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 신경림

공산(空山) 2023. 12. 28. 21:32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신경림

 

 

   어려서 나는 램프 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 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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