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저녁 한때 - 임길택

공산(空山) 2023. 1. 3. 09:52

   저녁 한때

   임길택(1952~1997)

 

 

   뒤뜰 어둠 속에
   나뭇짐을 부려놓고
   아버지가 돌아오셨을 때
   어머니는 무 한 쪽을 예쁘게 깎아 내셨다.

   말할 힘조차 없는지
   무쪽을 받아든 채
   아궁이 앞에 털썩 주저앉으시는데
   환히 드러난 아버지 이마에
   흘러 난 진땀 마르지 않고 있었다.

   어두워진 산길에서
   후들거리는 발끝걸음으로
   어둠길 가늠하셨겠지.

 

   불타는 소리
   물 끓는 소리
   다시 이어지는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
   그 모든 소리들 한데 어울려
   아버지를 감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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