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물의 출구 - 나희덕

공산(空山) 2023. 12. 25. 10:32

   물의 출구

   나희덕

 

 

   그 물을 기억한다

 

   먼지와 거품을 끌고 가던 물,

   시든 물풀을 누더기처럼 걸치고

   엉금엉금 기어가던 물,

   더 이상 흐른다고 말할 수 없던 물,

   비가 와도 젖지 않고

   땀과 눈물과 오줌에만 젖어들던 물,

   쾌활했던 물줄기 잦아들고

   자기도 모르는 고요에 갇혀 있던 물,

   숨 막히는 그 고요야말로 소용돌이였음을

   너무 늦게야 알게 된 물,

   하루하루 진창에 가까워져도

   물만물만남아 있으면 된다고 믿었던 물,

   검은 눈동자처럼 타들어가던 물

 

   검은 눈동자 속에

   지는 해가 가득 들어와 있다

 

   활활 타오르는

   불의 우물

 

   저 물의 출구를 따라 여기로 흘러왔다

 

 

   — 『야생사과』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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