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우리 동네 구자명 씨 - 고정희

공산(空山) 2024. 5. 14. 22:02

   우리 동네 구자명 씨
   고정희(高靜熙, 1948~1991)
 
 
   맞벌이 부부 우리 동네 구자명 씨
   일곱 달 된 아기 엄마 구자명 씨는
   출근 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앞으로 꾸벅꾸벅 존다.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 씨,
   그래 저 십 분은
   간밤 아기에게 젖 물린 시간이고
   또 저 십 분은
   간밤 시어머니 약시중 든 시간이고
   그래그래 저 십 분은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일 거야.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 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
   그러나 부엌문이 여닫기는 지붕마다
   여자가 받쳐 든 한 식구의 안식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의 잠을 향하여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
 
 
   ―『지리산의 봄』 문학과지성사,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