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의 시적 화자와 리얼리즘
-- 이용악론
윤여탁
1. 서정시와 시적 화자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과거의 숱한 문예학자들은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려놓고 있다. 이보다 작은 범주인 '서정적인 시'나 '서정시'에 관해서도 같은 현상을 보인다. 그러나 대체로 후자에 대해서는 주관 표현이자 개인적인 발화라는 점에는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아울러 문학 일반이 그렇듯이 체험의 허구적 창조라는 점도 널리 인정되고 있다. 이 중에서 주관성에 관한 서정시의 개념 정의는 그리스 이래로 헤겔, 함부르거, 슈타이거 등에 의해서도 그대로 계승되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서정시의 체험 문학이라는 특성은 플라톤이 모방(mimesis)론을 제기한 이래로 부정될 수 없는 규범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런 일반적인 합의에 대하여 비판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 비판은 서정시의 다양한 양식적 모색이 진행되면서 더욱 다양하게 개진되고 있다. 특히 전통적으로 인정되었던 문학의 장르 개념 즉 서정시, 서사시, 극시 또는 시, 소설, 희곡이라는 분류 체계에 대하여 회의가 제기되면서, 이런 상위 장르(Gattung)와 다른 내포를 지니는 하위 장르(Art)에 대해서도 본격적인 재검토 작업이 진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문제는 3분법 장르 구분의 충실한 계승자인 헤겔에 의해서도 제기된 바 있다. 헤겔은 서정시가 내용상으로 주관적이고 내면적이며, 형식상으로 언어의 음악적 변조라는 특징을 기본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서사시가 서정적인 어조를 나타내는 것처럼, 서정시도 그 내용과 형식에서 서사시적 사건을 채택할 수 있음을 설명하였다.
특히 시인이 시를 쓸 때 요구되는 정신이라는 측면과 창작 방법이자 작품 평가의 기준으로 반영과 전형을 중시하는 리얼리즘이 시에서 논의되면서, '주관성'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특징은 다양한 측면에서 재검토될 것을 요구받고 있다. 물론 이런 회의론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보편적 규범이기보다는 예외적으로 취급되고 있는 측면도 있다. 즉 서정시에 대한 우리의 합의가 용도 폐기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전히 서정시는 주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시 형식이 실험되면서, 그 주관성의 내포를 확장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우리 시문학사에서도 똑같이 제기되는 과제이다.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전통적인 서정시나 김동환의 [국경의 밤]이라는 서사시와는 다른 시 형식이 1929년 임화에 의하여 제기되면서, 이 문제는 우리 시문학사에서도 짚고 넘어가야 할 과제가 되었다. 즉 '단편 서사시'라는 새로운 시 양식이 그 예이다. 본고는 이런 측면에서 단편 서사시의 형식과 내용을 여러 측면에서 계승한 이용악의 시작품을 중심으로 서정시의 또다른 측면을 밝히고자 한다. 이런 모색은 시의 리얼리즘 구현이라는 관점을 염두에 두고서 진행된다. 특히 서정시의 한 특징인 시적 화자의 다양한 양상을 분석하여, 서정시가 어떤 형식 실험을 하고 있나를 밝히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오랑캐꽃], [기관구에서], [전라도 가시내]와 [낡은 집]에 한정하여 시적 화자의 양상을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이들 시의 시적 화자가 시의 리얼리즘의 실현에 어떻게 작용하나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시적 화자와 리얼리즘
시의 양식적 실험이 진행되면서 여러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이 중에서 시적 화자의 문제는 다양하게 논의되었다. 그리고 시적 화자의 층위에 대해서도 다양한 관점이 제기되었다. 시의 창작에 관여하는 각기 다른 목소리로서의 시적 화자층은 서정적 주체, 시적 자아, 시적 주체, 창조적 주관성, 서정적 주인공 등으로 정의 또는 구분되면서, 이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마다 나름의 내포를 지니고 분석되었다. 필자도 이에 대하여 이미 논의를 정리한 바가 있다. 그때 필자는 시의 화자층이 시인, 서술자, 주인공 등으로 분리됨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때로는 분리되거나 하나의 실체로 드러날 수 있음을 밝혔다. 특히 작품에 관여하는 범위에서는 시적 화자라는 서술자와 시가 표현하려고 하는 정서의 주체에 대하여 서정적 주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이분법적 개념틀에 의하건, 아니면 일원론적인 개념틀에 의하건 화자층에 대한 이런 관점은 영어의 'Poetic I'에 해당되는데, 이는 시의 정서나 서술을 주도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축자적(逐字的) 번역은 '시적 자아'이다. 이때 'Poetic'을 '시적' 또는 '서정적'으로 'I'를 '자아' 또는 '주체'로 해석하여, 이들을 결합한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필자는 이 중에서 '시적'이라는 개념보다는 '서정적'이라는 개념이 더욱 포괄적이고, 나름의 내포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시적'이라는 용어는 시에 국한되는 것이지만, '서정적'이라는 용어는 시가 아닌 경우에도 적용되는 용어이며, 또 '서정적'이라는 용어에는 서정이라는 어휘가 담고 있는 정서적 내포가 포함되어 있다. 즉 'Poetic'이 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서정 장르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 개념이기 때문이다. 또 이 글에서는 '자아'라는 용어보다는 '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I'가 존재 개념을 내포한 '자아'에 머물지 않고, '객체'라는 상대적 존재를 대타적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그 자신의 능동적인 역할이 '주체'라는 용어에는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시의 정서를 주도하는 존재를 '서정적 주체' 또는 '주체'로 부르고자 한다.
이에 비하여 시적 화자는 시에서 서술을 담당하는 서술자(narrater)에 한정되는 개념이다. 물론 시에 따라서는 서술자가 서정적 주체와 일치할 수도 있다. 또 서정적 주체는 실제 시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각기 다른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다. 시에는 이처럼 다양한 층위를 지닌 인물들이 관계되어 있다. 그리고 시에는 이런 주체나 화자 외에도 이들이 서술하거나 자신의 정서를 위탁하는 객체가 존재한다. 이 객체는 사람일 수도 있고, 사물이나 사건과 같은 대상일 수도 있다. 이때 객체로 존재하는 인물은 시의 주인공과 같은 역할을 하거나 아니면 주체나 화자의 담화 상대자인 또다른 독자 또는 청자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시에 등장하는 인물은 다양한 얼굴을 가진 존재이다. 그리고 이런 시적 화자의 등장은 이들 인물들이 서술하는 대상, 즉 형상을 통하여 정서를 유발시킨다. 특히 서술 구조를 지니는 시에서는 시적 화자가 적극적으로 등장하여 시의 서사적 구조를 이끄는 방식을 채택한다. 이를 통하여 시에서도 주관의 객관화가 가능하며, 현실의 객관적 반영과 전달도 가능해진다. 이런 관점에는 서정시가 주관적이라는 일반적인 합의와의 괴리가 존재한다. 예를 들면 슈타이거는 서정적인 것의 특징을 회감(回感 : Erinnerung)이라고 요약하고 있다. 그리고 회감은 주체와 객체의 간격 부재에 대한 명칭이며, 서정적인 상호 융화라고 보고 있다. 이런 설명은 서정시나 서정적인 것을 주관의 표현으로 한정할 때에는 절대적으로 유효한 규정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서정시에는 주체와 객체의 간격 부재라는 설명은 타당한 것이 못된다. 주체와 객체 사이의 거리가 있고 없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서정적인 문예에서는 주체 속으로 객체(세계)의 진입에 머물지 않고, 융화(Ineinander) 작용의 단계를 지향한다.
이런 작용과 단계의 설명은 화자와 대상에 관한 위의 설명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이 대상(객체 또는 세계)이 이룩하는 독자적인 시의 세계는 나름의 존재 의의를 지니고 존재한다. 물론 서정시 이전에는 그 대상은 개별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의 시세계로 형상화되기까지는 주체와의 관계를 맺게 된다. 여기서도 주체의 변별적인 특성을 문제삼을 수 있다. 즉 창작의 주체냐 아니면 수용의 주체냐에 따라 대상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게 설명될 수 있다. 창작의 경우에는 주체가 대상을 빌어 표현하지만, 수용의 경우에는 대상을 통하여 그 대상이 표상하는 바를 주체는 수용한다.
여기서 대상이 시적으로 형상화되는 과정 또한 문제가 된다. 대상이 구체적인 형상을 띠지 못하는 서정시의 경우에는 주체만이 정서나 사상의 토로에 머물게 된다. 또 대상에 감정을 이입하여 주체의 정서를 나타내는 경우에는 대상만이 존재한다. 이 경우에는 주체가 거의 화자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대상이 사건이나 인물인 경우에는 한결 다른 모습을 지닌다. 즉 사건이나 인물을 형상화의 대상으로 삼았을 때, 경우에 따라서는 주체와 다른 인물이 등장하여 사건이나 정서를 서술하거나, 인물들의 담론을 통하여 형상화된 사건이나 정서를 통하여 표현된다. 어떤 경우라도 시의 대상이 구현하는 세계가 현실을 반영하고 역사의 합법칙성을 실현한다면 서정시에서도 리얼리즘은 성취될 수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서정시에 형상화된 대상(세계)이 객관적인 존재로 주체와 접하고, 창작과 독서의 과정에서 주체를 만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서정시의 리얼리즘적 특성을 살필 때에는 이런 측면들을 고려하여야 한다. 위의 어떤 형태든지 시적 화자가 진술한 대상의 실체에 따라 리얼리즘은 획득될 수 있다. 이 경우 리얼리즘은 형상화의 방법이나 설명 방식보다는 정신의 측면과 더욱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시적 화자가 표나게 드러나는, 그래서 시적 화자가 서정적 주체와는 다른 목소리를 가지고 존재하는 시 양식의 의미는 이런 관점에서 주목된다. 서정적 주체의 목소리나 시정신과 더불어 화자에 의하여 진술된 객관화된 대상이 지니는 리얼리즘적 특성이 함께 문제가 되는 것도 이런 이유와 관련이 있다. 물론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서사시가 아니면서도 시적 화자가 진술한 서술적인 형식과 내용이 지니고 있는 리얼리즘시도, 이런 요인들이 시적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같은 설명을 할 수 있다.
감정이나 사상을 토로하거나 사물에 빗대어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던 전통적인 서정시(주관성이라는 측면이 강조될 수 있는)의 리얼리즘 문제도 중요하다. 그러나 단편 서사시 계열의 시작품이 등장하면서 시적 화자라는 형상화의 주체도 (서정시가 표현하는 대상의 리얼리즘이라는 측면과는 다른 각도에서) 리얼리즘의 실현 방법이라는 관점에 살펴져야 한다. 즉 화자라는 새로운 장치를 통하여 사상과 감정 또는 정서를 표현하려는 양식적 실험이 시작되면서, 이 양식은 리얼리즘을 구현하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모색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유형의 서정시는 시적 화자와 이 시적 화자에 의하여 기술된 대상(사건, 인물, 사상 등)에 의하여 시의 리얼리즘이 성취될 수 있다는 또다른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3. 이용악 시의 시적 화자와 그 양상
이 장에서는 이용악의 대표적인 시작품 4편을 분석하여, 그 화자의 양상과 의미를 주로 살피고자 한다. 이 작품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고 있으며, 그 문학사적 의의도 어느 정도는 논의가 되고 있는 것들이다. 이용악의 시에서는 시적 화자나 서정적 주체, 대상의 존재 형태가 각각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시적 화자의 의미를 점검하기로 한다. 이는 이용악 시의 성취를 리얼리즘이라는 각도에서 평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1) 시적 화자의 탈락 -- [오랑캐꽃]의 대상화
[오랑캐꽃]은 이용악의 제 3시집의 표제작이었으며, 그 의미도 여러 각도에서 분석된 바 있다. 먼저 이 시에서는 '오랑캐꽃'에 얽힌 설화를 서술하고 있는 시 앞의 유래담이 작품 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 시의 진정한 의미는 유래담이 전하는 이야기 외에도 시가 전달하는 여러 정서를 통하여 이해해야 한다. 이제 작품을 통하여 화자와 대상을 분석하여 보자.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홈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태를 드리인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 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년이 몇백년이 뒤를 이어 흘러 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었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께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얼핏 보면 이 시의 형상화 방법은 전통적인 고시조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말하자면 꽃을 대상으로 하여, 그 대상에 감정을 이입하여 표현하는 전통적인 방법이 구사되고 있다. 특히 이 시에는 서술자가 누구라고 구체화할 수 없을 정도로 탈락(은폐)되어 있다. 단지 "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께"라는 표현에서 잠시 얼굴을 내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실체는 누구라고 할 수 없는 불특정 다수이다. 그런데 이 탈락한 시적 화자는 서정적 주체의 역할도 한다. 그러면서 여진족의 다른 이름이었던 '오랑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꽃이 주는 정서를 전달하고 있다. 오랑캐꽃이 표출하는 정서를 시적 화자는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대상이 전달하는 바를 시적 화자는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우선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랑캐꽃의 유래담이 문제가 된다. 즉 유래담으로 서술되고 있는 여진족의 불행한 역사적 운명이 시의 감상에 중요하게 작용한다. 문학 외적 정보라고 할 수 있는 이 유래담은 실제로 작품의 중요한 내용이 되기도 한다. 어떻든 이 시는 비극적인 운명을 지닌 여진족의 머리 모양과 같다는 인연 외에는 전혀 인연이 없는 '오랑캐꽃'을 여진족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렇게 표현된 시적 대상은 독자적으로 정서를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시적 화자나 독자 또는 서정적 주체는 대상이 대상으로 머물고 있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서정시 일반이 그렇듯이 대상을 통하여 서정적 주체의 정서를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먼저 1연에서는 고려의 여진 정벌 때문에 비극적인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객관적인 사실의 기술만 나타나 있다. 2연에서는 구름이 흐르듯이 역사는 흘렀다는 비유적 표현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3연에서는 이런 세월을 뛰어넘어 이런 역사를 지녔던 오랑캐와 꽃을 동일화하고 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오랑캐꽃'은 여진족의 비극적인 운명을 한 몸에 안고 있는, 일심동체와도 같은 대상이 된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이런 오랑캐꽃의 운명이 상징하는 슬픔의 정조를 방치(?)하기에 이른다. 보호막의 역할을 하고 있는 시적 화자 자신이 어느 덧 오랑캐꽃이라는 대상으로 전이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오랑캐꽃의 울음은 시적 화자 자신의 울음이 된다.
이처럼 대상에 감정을 이입하는 수법은 탈락된 시적 화자가 꽃과 같은 대상으로 환치되는 서정적인 시의 일반 원리이다. 이때 꽃은 대상이자 서정적 주체가 된다. 즉 시적 화자, 대상, 서정적 자아가 하나로 일치되어 인식되는 것이다. 대상을 통하여 시적 화자가 형상화하려는 정조는 슬픔이고, 화자가 형상화한 대상의 운명은 비극적이다. 이런 대상과 똑같이 시적 화자도 슬프고, 비극적인 운명에 처해 있다. 서정적 주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런 형태의 시에서는 시적 화자가 이야기하는 대상은 일반화된 청자(독자)로 설정되게 된다. 외견상 꽃에게 이야기하는 듯도 하지만, 실제로는 구체화된 청자는 설정되어 있지 못하다.
시인이 이런 정황을 노래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오랑캐의 비극이나 이것과 관련된 오랑캐꽃의 비극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진족과 오랑캐꽃을 통하여 시적 화자가 유추하려는 바는 결국 자신의 운명이다. 세월도 흐르고 상황은 변했지만, 강건너로 쫓겨서 가랑잎처럼 굴러갔던 여진족과 같은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운명은 일제에 의하여 강점되어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의 운명이다. 이런 시적 형상을 이 시는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2) 시적 화자의 직접 서술 -- [기관구에서]
해방 직후 정치적인 목적시이자 행사시의 하나로, 이 시기 이용악의 시적 형상화의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기관구에서]는 [오랑캐꽃]과는 다른 시적 화자의 모습을 보인다. 즉 1946년에 있었던 9월 총파업 당시에 용산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을 격려하고 있는 이 시는, 당시 그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 이념이나 사회적 안목을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대표적인 시의 하나이다. 구체적인 작품을 통하여 이 시에 나타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을 살펴보자.
-- 남조선 철도파업단에 드리는 노래
핏발이 섰다 집마다 집웅 위 저리 산마다 산머리 위에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의 핏발이 섰다
누구를 위한 철도냐 누구를 위해 동트는 새벽이었나 멈춰라 어둠을 뚫고 불을 뿜으며 달려온 우리의 기관차 이제 또한 우리를 좀먹는 놈들의 창고와 창고 사이에만 늘어놓은 철ㅅ길이라면 차라리 우리의 가슴에 안해와 어린것들 가슴팍에 무거운 바퀴를 굴리자
피로써 물으리라 우리의 것을 우리에게 돌리라고 요구했을 뿐이다 생명의 마지막 끄나푸리를 요구했을 뿐이다
그러나 아느냐 동포여 우리에게 총뿌리를 겨누고 다가서는 틀림없는 동포여 자욱마다 절렁거리는 사슬에서 너희들까지도 완전히 풀어놓고저 인민의 앞재비 젊은 전사들은 원수와 함께 나란히 선 너희들 앞에 일어섰거니
강철이다 쓰러진 어느 동무의 소리가 바람결에 들릴지라도 귀를 모아 천길 일어설 강철 기둥이다.
며칠째이냐 농성한 기관구 테두리를 지키고 선 전사들이여 불꺼진 기관차를 끼고 옳소 옳소 외치며 박수하는 똑같이 기름 배인 검은 손들이여 교대시간이 오면 두 눈 부릅뜨고 일선으로 나아갈 전사 함마며 피켓을 탄탄히 쥔 채 철ㅅ길을 베고 곤히 잠든 동무들이여
핏발이 섰다 집마다 집웅 위 저리 산마다 산머리 위에 억울한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승리를 약속하는 핏발이 섰다
이 시에는 '우리'라는 시적 화자가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 시적 화자에 의하여 철도 파업의 정황이 서술되고 있으며, 이 사건에 대한 '우리'의 감정과 사상도 직접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의 시를 논하는 자리에서 설명한 바 있는 사건시의 면모를 보이는 이 시는, 이런 측면에서 바람직한 리얼리즘시의 성취와는 거리가 있다. 왜냐하면 시인이 사건을 서술하더라도 객관화시켜서 보여줌으로써 독자의 감흥을 일으키는 시적 장치보다는, 시적 화자의 직접적인 가치 판단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의 경과에 대한 서술을 통해 객관적인 평가를 유도하기보다는, 이에 대한 주관적인 가치 평가가 직접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외견상 사건의 전개나 사건의 정황을 서술하고 있는 듯하지만, 결국 이 시가 노리는 바는 '우리'의 사건에 대한 관점이다. 그것은 우리의 사상이자 감정이며, 궁극적으로는 서정적 주체의 사상이고 감정이다. 나아가서는 시인 자신의 사상과 감정이다. 이 시에는 다만 시인의 감정, 시적 화자의 감정만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며칠 동안 기관차를 세우고 철길을 베고 자는 모습이나 교대 시간에 함마와 피켓을 쥐고 나가는 전사들의 모습은 객관적인 사건의 제시가 아니라, 자신들의 결의가 굳세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시적 화자가 동원하고 있는 삽화일 뿐이다.
결국 시적 화자가 서술하고 있는 것은 우리를 좀먹는 자들에 대한 응징이다. 이런 시적 화자의 결의는 제 2연에 설명적으로 나타나 있다. 비록 그것이 파업으로 인하여 생계가 막연한 아내와 어린 것, 즉 가족의 가슴에 무거운 바퀴를 굴리는 것과 같은 고통을 주는 것일지라도, 물릴 수 없는 것이자 피의 대가로 요구하는 마지막 생존권에의 외침이다. 또 제 4연에도 '우리'의 목표가 직접 서술되고 있다. 그것은 원수의 앞잡이가 되어 자신들의 발목에 사슬이 매여 있는 줄도 모르는 또다른 동포(여기서는 미군정과 경찰을 도와 이 파업을 진압했던 김두한을 비롯하여 폭력배를 지칭하는 듯함)들을 해방시키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라고 서술된 시적 화자는 승리를 약속하는 핏발을 세우고, 파업 현장에 동참하고 있다.
이때 '우리'는 시적 화자이자 서정적 주체이다. 또 우리 자신들이 대상으로 서술되고 있는 사건의 담당자이자 주인공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객관적인 사건이나 이야기를 서술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시적 화자 자신이 이미 시의 주체로 또 사건의 주체로 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시인 이용악이 이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시의 문면에 나타난 바로는 시인 자신이 시적 화자이자 서정적 주체로 적극 가담하고 있다. 이럴 때 시적 화자가 대상이 되는 사건을 동원하여, 설득하려는 상대도 일반적인 청자에 머물지 않는다. 비록 불특정 다수이기는 하지만 시적 화자와 같이 파업에 참여한 자신의 동료를 상대로 하고 있다.
이처럼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직접적인 자기 감정과 사상을 서술하여, 설득하려는 설득 화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자신이 사건의 주인공, 시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또 시적 화자가 참여한 사건 즉 시적 대상은 객관화되지 못하고 시적 화자의 주관적인 사상을 반영하는 데에 머물고 마는 것이다.
3) 내재된 대화 -- [전라도 가시내]
위에서 살핀 두 편의 시와는 다른 면모를 보이는 서정시를 이용악의 다른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주관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서정시 일반과는 다르게 하나의 이야기를 내재한 시가 있다. 그 예로 우선 여기서는 [전라도 가시내]를 들고자 한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이 작품은 일제 말기의 암흑기에 해당하는 1940년에 쓰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의 일반적인 상황인 암울함이나 비관적인 정서와는 다른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를 위하여 '나' 또는 '너'로 표현된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으며, 대화를 통하여 시의 내용을 서술하는 형태를 보인다. 이제 작품을 통하여 시적 화자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보자.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골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드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히 잠거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두 외로워서 슬퍼서 초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싹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께
손때 수집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이 시에 등장하는 인물은 '나'로 서술되는 함경도 사내와 '너'로 서술되고 있는 전라도 가시내다. 표면적으로 이 시를 이끌어가는 시적 화자는 '나'인 함경도 사내다. 그러나 '너'로 표현된 전라도 가시내도 대화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인다. 이들은 서로 대화를 통하여 자신들의 이력(履歷)을 주고받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이력의 서술이 시의 주된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즉 시적 화자가 대화의 상대자를 설정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이 이야기가 객관적인 대상으로 전이되어 전달되는 '이야기시'의 구조를 지닌다. 달리 말하면 시적 화자가 서술한 서술적인 구조가 시의 내용이 되고 있는 형태로, 일반적인 서정시의 감정 서술과는 일정하게 구분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 시적 화자가 서술한 이야기는 시의 내용을 이룬다. 여기서 먼저 시의 내용이자 대상이 되고 있는 시적 화자인 함경도 사내의 이야기를 재구하여 보자. 이 사나이는 함경도에서 살다가 어느 추운 겨울날 철교를 건너서 북간도로 건너 왔다. 그리고 모종의 중요한 일에 가담하여 일을 수행하다가 전라도에서 팔려온(?) 가시내가 있는 술막에 하룻밤을 묶게 되었다. 이 사나이는 술을 청해 놓고, 전라도 가시내의 기막힌 내력과 고국의 소식을 전해 듣고자 한다. 그런데 이 사나이는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호(胡)개나 북간도의 눈보라, 추위, 바람은 무섭지 않지만, 이웃이 미덥지 못하고 두터운 벽도 두려운 사람이다. 자신을 노리는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다는 표현들에서 이런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런 사내이기 때문에 날이 밝으면, 이 사내는 노래도 자욱도 없이 즉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야 하는 사람이다.
또 함경도 사내와 마주하고 있는 전라도 가시내의 이야기를 재구하여 보자. 이 가시내는 전라도 어느 해변가의 마을에서 살았던 여인이다. 그래서 얼굴이 까무스레하고, 눈은 자신의 고향인 바다를 동경하여 푸르게까지 보인다. 그러나 지금부터 석 달 전인 늦은 가을(지금은 추운 겨울이기에)에 이틀 낮과 밤을 꼬박 새워 기차를 타고 북간도의 술집으로 팔려 왔다. 이 여인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팔려 오는 기찻간에서 내내 울 수밖에 없었다. 조국의 삼천리 강산을 물들였던 단풍의 아름다움일랑은 보지도 못하고 말이다. 그렇게 팔려 와서 어느 날 함경도 사내와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그 사내가 술을 마주 놓고는 자신의 쓰라린 과거와 고향 소식을 묻고 있다. 그러다가 함경도 사내는 가끔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여 이 여인 애수에 젖게 한다. 분홍 댕기 날리면서 뛰어 놀던 고향의 봄을 그리게 한다. 그런 분위기 탓에 여인은 고향에 돌아간 듯한 애상(哀想)에 젖기도 한다. 그러다가 한갓 부질없는 이런 감상에서 깨어나 싸늘한 웃음만을 떠올린다.
이런 이력들을 가진 두 인물은 이 시에서는 하나는 시적 화자의 역할을 하고, 다른 하나는 시적 화자의 이야기 상대자 역할을 한다. 즉 함경도 사내는 화자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전라도 가시내는 구체화된 청자의 자리에 놓여 있다. 서사적인 측면에서는 이 두 인물이 서사의 주인공이 되어, 자신들의 과거를 회상하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들이 확연하게 구별되는 역할을 하는 개별자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느덧 '너'와 '나'는 '우리'가 되고 있다. 즉 각기 화자와 청자로 존재하던 인물들은 서정적 주체일 뿐이다. 일시적으로 서술의 주도자인 시적 화자와 마주 앉은 이야기 상대로서의 청자로 등장했다가는, 곧바로 그 자신 스스로가 시적 화자의 역할을 하는 인물로 바뀌고 있다.
이런 서정적 주체로 나타난 이들의 공통적인 정서는 외로움과 슬픔이다. 그래서 두루미처럼 울어서 눈이 퉁퉁 불 수 있는 것이다. 여인도 사내도 지금은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갈 수 없는 운명이다. '나'는 날이 밝으면 길을 떠날 수밖에 없으며, '너'도 추억이나 꿈 속에서나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다. 확대하여 해석하면 운명 공동체인 것이다. 그러나 사내는 여인을 위하여 '때아닌 봄'을 불러주어 여인을 감상에 젖게 만들고 있다. 이 시의 주조를 이루는 이런 슬픔과 외로움의 정서도 어쩌면 일시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얼음길이 밝으면' 다시 자신들의 갈 길을 가야만 하는 똑같은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4) 관찰자가 된 시적 화자 -- [낡은 집]
이용악의 시 중에서 리얼리즘을 언급하면서 가장 많이 논의되었던 작품은 [낡은 집]이다. 그 이유는 이 시가 서사적인 구조를 지닌 이야기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이를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하여 다층적인 화자층을 동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동안의 논의들을 살펴보면, 이 시가 당시 우리 민족의 삶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에도 특별히 주목하고 있다. 제 2시집 {낡은 집}의 표제작이기도 했던 이 작품은 이와 같은 여러 측면에서 주목을 받았다. 이제 작품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시적 화자의 존재 양상과 그 의미를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보자.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래
오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모도 모른다
찻길이 뇌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세째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그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지주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고양이 울어 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쫒아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데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욱만이 눈 우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총 8연으로 된 이 시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에서 '싸리말 동무'의 탄생에서 이향(離鄕)까지를 서술하고 있는 중간의 3~7연이 시의 주된 내용이다. 그리고 앞의 1, 2연과 뒤의 8연에는 시적 화자가 서술하고 있는 '낡은 집'이라는 시적 대상에 대한 묘사와 여기서 유발되는 정서를 표출하고 있다. 즉 1, 2연과 8연은 3~7연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털보네 가족사라는 서사를 감싸고 있는 액자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런 구성이나 시가 시가 서술하고 있는 내용의 전형성은 본고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아니다. 본고는 이런 구성에 따라 시적 화자의 목소리와 이 시에서 형상화되고 있는 시적 대상의 차이를 밝히려는 데에 주된 목적이 있다.
먼저 서사물의 액자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시적 화자가 구체화되어 있지 못하다. 즉 탈락된 또는 은폐화된 시적 화자를 주로 구사하는 일반적인 서정시와 같은 구조를 띄고 있다. 시적 화자는 '낡은 집'에서 폐허가 되어 가는 우리 농촌의 모습을 서술하고 있다. 이 당시의 많은 시들이 보여주는 고향 상실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낡은 집'이라는 시적 대상에서 상실감과 상실되기 이전의 정황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여기서 시적 화자는 이런 정서를 느끼고 표현하는 서정적 주체로 나타난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시인 이용악과는 일정하게 구별된다. 왜냐하면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시의 다른 부분에서 추정이 가능하고, 그것에 의하면 그 이질성이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즉 본 이야기가 되는 서사에서 유추하면, 시적 화자는 '나'로 설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적 화자인 '나'는 아홉살 먹은 털보의 셋째 아들의 친구인 나이 어린 소년이다. 이에 비하여 이 시의 주된 내용이 되는 서사 부분인 3~7연의 시적 화자는 구체화되어 표면에 나타난다. '나'로 얼굴을 내민 시적 화자는 털보네 가족사를 탄생에서 성장, 이향의 시간적 순서로 서술하고 있다. 이때 시적 화자는 시의 액자 부분에서 보였던 방식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즉 액자 부분에서는 정서의 표출이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현실의 모습과 변화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만을 보여준다. 소설에서 객관적인 관찰자의 시점처럼, 시적 화자는 서사적인 구조를 가진 이야기를 서술하는 데 머물고 있다. 그리고 이 시에서는 시적 화자와 서정적 주체가 분명하게 구별되어, 시적 화자가 진술하는 내용을 객관화시키고 있다. 이때 주체는 '나'라는 구체적인 인물에 국한되지 않고 일반화되어 있다.
또 이 시에는 시적 화자의 친구이자 이야기의 주인공이 등장하고 있다. 이 주인공은 구체화된 인물로 형상화되고 있다. 즉 털보네 셋째 아들이자, 싸리말이라는 동네에 살고 있는 나의 친구이다. 이 시에는 이 주인공 외에도 또다른 주변 인물들이 다수 등장한다. 예를 들면 시적 화자, 털보, 털보 아내, 마을 아낙들, 이웃 늙은이들은 주인공의 삶이나 운명을 옆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서 드러나는 객관화된 상황들은 더욱 실감나게 전해진다. 예를 들면 인용으로 되어 있는 아낙네들의 무심코 던진 '차그운 이야기' 그리고 늙은이들의 털보네 행방에 대한 추측들은 이 이야기를 더욱 객관화시키고 있다. 더구나 아들을 낳은 기쁨보다는 또다른 시름을 표출한 털보의 모습과 그들의 가난한 삶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는 어미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 당시 민중들의 삶을 객관적으로 유추하게 된다.
이 부분에서 이런 이야기들은 시적 대상이 되고 있다. 즉 자신의 친구의 일화와 삶의 궤적이 시적 형상화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구체화된 청자가 아닌 일반화된 청자들에게 들려진다. 시인은 단지 정황의 정서를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를 수용하여 정서적 동일화를 추구한다. 어떻든지 서정시의 본질은 이런 정서의 감흥(感興)에 있다. 청자의 측면에서 보면, 직접적으로 표현된 정서 아니면 대상(사물이건 인물이건)에 이입된 정서, 객관화된 이야기가 전달하는 정서와 동일화를 추구한다. 이런 현상은 그 창작의 측면이나 존재의 측면에도 적용된다. 이런 측면에서 이 시는 시적 화자의 층위가 다른 만큼 서정시에 접근하는 길도 다양하다.
4. 서정시와 리얼리즘
지금까지 본고는 이용악의 대표적인 시작품 4편을 시적 화자라는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이런 논의의 전제는 서정시의 시적 화자가 주관적이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처럼 다양한 시적 화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리얼리즘을 성취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이다. 시 다시 말해서 서정시를 전통적인 서정시의 개념 규정에 얽매여 지나치게 한정할 필요는 없다. 물론 감정 표현이 서정시라는 데에는 필자도 동의를 한다. 그러나 이런 감정의 표현 양상은 다를 수 있다. 넓은 의미의 서정시라고 해서 서사시나 극시를 모두 포괄할 수는 없지만, 서사적인 요소나 극적인 요소가 시적 형상화에 개입할 수는 있다.
이런 측면에서 서술적인 구조를 지니는 서술시(단편 서사시)를 서정시의 다양한 범주 속에서 논의할 것을 우선 제안한다. 이야기를 동원하건, 사건을 동원하건, 사물을 동원하건 아니면 직접적으로 감정이나 사상을 표현하건 간에, 이들은 서정시의 형상화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즉 시적 대상이 다를 뿐이다. 이 각기 다른 시적 대상은 어떤 형태든지 시적 화자의 목소리에 의하여 표현된다. 때로는 은폐되고, 때로는 관찰자와 같은 서술자로 나타나고, 어떤 때에는 시적 주체가 되어 시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주인공, 등장 인물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서정시에 등장하는 시적 화자가 곧 리얼리즘의 성취를 보장한다는 말은 아니다. 앞에 든 이용악의 시를 예로 들더라도 [오랑캐꽃]과 [기관구에서]는 시적 화자라는 시의 자질이 리얼리즘의 열쇠는 아니다. 이 시들은 시가 표현하려는 내용, 정서 또는 사상이 문제가 된다. 다만 시적 화자는 다른 내포를 지니는 시적 리얼리즘 성취에 부분적으로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전라도 가시내]나 [낡은 집]의 경우에는 사뭇 다르다. 이 시들에서 시적 화자는 하나의 사건이나 이야기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이를 객관화시키는 역할도 한다. 비교적 서술 구조를 지닌 이야기가 시적 대상을 객관화시키듯이, 시적 화자도 이야기를 객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 이처럼 객관화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목소리를 가진 인물 형상들을 시에 동원한다. 시인으로, 주체로, 화자로, 때로는 청자로, 때로는 등장 인물로 말이다.
시에서의 리얼리즘 성취가 모든 시의 목표는 아니다.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리얼리즘은 현실 인식이라는 문제와 연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문제를 다루지 않은 시를 리얼리즘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달리 말하면 현실을 반영하지 않은 작품을 리얼리즘이 성취된 시라고 할 수는 없다.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접근하면, 좋은 시 또는 형상성이 뛰어난 시 모두를 리얼리즘시로 정리하는 것은 리얼리즘의 횡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서정시들 중에서 좋은 서정시들은 어떤 방식에 의하든 현실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즉 일정하게 리얼리즘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글을 정리하는 자리에 온 것 같다. 글을 정리하면서, 리얼리즘시에 대한 필자의 탐구 작업이 진행된 만큼 필자 자신이 주관적인 오류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앞으로 다른 연구자들에 의하여 이런 문제점들이 바르게 고쳐져서, 우리 리얼리즘시 연구에 올바른 길을 제공할 수 있기를 빈다. 그리고 이런 계기들을 통하여 필자가 저지른 잘못도 수정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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