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전후한 7일간의 코로나 격리기간 동안 유례없이 적적하고 한가한 명절을 쇠면서 나는 집에서 몇 가지 온라인 쇼핑을 하였다. 추석 연휴 기간에는 택배사들도 모두 휴무를 하기 때문에 연휴가 끝난지 이틀째인 오늘에야 주문했던 물품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내가 주문한 물품들은 크고 비싼 것이 아니고 잡다한 생활용품이었다. 최근에 오작동을 자주 해서 바꿔야 할 블루투스 마우스, 뚜껑이 몇 달 전부터 말을 듣지 않는 전기 무선 주전자, 트럼펫 광택제인 실버 폴리쉬, 현관문에 나사를 박지 않고도 부착할 수 있는 무타공 말굽, 시집 한 권, 산성(酸性) 토양을 좋아하는 시골집 돌담 앞의 철쭉과 진달래와 뒤안의 블루베리를 위한 유황 입제(비료), 그리고 난 몇 포기.
그 중에서 내가 빨리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 것은 난이었다. 제주한란 소심 한 포기, 제주한란 단엽 백복륜 한 포기, 중국춘란 송매 한 포기 등을 주문했었는데, 모두 오늘 낮에 도착하였다. 제주한란 2종은 바크(bark 나무껍질 부스러기)로 채워진 플라스틱 화분에 심겨 있었고, 송매는 젖은 이끼와 신문지에 싸인 채 박스로 포장돼 왔다. 나는 집에 있던 빈 낙소화분과 동네 화분점에서 새로 사온 청자 화분에 이들을 심었다.
조직배양 후에 바크 속에서 자랐을 한란은 아직 그리 크지 않은 유묘라서 난석에 심는 것이 망설여졌지만, 어차피 분갈이를 할 바엔 난석에다 심어 일찍 적응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난석에다 심었다. 뿌리까지 작달막한 한란 단엽종은 잎 끝이 많이 잘려 있어서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한란 소심은 잎과 뿌리가 싱싱하고 깨끗했지만 세 포기가 한 화분에 심겨 있어서 두 개의 화분에다 나누어 심었다. 그리고 다른 판매처에서 다섯 촉짜리 큰 포기로 주문한 송매는 다 자란 포기라서 춘란이면서도 키가 컸다. 그 송매는 잎 끝 하나 마른 데가 없이 깨끗하여 건강해 보였는데, 뿌리가 길어서 크기가 넉넉한 청자 화분에다 심었다.
내가 동양란과 함께 살아온 세월은 꽤나 길다. 지금 베란다에는 '2000. 9.'라는 팻말을 달고 있는 설월화가 있다. 그건 22년 전 월성동에 살 때부터 우리집에서 살아왔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보다 몇 해 더 전 복현동에 살 때 나는 이곳 봉무동에 있던 한 난원에서 빼어난 꽃의 자태와 향기로 정평이 난 중국춘란인 송매와 서신매, 그리고 제주한란과 건란인 일지출 한 포기씩을 샀었다. 그중 송매는 두어 해 꽃을 피우더니 병이 들어 시름시름 말라버렸고 한란은 처음부터 상태가 좋지 않아 이내 죽고 말았다. 서신매는 지금까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향기롭고 예쁜 자태의 꽃을 못본 지가 오래 되었다.
봉무동으로 이사를 온 지가 벌써 4년째인데, 얇은 차광 커튼을 친 세탁실 겸 난실이 환경이 괜찮은 편인지 설월화, 옥화, 일지출, 상원황 등은 번갈아 꽃을 피우며 그런대로 잘 자라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 그러니까 25년쯤만에 다시 위에서 말한 송매와 한란을 새 식구로 맞이할 엄두를 낸 것이다. 지금은 예전에 비하면 조직배양 기술과 재배 기술이 발전하여 내가 좋아하는 난들을 이토록 쉽고 저렴하게 접할 수 있게 되었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난과 함께한 오늘이 내겐 가을을 맞이하며 오랜만에 벌인, 그리고 코로나 덕분에 벌인 뜻깊은 축제였던 셈이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나는 오늘 새 식구가 된 난의 가격이나 배송료 같은 돈 얘기는 일절 기록하지 않기로 한다. 왜냐하면 난들의 높은 자존감에 행여나 상처를 줄까 해서다. 물론 자존감이라는 것은 빈부나 돈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다. 제주한란과 송매의 그 청초하고 기품 있는 자태와 그윽한 향기를 생각하면 내 마음은 벌써 환해지고 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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