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이스파한 - 정 선

공산(空山) 2024. 5. 19. 21:29

   이스파한

   정 선

 

 

   즐거운 오후가 벌레 먹은 장미 같다

   구멍 뚫린 꽃잎들이 다리 사이로 빨갛게 떠내려간다

 

                    *

 

   술보다 한 잔의 장미수 몇 모금의 시샤 다섯 번의 푸른 아잔 소리 연지벌레 카펫 몇 장과 베틀 몇 줄의 시와 하페즈 그리고 이름 그대로 세상의 절반이라는 이스파한

   너

 

   이스파한 골목에서 이스파한을 잃었다

   가슴속은 두억시니였다

   이스파한을 떠올리면 냉동실 냄새와 함께

   검은 눈동자가 서리태로 쏟아졌다

 

   이스파한은 질리지 않는 새벽 강

   이스파한은 온종일 지루하지 않은 광장

 

   사막 속으로 떠난 이스파한은

   모스크도 카주 다리도 자얀데 강의 노을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맘광장에는 신기루가 없고 사막 속에는 새로운 애인이 솟아났다

   카주 다리 아래 불빛이 켜지자 연인들이 강물에 발을 담갔고

   나는 긴 히잡을 늘어뜨린 채 바르바트를 퉁겼다

   모스크에서 흘러나온 아잔 소리가 노래를 따라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내가 좋아했던 이스파한은 첫 기차를 타고 도착한 니스의 새벽 공기 같았지

   생폴 카페에서 풍겨 나오는 갓 구운 빵 같았지

   이스파한의 골목에 나를 내려놓고 돌아섰을 때 눈물이 파랬다

   언제 다시 이스파한에 입 맞추고 만질 수 있을지

   차가운 타일에 얼굴을 부볐다

   둥근 모스크에 고개를 파묻던 그 밤

   속이 부대끼는 듯 낙타가 긴 울음을 울었다

 

   내가 아는 이스파한은 자얀데 강이 말랐을 때 함께 부르짖음으로 물길을 되찾았었지

   부르짖음이 마를 때까지

   이스파한을 다 걸으면 이스파한을 알 수 있을까

   나는 이스파한을 사랑한 게 아니라

   짙은 눈썹이 좋았고 바르바트의 낮은 울림이 좋았고 떠돌았던 그의 이국의 향기를 좇았던 거다라고

   이스파한은 과거가 아름다운 사람이다라고

 

                       *

 

   낭창한 여인의 허리다 젖과 꿀이 넘쳐나는 유방이다 잠들고 싶은 아늑한 사타구니다 구레나룻의 누린내다 비열한 콧수염이다 피로 물든 샴시르다 흔들리는 아잔 소리다 욕망의 누런 찌꺼기다

   그칠 수 없는 휘황한 바람이다 이스파한,

 

   이라고 부르면 검은 구름 속에 무지개가 꽃핀다

   까닭 없는 홀림이었다

   세상의 절반이 들어왔다가

   세상의 절반이 빠져나간 몸또한 이스파한

 

   깊숙이 돌아나온 한숨이다

   빛바래지 않을 회한이다

   이스파한을 지우는 일은 나를 버리는 일

 

   왼발을 들고서 갈까 말까 망설이는 강아지와

   말더듬이를 앓는 노을

   침을 꿀렁 삼키는 강물을 휘돌아

   숨은 이야기들이 풍성해지는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시트러스 향의 물담배가 수줍게 끓고 있는 밤

   양갈비가 지글거리는 소리와 유목의 마른 냄새가 교차하는 밤

   그렇게 홀림과 끌림이 공존하는 요염한 밤

   낙타의 울음을 타고 맨 먼저 달려오는 이가 이스파한이라도

   잠시 한눈을 팔아도 좋겠다

 

   떠난 것들을 그리워하는 데 한 계절을 낭비했다면

   내 곁을 지킨 것들을 사랑하는 데 몇 계절을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

 

                     *

 

   오월의 귓불을 건드리니

   향기로운 고백도 없이 넝쿨장미가 피어난다

 

 

   —《상상인》 2022년 하반기통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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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 / 2006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안부를 묻는 밤이 있었다』 외. 포토시집 『마추픽추에서 띄우는 엽서』. 에세이집 『내 몸속에는 서랍이 달그락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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