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완행열차 - 허영자

공산(空山) 2024. 1. 3. 19:55

   완행열차

   허영자(1938~ )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기타를 치는 집시의 노래』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