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출구
나희덕
그 물을 기억한다
먼지와 거품을 끌고 가던 물,
시든 물풀을 누더기처럼 걸치고
엉금엉금 기어가던 물,
더 이상 흐른다고 말할 수 없던 물,
비가 와도 젖지 않고
땀과 눈물과 오줌에만 젖어들던 물,
쾌활했던 물줄기 잦아들고
자기도 모르는 고요에 갇혀 있던 물,
숨 막히는 그 고요야말로 소용돌이였음을
너무 늦게야 알게 된 물,
하루하루 진창에 가까워져도
물만, 물만, 남아 있으면 된다고 믿었던 물,
검은 눈동자처럼 타들어가던 물
검은 눈동자 속에
지는 해가 가득 들어와 있다
활활 타오르는
불의 우물
저 물의 출구를 따라 여기로 흘러왔다
— 『야생사과』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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