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여행길이라

제주도 자전거 여행

공산(空山) 2022. 10. 18. 16:24

지난 10일 오후에 옛 직장 친구 2명과 함께 3박4일간의 제주도 자전거 여행 일정을 시작했다. 코로나 펜데믹이 시작된 이래 가장 멀고 긴 여행이다. 먼저 3대의 접이식 자전거를 동대구터미널에서 15시 40분에 출발하는 목포행 고속버스에 싣고 4시간을 달려 목포 터미널에 도착했다. 목포터미널에서 자전거를 타고 목포항 국제여객터미널까지 6km를 이동한 후 부근에서 저녁을 먹었다. 우리가 탈 배는 11일 새벽 1시에 출발하는 '퀸제누비아'호였는데, 22시부터 승선이 시작되었다. 자전거는 짐칸에 싣지 않고 접어서 들고 배에 탄 후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로비의 한쪽 계단밑에 가지런히 두게 되었는데, 그것은 접이식 자전거가 누리는 특권인 셈이었다.

내가 제주도에 비행기가 아닌 배를 타고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그렇게 큰 배를 타본 것도 처음이었다. 예전에 울릉도나 홍도에 갈 적에 탄 배와는 크기가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객실들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난 복도의 끝이 가물가물했다. 이 배의 총톤수는 27,391톤, 여객정원 1,284명, 총길이 170m, 진수년도는 2020년이라고 한다. 퀸제누비아의 이코노미 객실의 정원은 13명이었고, 객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일찌감치 객실 천장의 등을 끄고 다음날의 라이딩을 위해 카펫 바닥에 가방을 베고 누워 잠을 청했다. 워낙 큰 배이다 보니 흔들림이 거의 없었지만, 새벽의 한바다 구간에선 조금 흔들리는 듯도 했다.
 

제주도행 배는 국제여객터미널에서 탄다.
퀸제누비아호 로비의 계단 밑 보호 테이프 아래 누워 있는 자전거
퀸제누비아 내부의 매점과 객실 복도

 
5시간의 항해 끝에 배는 제주항에 도착하였고, 아침 6시에 우리는 배에서 내렸다. 제주도의 자전거길은 보도나 자동차도로 가에 그려진 파란 선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자전거를 타고 곧장 용두암으로 갔으나 인증센터를 찾지 못하였다. 제주도 환상(環狀,幻想?) 자전거길을 반시계 방향으로 돌 때 두번째 인증센터인 다락쉼터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다시 1km쯤 달리다가 우리는 아침을 먹을 식당으로 들어갔다. '애월읍 고내리'에 있는 순두부 전문 식당이었는데, 바지락과 꽃게와 달걀이 들어간 순두부찌개는 싸면서도 맛이 있었다.
 

제주환상자전거길 인증센터(이미지 출처: BIKETRIP)

용두암에 도착했으나 인증센터는 찾지 못했다.
파도가 거세다. 저 바람을 안고 자전거를 타야 한다.
고내리에서 먹은 아침. 해물순두부와 돌솥밥이 9천원짜리였는데 맛이 좋았다.

 
인증센터만을 향해 줄달음치는 두 친구를 앞세우고 먼눈을 팔며 뒤따라가던 나는 사진을 한 장 찍다가 친구들이 '해거름마을공원 인증센터' 쪽 길로 들어간 줄도 모르고 그만 지나쳐 버렸다. 도중에 기다리다가 길이 엇갈리면 낭패를 볼 것 같아 35km 떨어진 송악산 인증센터에서 만나기로 전화 약속을 하고 나는 혼자 자전거를 탔다. 그 바람에 조금 느긋해져서 언덕 너머로 멀리 보이는 산방산과 한라산을 배경으로 제주도의 농촌 풍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비닐 멀칭을 한 넓은 밭에 아낙들이 줄지어 앉아 무언가를 심고 있었고, 봄감자만 알던 내겐 지금 꽃을 활짝 피운 가을감자 밭이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제서야 무와 양배추와 비트 등을 모종한 밭이 많았는데, 그건 이곳의 농부들이 곧 다가올 겨울의 온화함을 그만큼 믿는다는 의미이리라.
 

야생 선인장(백년초) 군락. 이 사진을 찍다가 앞서가던 일행을 놓쳤다.

가을에 모종한 비트, 무, 양배추 밭들이 많았다.
산방산과 한라산을 배경으로 한 농촌 풍경
꽃이 피기 시작하는 감자밭과 억새가 대조적이다(봄과 가을이 공존하는 느낌).
콩은 제철에 익었다.
사람이 다가가도 풀 뜯기에 여념이 없는 말

 
송악산 인증센터에 도착했을 때는 12시경이었고, 거리계는 72km를 나타내고 있었다. 조금 기다려 두 친구와 합류했다. 그 후 산방산을 왼쪽으로 돌아가는 구간이 가장 가파른 길이었다. 우리는 16시 50분에 서귀포시의 앞바닷가에 있는 법환바당 인증센터에 도착했다. 제주항에서부터 시작하여 용두암, 다락쉼터, 해거름마을공원, 송악산 인증센터를 거쳐 법환바당 인증센터까지 110km 정도를 타고 나서 첫날 일정은 마무리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모슬포에선 노면에 그어진 파란 선을 찾지 못해 잠시 헤매었고, 중문관광단지에서도 길을 잃었는데, 이참에 우리는 카페에 들러 차를 마시며 길을 물었다.
 

송악산 인증센터를 지나 법환바당으로 가는 길
키가 작은 내가 맨 앞에 서고 두 친구가 키 순으로 서서 사진이 잘 나왔다 ㅋㅋㅋ
제주도에 와서 귤밭을 그냥 지나치면 안 되지.
한라산이 보이는 법환포구 전경

 
법환포구의 '가온누리'라는 게스트하우스에 여장을 풀고, 밖으로 나와 저녁 먹을 곳을 찾았으나 평일이라 그런지 문을 연 식당이 많지 않았다. 결국은 구이집에서 연탄불에 구운 돼지고기로 저녁을 먹었다. 우리가 묵은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은 젊고 상냥한 아주머니였다. 방에는 이층침대가 세 개 놓여 있었는데, 3인1실의 숙박료는 7만원이었다(참고로, 2인1실은 5만원, 1인1실은 4만원이라고 한다). 화장실 겸 샤워룸엔 충분한 타올이 비치되어 있었으며, 주방엔 이른 아침에 우리가 먹고 떠날 식빵이 토스터와 잼과 티백과 함께 준비되어 있었다.

둘째 날은 아침 6시경에 기상하여 게스트하우스에서 잼을 바른 식빵과 커피나 녹차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6시 40분에 출발하였다. 법환바당의 일출이 장관이었다. 마을 안의 공터에서 한 필의 백마를 만났는데, 나의 애마인 자전거와 그 백마를 한 프레임에 담아 사진을 찍었다. 표선해변을 지날 때는 남쪽 바닷가에서만 자생한다는 노랑무궁화 '황근(黃槿)'도 만났다. 황근은 멸종 위기에 있다가 최근 안정적인 복원이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가로수로 늘어서 있었다.
 

법환바당의 일출
법환포구를 떠나면서 만난 백마
백마와 나의 애마 Helix를 한 프레임에 담았다.
여기서 한라산이 가장 가까이 보였다.
쇠소깍과 그 내력을 설명하는 간판
표선해변에서 만난 노랑무궁화 황근. 가로수로 심겨 있었다.
표선해변 인증센터. 돌하루방이 서 있는 가장 멋진 인증센터였다.

 
쇠소깍 인증센터와 표선해변 인증센터를 거치며 60km를 달려 성산일출봉 인증센터에 도착했을 때는 13시경이었다. 배가 고파 식당을 찾았으나 대부분 수요일은 정기휴일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좀더 달리다가 손님들로 북적대는 칼국수집을 발견하여 반가웠다. 순서를 기다린 끝에 '성산보말칼국수'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했는데, 한참을 오다가 보니까 앞서가던 친구의 등에 업혀 있어야 할 배낭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친구가 배낭을 가지러 식당으로 되돌아가면서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어쩐지 자전거가 잘 나가더라니까."
 

성산일출봉은 언제 보아도 멋지다. 사진을 몇 장이나 찍었다.
문주란과 성산일출봉. 문주란의 꽃을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철이 아니었다.
갯쑥부쟁이와 성산일출봉(성산일출봉 인증센터에서)


김녕성세기해변 인증센터를 거쳐 구좌읍의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을 때는 17시, GPS 거리계가 가리키는 오늘 탄 거리는 95km였다. 마을 안 식당에서 해물뚝배기로 저녁을 먹고 둘째 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평일이라서 게스트하우스는 미리 예약하지 않고도 바로 검색하여 전화를 하고 들어갈 수 있었다.

셋째 날은 40km 정도만 타면 될 것이므로 느긋하였다. 가는 길목에 있는 국립제주박물관에 들러서 제주도의 역사를 잠시 둘러보았다. 용두암 가는 길 언덕 위에선 제주항이 훤히 내려다보였는데, 마침 우리가 목포에서 타고 왔던 퀸제누비아호가 정박해 있어서 첫날 찍지 못했던 배의 사진을 멀리서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첫째 날에 찾지 못했던 용두암 인증센터를 행인에게 물어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인증센터는 용두암 주차장 안에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제주 환상자전거길 240여km를 완주하고, 우리는 용두암해변길의 횟집에서 '벵에돔' 회로 푸짐한 점심을 먹으며 자축하였다.
 

함덕서우봉 인증센터에서
셋째 날엔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제주박물관에도 들렀다.
제주박물관 앞의 하귤나무. 열매가 탐스럽다.
'하멜 표류기'에 대한 제주박물관의 코너 "이방인의 눈에 비친 제주"
제주박물관에서 잠시 영상자료를 시청했다.
제주항에 정박해 있는 퀸제누비아호.
용연구름다리 위에서
용두암 부근에서 점심으로 먹은 벵에돔 회. 쓰키다시로 새우튀김, 전복회, 고등어회, 갈치회, 멍게 등도 나왔다.

 
사흘간의 자전거길을 뒤돌아보면, 첫날은 강한 북서풍을 줄곧 안고 타야 해서 오르막길에서는 힘들었다. 두 친구는 이전에 국토 종주 자전거길을 거의 다 타본 경험이 있지만 나는 하루에 이렇게 많이 타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안장통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패드 바지를 사 입고 올까 하다가 평소에 50km를 탈 때 없었던 안장통이 100km를 탄다고 갑자기 나타날까 싶어 그 두꺼운 바지를 준비해 오지 않았던 것인데, 그건 잘 한 일이었다. 그리고 배낭을 지면 나의 체력에 쉬이 지칠 것 같아 배낭 대신 비교적 용량이 큰 핸들바백을 달고 간 것도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둘째 날은 바람이 많이 자기도 했지만 가파른 오르막길이 많지 않아서 그다지 힘들지 않았고, 셋째 날은 동풍이 등을 떠밀어주어 한결 편안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환상자전거길’은 노면이 거친 구간이 많고, 노면에 그어진 파란색 줄 하나로 차도와 구분된 곳도 많았다. 파란색 줄이 아예 없거나 지워져 잘 보이지 않는 구간도 여러 군데였으며 보행로와 겸한 구간이 대부분이었다. 인증센터마다 타이어 튜브에 공기를 넣을 수 있는 동력 펌프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제대로 작동되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불로천과 금호강과 낙동강의 넓고 평탄한 자전거길만 타던 나로서는 불만이 많았지만, 국토 종주를 많이 해본 두 친구들은 제주도의 자전거길이 서울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육지의 다른 도에 비해서는 괜찮은 편이라고 후한 평을 했다. 아무튼 두 친구들 덕분에 제주환상자전거길을 무사히 완주할 수 있어서 고맙고 마음이 뿌듯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댄싱(dancing)을 좀 익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르막길에서는 그것이 효율적인 페달링 방법이라는 것을 이번에 절실히 느꼈다. 댄싱도 할 줄 모르면서 지금까지 자전거를 탄다고 했으니…

돌아올 때는 비행기를 타기로 되어 있어서 자전거를 박스로 포장해야 했다. 제주공항 안에서도 포장이 가능하겠지만 우리는 부근의 자전거점을 찾아서 포장을 부탁했는데, 부피가 작은 접이식 자전거인데도, 그리고 헌 종이박스로 포장했는데도 대당 4만원씩이나 받았다. 포장한 자전거는 공항까지 사람과 함께 태워다 주었다.
 

 
제주공항 구내에서 우리는 취향에 따라 비빔밥과 우동으로 저녁을 먹고 한참을 기다린 끝에 21시 35분발 대구행 ‘제주항공’ 비행기를 탔다. 대구공항에 내렸을 때, 세 개의 자전거 박스는 러기지 클레임(luggage claim)의 컨베이어 벨트를 거치지 않고 승무원이 카트에 실어 우리에게 직접 갖다 주었다. 그렇게 자전거 박스를 다른 짐들과 구분하여 조심스레 다루어 준 제주항공이 고마웠다. 비행기에 자전거를 실을 땐 타이어의 공기압을 어느 정도 빼고 싣는 것이 원칙이라고 하지만, 대구공항엔 타이어에 공기를 넣을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에 공기압을 빼지 않고 자전거를 비행기에 실었었다. 그래도 내렸을 땐 아무런 문제점도 없었다. 나는 대구공항에서 3km의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 참고사항(교통비)
대구-목포 고속버스 요금 : 27,900원/1인
목포-제주(퀸제누비아 평일 이코노미석) : 36,300원/1인, 경로우대 31,700원/1인, 자전거 3,000원/1대
제주-대구(제주항공) : 89,600원/1인

(판교 데이터센터 화재로 인한 이른바 '카카오대란' 때문에 이 블로그도 며칠 먹통이 되었었다. 그래서 이제야 이 글을 올리지만, 아직도 완전한 복구가 되지 않아 글을 수정하는 기능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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