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운시(Blank Verse)
기 혁
말기의 암환자는
자신의 병이 운이라고 했다.
아이를 업은 아내도, 수차례 수술을 집도한 주치의도
운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운과 위장운
그리고 얼마간의
간운.
오장육부에 퍼진 운들이 깨어날수록
운명도 이름을 달리했지만,
때로는 운명의 이름들 사이에
낭만이라는 뜻이 섞이기도 했을 것이다.
두운과
요운과
각운을 맞춰온 일생처럼,
온몸의 운율로 써내려간
정형의 행간.
죽음은 어떤 염문에도 규칙을 어기지 않는다 했다.
능숙한 수사로 상처를 꿰맨 자리에
무의식 깊은 곳까지 방사선을 쬐어야 했던 비문이
완치되지 않는 은유로 전이된다.
환영은 정말 블랭크에만 숨어드는 것일까?
운이 있어 사랑을 하고
운이 있어 몸부림쳤으나
말기의 암을 키워낸 것은 타인의 리듬들.
링거 병에 비춰진 낙원을 본 것처럼
백지의 고요가 불타오른다.
—《시사사》2014.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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