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일기

올 것이 왔다

공산(空山) 2022. 9. 7. 07:00

그저께 일요일은 집안에서 벌초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전날 울산에서 온 아들과 아내와 나 셋이서 아침을 새벽에 먹고 산가로 갔다. 나는 며칠 전에 미리 부모님 산소엔 벌초를 했기 때문에 사촌, 육촌 형제들과 거기에 딸린 오촌, 칠촌 조카들과 고조부 산소에서 합류하여 벌초를 마친 후 그 자리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벌초를 하는 곳에 가지 않고 여느 때처럼 산가에 남아 텃밭일을 하고 함께 돌아온 아내가 몸살이 난 듯했다. 발열은 없었지만 두통과 근육통이 있었다. 그런 아내를 집에서 쉬게 하고, 아들과 나는 함께 차를 타고 의자를 하나 사러 외출했다. 딱딱한 식탁 의자를 책상 의자로 쓰고 있는 내게 아들이 편한 의자를 사 주겠다고 했던 것이다. 실은 나도 의자를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것을 사야 좋을지 몰라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터였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휠씬 비싼 의자를 사 준 아들은 아파트에서 함께 저녁을 먹은 후 울산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해열제를 먹은 아내는 몸이 많이 가뿐해졌다며, 며칠 전에 참깨를 털어서 몸살이 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튿날인 어제 아침에 일어나서도 아내의 두통과 근육통은 가라앉지 않았고 오후부터는 간간이 기침도 하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자고 했지만 다시 해열제를 먹은 아내는 소파에 누워 종일 졸기만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몸살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땐 목소리가 좀 꺼칠해진 것 같아 그제서야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아침을 먹고 태풍 '힌남노'가 부산 앞바다를 지나가고 있을 무렵, 아내에겐 이따가 병원에 코로나 항원검사를 하러 가라고 하고 나는 산가로 갔다. 아직 태풍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산가와 텃밭은 아수라장이었다. 마당엔 감과 감잎이 자욱하게 떨어져 있었고, 마을앞 길에 쓰러진 아름드리 오동나무를 119안전센터 대원들이 자르고 있었다. 텃밭의 고춧대와 옥수수, 대추나무, 들깨가 모두 쓰러져 있었다.

텃밭을 둘러보는 동안 바람은 점점 잦아들어서 조용해졌다. 고춧대를 일으켜 세우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전화가 왔다. 7일분의 치료약도 처방받았다고 했다. 아내가 확진이라면 나도 무사할 리가 있겠는가. 오른쪽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는 것을 화장실 거울에서 발견하고 검색을 해 보니 코로나 증상일 수도 있다는 글이 눈에 띄었다. 나는 병원의 퇴근시간 이전에 검사를 받기 위해 서둘러 시내로 나와 항원검사를 받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도 확진이었다. 의사는 눈의 충혈은 코로나 증상이 아니라고 말하며 아무 증상이 없는 나에게 '팍스로비드' 5일치를 처방해 주었다.

아내는 하루에 세 번 먹는 약을 먹지만, 내가 먹는 팍스로비드는 하루에 두 번 먹는다. 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에 먹었는데, 약을 먹어서 입 안에 가득 쓴맛이 도는 것 말고는 아무 증상도 없다. 아들은 자가 테스트를 해 보았지만 음성이라고 했다. 어디서 감염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내는 매일 저녁 피트니스 센터에서 목욕을 하고, 나는 지난 일요일에 예식장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 두 곳이 가장 의심스럽긴 하다. 내가 4차 예방접종으로 모더나를 맞은 지는 5개월 반이 지났고, 아내는 4개월쯤 지났다. 우스운 얘기가 될지는 모르지만 이번 감염이 5차 접종을 갈음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팬데믹에 접어들고부터 2년 반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그동안 알파, 델타, 오미크론, 켄타우로스에 이르기까지 변이종들과 싸우며 잘 버텨왔는데, 조금 방심하는 사이 하루아침에 아내와 나는 코로나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격리기간 7일 동안 자전거를 타고 혼자 강가에 나가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나의 우문에 안 된다는 보건소의 대답이다. 올 추석은 확진자 둘이서 조용히 약식으로 쇠는 수 밖에 없겠다.

태풍에 쓰러진 오동나무를 119 대원이 잘라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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