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섶섬이 보이는 방 - 나희덕

공산(空山) 2023. 12. 28. 15:33

   섶섬이 보이는 방

                    이중섭의 방에 와서

​   나희덕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질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질을 그릇 삼아 상을 차리는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   꿈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 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데기에 세 든 소라게처럼

 

   * 화가 이중섭과 그의 아내가 서로를 부르던 애칭.

   ―​『야생사과(창비, 2009)

 

이중섭「게와 물고기가 있는 가족」(은박지에 유채, 8.5 × 1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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