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삼

掌篇

공산(空山) 2015. 12. 24. 21:25

   掌篇

   김종삼

 

 

   작년 1월 7일

   나는 형 종문이가 위독하다는 전달을 받았다

   추운 새벽이었다

   골목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허술한 차림의 사람이 다가왔다

   한미병원을 찾는다고 했다

   그 병원에서 두 딸아이가 죽었다고 했다

   부여에서 왔다고 한다

   연탄가스 중독이라고 한다

   나이는 스물둘, 열아홉

   함께 가며 주고받은 몇 마디였다

   시체실 불이 켜져 있었다

   관리실에서 성명들을 확인하였다

   어서 들어가보라고 한즉

   조금 있다가 본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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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우 드라이한 시이다. 형 종문에 대한 병문안을 가다가 추운 새벽 골목길에서 만난 허술한 차림의 사람을 만나 병원까지 가다가 들은 이야기를 시적 주체의 그 어떠한 반응도 생략한 채 간략하게 기록했을 뿐인 시이다. 그러나 그 시적 내용은 천둥벼락이라도 쳐서 무너져 내릴 듯한 것이다. 꽃다운 나이에 공장에 다니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은 두 딸을 찾아가는 아버지의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할 것인가. 그 내용의 참담함을 시적 주체가 아무리 긴절한 언어로 표현한다 해도 미치지 못할 것임을 시인은 잘 알기에 오히려 간략한 사실기록 형식을 취했을 것이다. 더구나 끝의 두 행, 곧 “어서 들어가보라고 한즉/ 조금 있다가 본다고 하였다”라는 함축적인 표현을 통해 그 아비의 끝없이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어쩌면 이 시는 바로 위 두 행 때문에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 시도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상의 체험을 시로 옮긴 것인데 바로 시의 끝 두 행의 예리한 발견을 통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사실 발견적 상상력은 소재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다. 한편의 문학작품을 읽을 때 독자들은 일정한 前理解을 갖게 마련이다. 전이해는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전이해란 일종의 선입견으로, 동시대의 삶의 상황과, 시와 시인에 대한 기대 그리고 언어지식, 자신의 인생관 등등이 얼크러져 있는 인식의 배경이다. 한편의 시를 읽을 때 그 시에 대한 전이해가 중요한 해석의 수단이 된다. 그러나 전이해가 그대로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작품 속의 구체적 사실들의 의미를 전이해를 통하여 해명하지만, 그 부분들은 다시 이해의 틀을 수정한다. 즉, 전체의 의미는 부분들의 의미를 밝혀주지만 그 부분들의 의미는 다시 전체의 의미를 변환시킨다. 그러므로 독자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전이해에 아무런 변화를 요구할 수 없는 시는 새로움이 없는 시다. - 고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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