저히 달리시오를 외친다

 

벗어나도 벗어날 수 없는 길이, 여기 길 밖에 달리 길이 없다고 명령한다 길은 길 위에서 길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한다 길은 길치처럼 졸졸 따라다니다가 길을 줄줄 흘리고 다닌다 고삐를 바짝 당기면 당길수록

 

끝내 사라져가는, 끝내 사라지지 않는 바닥 한 줄 집요하게 추격해오고 있다

 

― 새벽, 하이웨이「다층」2016

 

시는 시적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상상한다. 나는 지금 주체와 대상이 전도된 상상을 즐기고 있다. 내가 자발적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길의 명령으로 나는 달린다. 저마다의 길, 그것이 시든 무엇이든 간에 일단 시작된 길은 끊임없이 닦달하고 부추긴다. 길은 날마다 내게 떼를 쓰고 있는 것 같다. 길 위에서 이것이 정말 길이냐고, 길을 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

 

길은 늘 현재 진행형일 뿐이다. 길은 목적이면서 수단이고 피로인 동시에 희망이다. 시를 쓰고 있으면서도 시를 찾아 헤매는 것처럼 길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나는 종종 새벽에 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어디로 달릴지 모르는 검은 말의 안장에 앉아 있곤 한다. 상상 그것은 한낱 속절없는 꿈, 이것은 영원히 꾸고 있는 꿈 그도 아니면 나는 검은 말을 타고 푸른 말갈기를 휘날리는 몹쓸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길이, 길이 아니라 결국 바닥이라는 걸 알아버리는 순간까지도 달리고 싶은 욕망, 그 욕망과 함께 유쾌한 상상의 통로를 따라 질주해보는 것, 그것은 의미심장하다. 상상만이 이 험난한 여정을 즐기게 해주는 유일한 대안은 아닐까.

 

3. 가능의 꽃

 

나는 늘 시를 욕망한다. 시가 나를 욕망할 때까지 참거나 기다리지 못한다. 이럴 때 떠올리는 글이 있다. "욕심이다. 이 욕심을 없앨 때 내 시에도 진경(進境)이 있을 것이다. 딴사람의 시같이 될 것이다. 딴사람 ― 참 좋은 말이다. 나는 이 말에 입을 맞춘다." 1966년 김수영이 쓴 산문에 나오는 말이다. 정말 멋진 말이다. 욕심과 거리를 두고 타성에 젖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문장이다. 모든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시인도 자신의 시가 진부하다는 생각이 들 때 가장 괴롭다. 그래서 김수영의 '딴사람'이라는 말은 무서운 자기 자신의 각성으로 들린다.

 

자기부정을 통해서 긍정에 이르는 시는 지극하다. 그것은 '딴 사람의 시'에 이를 때 지극한 '나의 시'에 이른다는 말과 같으며 참으로 가혹한 진실이다. 그러나 오랜 친구처럼 따라다니는 욕망, 이것을 버릴 수 있을까. 시를 쓰면서 한계를 느끼고 한계를 느낄 때 다시 시를 쓴다. 이 이중적 아이러니가 내 시의 원천임을 부인할 수 없다. 언젠가부터 가능성과 한계는 늘 어깨동무를 하고 다닌다.

 

 

서랍이 있는 방에서 서랍을 생각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한계를 견디기 위해서 서랍은

 

헐렁한, 구멍 난, 빛바랜, 짝이 맞지 않는, 뒤엉킨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함구한다

 

수납되는 순간

서랍은 모든 사적인 기록들을 포괄적인 하나의 문장으로

단락 짓지만 서랍은 서랍의 한계 때문에

열리고 닫힐 때마다

반목한다 저항한다

 

칸칸마다 포개어지던 기억들이

뒤죽박죽일 때

서랍은 서랍의 형식으로 정리되지만

언제나 하나의 손잡이에 매달린 만년체 문장

손 내밀면 왈칵, 쏟아질 줄 안다

 

지난밤

서랍 밖에서 누군가 서랍을 열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갑자기 하얗게 목련이 핀 것도 서랍 때문이다

수납의 한계를 앓던 꽃들이

향기로

 

올칵왈칵 피고 있다

 

― 서랍의 한계「시와 소금」2016

 

위의 시에서 서랍을 꽃이라 해도 좋고 시라고 해도 좋겠다. 누구에게나 서랍적인 것은 있고 그것은 정해진 용량 안에서만 수렴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헐렁하고 구멍 나고 빛바랜 그것들은 수납되는 순간 어떤 형식으로든 정리되지만 늘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서랍에 조그마한 손잡이가 붙어 있거나 손을 밀어 넣을 수 있는 작은 홈이라도 파져있다는 것은 얼마나 안심이 되는가.

 

누가 서랍을 온통 다 열어놓았는지 겨우내 입을 꼭 다물고 있던 나무들이 우르르 꽃을 피운다. 이것은 시의 일과 크게 다르진 않겠다.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처럼 어느 날 불쑥 열어보고 싶어지는 것, 언어라는 조그만 손잡이에 매달려 간절하게 열어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 시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러나 무척 섭섭하겠지만 꽃나무에 새가 와서 잠깐 울어주듯 언어는 다만 그런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 모른다. 서랍에 난 작은 손잡이가, 꽃나무에 와서 잠깐 울고 가는 새가 곧 시가 될 수는 없을 터. 언어의 한계를 자각하지 못하는 자는 언어를 참으로 명료하게 사용할 수 없다고 했던가. 그렇다하더라도 적당한 때 새가 와서 울어주는 나무들은 위안이 된다.

 

한계 직전이 되어서야 비로소 열리는 서랍처럼 단 한 줄도 열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시가 빠끔히 문을 열고 흥얼흥얼 노래하는 것은 즐겁다. 한계를 스스로 알아차리고 왈칵왈칵 피고 있는 저 가능의 꽃들이라니! 천지사방 꽃피는 기미가 가득한 날, 시라고 먼저 말해버리면 시가 후드득 떨어져버릴 것 같다. 저 오래된 서랍들을 이쯤에서 그만 열어볼 생각은 없으신지.

 

 

◆ 약력 : 경남 밀양 출생. 2011년 영남일보문학상 당선. 2013년 천강문학상 수상. 201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